본문 바로가기
살아가는 모습/생각

슬로푸드, 패스트푸드 - 유기농은 무조건 좋은 것인가?

by 내오랜꿈 2015. 10. 9.
728x90
반응형


1. 슬로푸드(Slow Food)


인간의 몸은 기본적으로 게으르게 설계되어 있다. 당분을 섭취하면 별다른 노력 없이도 빠르게 소화 흡수가 가능하지만 셀룰로오스(섬유소) 성분이 많이 함유된 물질이 들어오면 그것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게으르게 설계된 인간은 당연히 여러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들보단 빨리 흡수할 수 있는 것들을 선호한다. 단 것과 육류를 좋아하고 식이섬유 성분을 싫어하는 인간의 일반적인 경향은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DNA의 본능에 기인한다. 이런 측면에서도 유전자는 아주 '이기적'이다. 자기 몸의 비만과 그에 따른 성인병의 위험을 알면서도 달고 육류 일색인 패스트푸드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이기적 유전자.


먹거리 안전에 대한 관심의 증가와 맞물려 이러한 패스트푸드를 지양하고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슬로푸드에 대해 수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로마의 에스파냐 광장에 들어선 맥도날드 체인점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은 이후 30년 가까운 논의를 통해 이제는 하나의 운동을 넘어 음식 그 자체이자 삶의 지향을 일컫는 말로까지 승화되어 있다.



▲ 국제 슬로푸드 한국 협회의 심벌. 느림의 상징인 달팽이다.

초기의 슬로푸드 운동은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맥도널드에 반대하는 개념으로 시작한 '안티 맥도널드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만이나 당뇨병 등 성인병의 주범으로 꼽히는 패스트푸드에 대항하여 그 지역에서 생산된 재료를 바탕으로 정성이 가득 담긴 전통음식을 만들어 먹음으로서 건강한 먹거리를 되찾자는 취지였던 것. 이렇게 시작된 슬로푸드 운동은 전 세계로 번져나갔고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간혹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무조건적인 지역농산물 사랑으로 변질되어 상업화되거나 유기농산물을 가르키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지만 이제는 삶의 과정이나 태도가 반영된 식생활 전반을 지칭하는 말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2. 패스트푸드(Fast Food) - 빨리 만들어져 문제가 되는 것


슬로푸드가 음식 그 자체를 가르키는 말이라면 우리는 그 반대 개념인 패스트푸드를 명확히 이해하는 데서 슬로푸드를 새롭게 정의 내릴 수 있다. '패스트푸드(Fast Food)'. 말 그대로 빨리 만들어진 음식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패스트푸드의 대명사로 햄버거나 피자를 떠올린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패스트푸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빨리 만들어지는 식재료도 패스트푸드에 속한다. 하우스 안에서 최적의 온도, 습도, 양분을 공급받아 자라는 채소도 엄밀히 말하면 패스트푸드다. 자연상태에서는 60일을 자라야 수확할 수 있는 채소가 최적의 조건을 갖춘 하우스 안에서 50일 만에 수확한다면 그것 역시 패스트푸드인 것이다.


채소든 과일이든 쌀이든 빨리 성장하고 빨리 수확하는 품종을 조생종이라고 한다. 빨리 만들어진 패스트푸드가 문제가 되듯 빨리 자라고 빨리 수확한 조생종도 문제를 일으키고 저장능력도 떨어진다. 배, 쌀, 양파 등 모든 조생종은 저장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저온 상태에서 두세 달은 기본적으로 저장되는 배의 경우 조생종은 일주일도 저장하기 힘들다. 농사 짓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양파도 조생종은 자연 상태에서 여름 한철 나기도 힘들다. 빨리 자라면 조직이 치밀하게 자라지 못하기 때문에 저장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빨리 수확하기 위해 품종을 개량한 조생종조차도 이러하니 하우스 안에서 물 주고 비료 주고 속성으로 키워 수확한 채소는 자연 상태에서 자란 채소보다 훨씬 더 연약하고 저장능력이 떨어짐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다. 굳이 하우스 안이 아니더라도 물 듬뿍 주고 퇴비 듬뿍 주며 키운 작물은 이런 패스트푸드의 속성을 그대로 지닐 수밖에 없다. 물과 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제 스스로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기보다는 인위적으로 공급된 물과 양분에 안주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농약의 유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 유기농산물은 무조건 슬로푸드인가?


3. 유기질 퇴비와 화학비료의 차이?


