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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Book

<철학극장, 욕망하는 영화기계> - '영화로 철학하기' 혹은 '영화와 친구하기'

by 내오랜꿈 2007.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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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철학한다고 해서-인용자) 예술적인 영화를 '폼나게' 해석하는 것도, 난해한 철학을 세련되게 해석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배치'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영화를 통해 낯설고 이질적인 사유를 구성하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발딛고 있는 삶을 전혀 다른 실험의 장으로 변환하는 것, 혹은 영화와 접속하여 낡고 익숙한 사유체계를 슬그머니 뒤집어 전혀 다른 용법으로 활용하는 것. 이런 측면에서 우리에게 영화란 삶의 이질성이 고동치고, 전복적인 사유가 범람하는 '철학극장'인 셈이다."('책머리에' 중에서)

영화비평이라는 것. 우리가 흔히 보는 것이지만, 어떤 영화에 대한 정보를 모아서 보여주는 것은 그 영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영화에 대한 비평과 동일시되는 현상은 그다지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사실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마음만 먹으면 그런 정도의 정보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며, 또 상당수는 전문가 못지 않은 식견을 갖추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영화비평이 이런 식의 정보 나열과 영화감상후기 식으로 이루어진다면, 비평이 따로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2003 소명출판

<철학극장, 욕망하는 영화기계>는 영화에 대한 기존의 상투적 비평을 넘어 '영화로 철학하기'를 시도하는 일련의 흐름들의 연장선 상에 있는 글들을 모은 책이다. 곧 '필로시네마'란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해온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의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쓰여진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영화에 대한 15개의 글들을 5개의 소주제로 분류하여 엮고 있지만 크게 보면 '욕망'이라는 테마를 둘러싼 다양한 흐름들, 곧 욕망을 억압하고 주어진 틀에 포획하려는 근대적 폭력기제들에 대한 문제제기, 그 억압을 벗어나려는 다양한 시도나 존재들에 대한 문제제기 등 궁극적으로 '욕망과 배치', '욕망과 권력'의 문제로 수렴된다.

여기서 욕망은 무언가 끈적끈적하고 부정의 이미지를 내포하는 욕망이 아니라 무언가를 생산하려는 긍정적 힘으로서의 욕망이다. 다시 말해서 욕망이란 결여된 것을 채우려는 의지라고 보는 일반화된 관점, 그리고 라캉에 의해 정교하게 발전된 개념에 반대하여, 그것은 무엇인가를 생산하려는 의지고, 따라서 생산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의 욕망 개념에 근거한 것인데, 스피노자가 말하는 '코나투스'나 니체가 말하는 '권력의지'와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며, 욕망은 상징계 속에서 언어적으로 구조화된다"는 라캉의 이론에 반대하여 "욕망은 그 자체로서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무의식"이라 주장한다.

곧 라캉의 욕망이 '결여' 혹은 '상실'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것이라면, 들뢰즈/가타리의 욕망은 결여가 아니라 '생산'이며, 상실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긍정적 힘'인 것이다.

그런데 이 욕망은 삶의 양상이 다양한 만큼 다양한 '배치'로 존재한다. 욕망은 원래 계급의 구별도, 남성과 여성의 구별도, 동성애와 이성애의 구별도, 백인과 유색인의 구별도 인식하지 못한다. 특정한 '배치' 속에서만 욕망은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받아들인다.

따라서 욕망은 어떤 배치 속에서 작동하느냐에 따라 혁명적일 수도 있고, 파시즘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때 이 욕망은 철저하게 '권력'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인용하며, '정치(학)의 근본문제'로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대중들은 왜 그것이 마치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 것인가?" (자세한 것은 이 책 제4부의 <랜드 앤 프리덤> 참조)

이른바 '코드화된 욕망', 바로 권력에 길들여지고 특정한 질서에 포섭되고 그것에 의해 코드화된 욕망의 문제이다. 권력은 욕망을 억압함으로써 작동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길들임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욕망하는 기계들 혹은 소수자-되기"에서 분석하고 있는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집시의 시간>, <에드우드>는 이러한 욕망을 억압하고 길들이는 사회체제의 이면에 존재하는 소수자의 삶, 소수자의 꿈을 다루고 있다.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서 클라라와 해리, 조젯이 그리는 삶의 선들은 이들의 욕망을 각기 다른 방향의 벡터를 갖는 다른 욕망과 조우하게 하고 서로 부딪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새로운 삶의 생성으로 변화시키는 흐름을 찾지는 못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욕망의 다양한 흐름들이 갖는 혁명성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대표할 조직을 생각하고 대표자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로 조직화된 욕망은 결코 혁명적일 수 없다. 욕망의 혁명성은 조직화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조직화할 수 없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와 미시정치"에서는 우리의 신체 깊숙히 각인되어 있는 억압기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성, 가족, 가부장제와 종교라는 억압기제가 작동하는 우리의 신체와 그것으로부터의 탈주. 

