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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습/생태환경

냉이 - 사람을 따라 다니는 풀, 인간과 공존하는 풀

by 내오랜꿈 2016.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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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를 일컬어 흔히들 '사람을 따라 다니는 풀'이라고 한다. 수풀이 우거진 산야는 물론이고 논밭이라 하더라도 해마다 경작하지 않는 땅에서는 잘 번식하지 못 하는 식물이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 '로제트' 전략을 펴는 대부분의 해넘이살이 식물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최대한 햇볕을 많이 받아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식물들에게 그늘이란 곧 죽음일 터. 그러니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수많은 잡초를 제거해 주는 농부의 부지런한 손길은 냉이의 생명줄인 셈이다. 그에 대한 보답인지는 몰라도 냉이는 나물로 국으로 심지어 세안제의 원료로 쓰이는 등 사람들에게 갖가지 쓰임새를 제공한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고 받는 셈이니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공생관계'의 일종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냉이

▲ 좁쌀황새냉이

▲ 뽀리뱅이

▲ 재쑥

▲ 지칭개


냉이란 말의 어원을 추적하면 조선 초에 간행된 <향약구급방>에 내이(乃耳), 나이(那耳)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한자를 차자한 향명일 테니 나이(내이), 나시, 남새, 나생이 등의 어원과 잇닿아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오래 전부터 이른 봄, 쑥보다 먼저 캐먹는 봄나물의 선두 주자로 사랑받았지만 요즈음 냉이는 봄이 아니라 늦가을이나 겨울철에 자주 먹게 되는 푸성귀다. 하우스 재배로 인해 겨울철에도 마트에서 손쉽게 사 먹을 수 있는 까닭도 있지만 남부지방의 경우 냉이는 2월 중순이면 벌써 꽃대를 올리고 종족 번식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전, 집 주변을 산책하면서 보니 논둑 밭둑에 냉이, 좁쌀황새냉이, 꽃다지, 뽀리뱅이, 큰방가지똥 등 로제트 잎으로 겨울을 나는 해넘이살이 풀들이 벌써 꽃을 피웠거나 꽃대를 올리고 있다. 지칭개, 민들레, 개망초, 달맞이, 배암차즈기(곰보배추) 등은 아직 꽃을 피우지는 않았지만 여차하면 꽃대를 세울 준비를 하고 있다. 식물도감에서 이들 식물의 생태를 찾아 보면 대부분 4~6월에 꽃을 피운다고 되어 있지만(망초 종류만 여름에 핀다) 남도 해안가 지역은 장·단일 조건을 따지지 않는 국화과나 십자화과 해넘이살이 식물은 늦어도 3월 안에 대부분 꽃을 피우는 것 같다. 이제 이곳에서 봄냉이는 옛말이다.



▲ 달맞이꽃

▲ 배암차즈기(곰보배추)

▲ 개쑥갓

▲ 개망초

▲ 꽃다지


처음 시골생활을 시작할 때 냉이를 캐면서 참 많이도 헷갈렸다. 냉이 비슷한 게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식물생태도감 같은 책들을 보면서 황새냉이나 말냉이, 좁쌀냉이, 개갓냉이, 싸리냉이, 다닥냉이 등 냉이 종류가 많기도 하지만 지칭개, 뽀리뱅이 등 국화과 풀들도 냉이와 아주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오히려 개갓냉이나 말냉이보다는 지칭개나 뽀리뱅이가 더 냉이 같아 보인다. 아마도 식물 분류란 게 대개는 종자의 번식방법을 가지고 분류하는 것이다 보니 꽃 모양이 유사한 게 일차적인 분류기준이 되는 까닭에 지칭개나 뽀리뱅이는 냉이와 흡사한 모습이지만 꽃 모양에 따라 국화과로 분류되는 것 같다.


한겨울이나 이른 봄에 냉이를 캐다 보면 의외로 많은 식물들이 인간과 공존하며 겨울을 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로제트 전략을 펴는 식물들뿐 아니라 광대나물, 벼룩나물, 점나도나물, 갈퀴덩굴, 벼룩이자리 등과 같이 가늘고 연약한 잎과 줄기로 땅바닥을 기고 있는 해넘이살이 식물들이 그것들이다. 땅바닥에 엎드려 바람과 추위를 견디며 광합성을 하는 이 식물들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자랄 수 없다. 순식간에 자신들을 덮어서 광합성을 막아버리는 키 큰 풀들과 경쟁해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것. 어쩌면 다른 풀들과의 경쟁은 이들의 DNA에는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대신 인간을 비롯한 그 누군가가 자신들의 경쟁자들을 제거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이들이 선택한 생존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점나도나물 씨앗은 40년 동안 땅 속에 파묻혀 있었는데도 생명력을 유지했다고 한다(『한국식물생태보감』, p287). 장명종자라 불리는 콩, 호박, 녹두 등의 종자수명 유효기간이 5년 정도인 걸 생각하면 한해살이를 위해 40년을 기다린다는 건 인간의 셈법으로는 도저히 이해불가능한 수치다. 아마도 이들은 이길 수 없는 경쟁을 하느라 힘을 소모하느니 차라리 기약 없는 내일일지라도 기다림을 선택하고 오랜 기간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향으로 DNA를 발전시켜 온 것이리라. 무릇, 모든 생명들은 인간의 오래된 스승들이다.



▲ 점나도나물

▲ 벼룩나물

▲ 광대나물

▲ 갈퀴덩굴


보잘 것 없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돌아봄. 시골생활을 하면서 몸에 베게 되는 자그마한 변화다. 텃밭에 잔뜩 움츠려 있던 벼룩나물과 광대나물이 몸집을 불리고 매화 꽃망울 하나하나가 부풀어 오르는 걸 보면서 봄이 시작되었음을 느끼고, 마늘종이 고개를 내밀고 작약 꽃망울이 부풀어 오르는 걸 보면서 여름이 머지 않았음을 감지하게 된다. 매일 눈길을 주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활짝 핀 모습만 보게 될 것들이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들보다 하루라도 빨리 한껏 멋을 내고픈 여인네들의 옷차림새나 성급한 나들이객을 비추는 뉴스 카메라 앵글을 보면서 계절의 변화를 느꼈던 평범한 도회지 사람이었음을 생각하면 몇 년 새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들이 참 많이도 달라진 셈이다.


너무 평범하고 사소해 보이기 때문에 세련되고 거창한 지식이나 사유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버리는 것들에 대한 관심. 지금 내가 눈길을 주고 있는 것들이다. 사실 모든 세련됨이나 거창함은 보잘 것 없는 사소한 것들에 대한 사유에서 출발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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