우리나라의 유기농산물 인증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규정한 유기농산물은 유기합성 농약과 화학비료를 일체 쓰지 않고 재배한 작물을 일컫는다. 이 말은 유기질 퇴비는 얼마든지 주어도 괜찮다는 말과 동일하다. 당연히 쉑쉑거리며 돌아가는 스프링쿨러나 점적호스를 통한 관수시설도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그렇다면 유기질 퇴비를 듬뿍 넣고 관수시설을 통해 물 듬뿍 주고 키운 유기농 채소가 관행농으로 키운 채소보다 좋아보이는 점은 오로지 농약을 안 쳤다는 것 뿐이다(요즘은 유기 인증 받은 농약도 엄청 많다는 것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도록 하자. 이거 친다고 유기농산물이 아닌 건 아니다). 이게 무슨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까?


일본 도쿄에서 자연재배 농산물만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Natural Harmony’ 매장을 운영하는 가와나 히데오씨가 한 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있다. 부패실험과 질산태질소 실험이다(자세한 것은 유기농 맹신 주의! 식탁 위, 위험한 채소, <여성중앙> 2011. 08. 31. 참조. 또는 "자연농법 4 - 가와나씨의 ‘Natural Harmony’ 매장" 참조).


▲ 사진1 ; 자연재배 무와 일반재배 무의 부패실험 비교. 소독한 병에 각각의 무를 넣고 공기를 차단한 뒤 변화하는 모습을 비교한 것. 실험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나자 일반재배 무는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녹아내린다. 4년이 지난 뒤에도 자연재배 무는 절여진 것 비슷한 상태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진 출처 "인터넷 <여성중앙>" 2011 08 31


▲ 사진 2 : 자연재배, 유기재배, 일반재배 당근과 오이의 부패실험 비교. 사진 출처 "인터넷 <여성중앙>" 2011 08 31


'부패실험'은 두 가지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자연재배 무와 일반재배 무의 부패실험 비교. 소독한 병에 각각의 무를 넣고 공기를 차단한 뒤 변화하는 모습을 비교한 것. 실험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나자 일반재배 무는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녹아내린다. 이 실험은 2007년에 시작했는데 4년이 지난 2011년까지 자연재배 무는 절여진 것 비슷한 상태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자연재배, 유기재배, 일반재배 당근과 오이의 부패실험 비교. 각각의 당근과 오이를 잘게 잘라 유리병 속에 넣고 뚜껑을 닫은 다음 상온에 둔다. 하루에 한 번씩 뚜껑을 열고 닫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장 먼저 부패하는 것이 유기재배로 키운 것이었다고 한다. 다음이 일반재배. 자연재배 한 것은 썩지 않고 절임상태가 된다. 즉 발효된다.


제대로 된 식물은 말라야 정상이다. 썩지 않는 않는 사과로 유명해진 기무라 아키노리의 <기적의 사과>에도 나오지만 과일이나 채소를 자연상태에 두었을 때 썩는다는 건 이상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건 일반재배가 유기재배보다 부패 속도가 늦었다는 것. 이것은 일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실험에 쓰인 유기재배 당근과 오이가 일반재배보다 더 많은 질소 성분을 먹고 속성으로 자랐다는 걸 나타낸다고 봐야 한다. 즉 화학비료에는 질소량이 많이 제한돼 있지만 유기재배의 경우 질소량을 생각지 않고 퇴비를 많이 주었기 때문일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할 거 같다. 곧 화학비료는 속효성으로 한 번 흡수하고 말지만 유기질 퇴비는 완효성으로 땅속에 남아 지속적으로 작물에게 질소 성분을 공급한다. 작물에게 있어 화학비료나 유기질 퇴비는 비료 성분이라는 측면에서 전혀 다를 게 없다. 화학비료는 나쁘고 유기질 퇴비는 좋은 것이란 생각은 아둔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환상이자 하나의 '도그마'일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먹는 채소의 인체 유해 여부에서 가장 큰 문제는 농약 문제라기보다 질산태질소의 농도 문제가 더 크다고 본다. 질산태질소는 체내에서 아미노산과 결합해 '니트로소아민'이라는 1급 발암물질을 만든다. 뿐만 아니라 혈액 속에서 헤모글로빈과 결합하여 '메트헤모글로빈'으로 바뀌면서 산소 운반을 어렵게 만든다고 한다. 그래서 "WHO"에서는 질산태질소 섭취 하루 권장량을 정하여 발표하고 있을 정도다. 혹시 '블루베이비 증후군'이라고 들어 보셨는지? '청색증'이라고도 하는데 미국에서 어린 아이들이 몸과 얼굴에 푸른 빛을 띈 채 질식사한 사례가 보고되어 조사하던 중 발견된 증상을 일컫는다. 이유식에 들어있는 시금치의 질산태질소 성분 때문이라는 게 밝혀졌는데 질산태 질소가 혈액의 산소 공급을 차단해 연약한 아기들을 질식사하게 만든 것이다. 아기 이유식을 만들면서 몸에 좋은 유기농 시금치라는 생각만 한 아기 엄마들이 과도하게 갈아 넣은 탓에 생긴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유기농이나 관행농이나 작물은 인간이 주는 대로 흡수한다. 화학비료 싫어서 흡수 안 하고 유기질 퇴비만 흡수하는 작물이 있는가? 결국 작물 입장에서는 하등 다를 게 없는 화학비료나 유기질 퇴비를 인간들이 그 어떤 의도된 목적을 가지고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한 것이고 이 구분은 하나의 '도그마'가 되어 우리 일상을 지배하려 들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순수하고 좋은 의도로 시작된 유기농일지 몰라도(예컨대 초창기의 '한살림' 운동처럼) 지금 우리의 일상을 파고드는 유기농은 자본의 이윤추구 메카니즘에 포섭된 것이거나 일부 힘 있고 규모화된 생산자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에 불과하다. 이 상업적 시스템의 끄트머리 한 자리라도 붙잡으려는 불쌍한 소규모 유기농 생산자와 유기농을 무조건적인 '선'으로 착각하기에 기꺼이 더 많은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 있는 소비자를 볼모로 진행되는 돈벌이 수단.