<안토니아스 라인>을 분석하면서 단순히 페미니즘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페미니즘 너머의 세계를 응시하는, 여성이 아니라 소수자의 삶과 그것으로부터 탈주하고자 하는 욕망에 관한 것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비록 김기덕의 <섬>에서처럼 '재영토화'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할지라도 죽음조차 불사하는 탈주의 감행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근대적 권력의 몇 가지 초상"에서는 이러한 욕망과 결부되어 있는 권력의 문제, 곧 파시즘의 문제를 제기한다. 폭력을 계도하는 폭력의 문제(<클락워크 오렌지>), 일상적 메카니즘으로 자리잡은 파시즘의 문제(세 친구>), 역사 속의 파시즘 문제(<랜드 앤 프리덤>)를 동일선상에 놓고 무엇이 다른가를 반문한다.

파시즘은 광화문에 모여 '대한민국'을 외치는 붉은 악마의 물결 속에서도 존재하며, 일상적인 법체계 속에도 존재하고, 동성애자들이나 이주노동자들에게 행해지는 우리들의 까닭 모를 분노 속에서도 존재한다. 이제 파시즘은 더 이상 국가나 민족, 인종의 수준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로 파고 들어와서 우리들의 욕망 자체를 제어한다.

그렇다면, 파시즘이 이러한 미시적 수준에서 작동하고 있다면, 혁명 역시 그와 같은 수준에서 작동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욕망이 파시즘으로 변환될 수 있다면, 욕망은 또한 혁명으로 변환될 수도 있는 것이기에…. 파시즘이 현재진행형이라면 혁명 역시 현재진행형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욕망이 갖는 혁명적 성격과 잠재력이며, 또한 어떤 혁명도 욕망에 기초하지 않고선 곤란하리란 점을 깨우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혁명적 운동이란 의무나 도덕에 의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어 하는 것이란 점, 즉 욕망에 의해 하는 것이란 점을 상기해야 한다"는 말을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흔히 좌파들이 하기 쉬운 오해, "욕망은 혁명적이다"라는 들뢰즈/가타리의 명제를 욕망에 대한 무조건적 찬사로 간주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이 명제는 욕망이란 어떠한 사회 질서와도 근본적으로 충돌하고 대립할 것이란 것을 뜻하지, 욕망이 혁명을 만들거나 혁명과 동일시됨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켄 로치가 <랜드 앤 프리덤>에 관해 "Toby Banks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은 여전히 진행형인 '전쟁기계'의 본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고병권의 분석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젊은 사람들이, 옛 경구를 빌어 말하자면, '투쟁은 계속된다'는 것, 그것은 과거 안에 매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희망합니다."(234쪽)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철학극장, 욕망하는 영화기계>, 소명출판(2002)

목차


제1부 욕망하는 기계들 혹은 소수자-되기

구원의 길, 구원받지 못한 사랑 - 비상구는 누구에게 열렸는가 :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아직 오지 않은 민중'의 시간 : <집시의 시간>
"에드우드" - 욕망하는 영화기계들의 이름 : <에드우드>

제2부 섹슈얼리트와 미시정치

욕망, 이름, 계급의 삼중주? :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그녀들의 기계, 타자들의 공동체 : <안토니아스 라인>
욕망, 그 포획과 미끄러짐 사이 : 김기덕의 <섬>을 읽는다

제3부 기억의 그림자와 망각의 빛

그림자와 실체에 대한 철학적 물음들 : <카게무샤>
잠행, 기억에 반하는 여행 : <허공에의 질주>
'사이'의 긴장을 포기한 박쥐의 안식처 : <베트맨>

제4부 근대적 권력의 몇 가지 초상

폭력을 증요하는 폭력 : <클락워크 오렌지>
군대, 그 일상적 파시즘에 대한 사실주의 보고서 : <세 친구>
전쟁기계와 포획장치 : <랜드 앤 프리덤>

제5부 부재하는 세계의 존재론

근대, 혹은 계산 가능한 세계의 초상 : <알파빌>
'종합적 쾌락' 혹은 기계적 종합의 원리에 관한 고찰 : 이아라 리의 영화 <종합적 쾌락(Synthetic Pleasure)>
자연의 존재론과 무위의 윤리학 : <솔라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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