4. 유기농산물은 과연 슬로푸드인가?


슬로푸드와 관련된 논의가 아니더라도 유기농이나 일반농이나 영양적인 측면에서는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는 건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고 이제는 웬만한 사람이라면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농약이나 화학비료의 과다 사용에 따른 안전성 여부가 쟁점이 될 뿐이다. 그런데 화학비료의 과다 시비나 유기질 퇴비의 과다 시비나 작물 입장에서 보면 전혀 다를 게 없다. 작물의 생장 속도나 조직의 치밀함과 관련되는 비료 성분의 공급에 있어 유기농이나 관행농이나 큰 차이가 없다면 결국 같은 유기농이라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작물의 조직과 성장 속도는 천차만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건 관행농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패스트푸드가 되느냐 슬로푸드가 되느냐는 건 결국 어떻게 키우느냐의 문제다. 제 스스로 영양분을 찾아 먹으려는 노력을 통해 치밀하고 단단한 조직으로 크느냐, 넘치는 영양분을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고 부드럽고 연약하게 크느냐의 문제. 유기농은 무조건 좋은 것이고 일반농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사고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선입견에 근거한 편견이듯이 유기농은 무조건 슬로푸드라는 생각 역시 전혀 근거 없는 편견에 불과하다.


쉬운 예를 들자면 인삼과 산삼을 비교할 수 있겠다. 인삼은 엄청난 비료 성분으로 6년이면 다 자라지만 산삼은 그 크기로 자랄려면 몇십 년을 자라도 모자란다. 인삼이 패스트푸드라면 산삼은 슬로푸드다. 인삼을 제 아무리 잘 발효된 유기질 퇴비를 주고 키웠어도 산삼과 비교하면 패스트푸드일 수밖에 없다. 물론 비교 구분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자연에서 자라는 산야초가 모두 뛰어난 약리 작용을 보이며 건강에 좋은 이유도 산삼과 마찬가지로 슬로푸드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서 다른 식물과의 경쟁을 통해 자신의 생존 능력을 높여 스스로 살아남은 것들. 슬로푸드란 이런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인위적으로 크고 굵고 무게가 많이 나가게 빨리 키우지 않은 것들. 그래서 난 유기농 한다면서 크고 무게 많이 나가게 키운 걸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보면 측은한 생각마저 든다. 유기농을 한다면서 왜 패스트푸드 식의 사고를 하는지 모르겠다. 유기농산물이 슬로푸드가 되느냐 패스트푸드가 되느냐의 문제는 결국 키우는 사람의 삶의 태도나 지향까지 연관된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슬로푸드를 이야기하고 먹거리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인터넷이나 SNS 등에서 슬로푸드를 언급하는 사람들 중에는 (외국 농산물에 대항해) 우리 농산물은 무조건 슬로푸드라 부르거나 특정 지역에서 생산되어 그 지역에 유통되는 건 무조건 슬로푸드라 규정하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단순히 햄버거나 피자와 같은 패스트푸드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슬로푸드를 지칭하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 슬로푸드는 단지 속도나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식생활의 전 과정을 아우르는 삶의 지향이나 태도 그 자체라 해야 할 것이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