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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Book

<유머로서의 유물론> - 서구의 철학으로 그려내는 일본의 '얼굴'

by 내오랜꿈 2007.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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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철학으로 그려내는 일본의 '얼굴' 
가라타니 고진, <유머로서의 유물론>


누구나 유머적인 정신 상태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드물게 밖에 발견되지 않는 천분이며, 수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주는 유머적 쾌감을 맛볼 능력조차 결핍되어 있다. (프로이트, <유머>, 132쪽)

 
 
 
 
ⓒ2003 문화과학사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세계 문학계가 알아주는 일본의 문예비평가이다. 스스로 '비평가'라고 불리길 자청했지만 가라타니 고진은 단순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비평가, 평론가와는 좀 차원이 다르다. 아즈마 히로키(東 浩紀)가 이 책의 '해설'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스스로 비평가이기를 자청하는 것은 기존의 문예비평의 전통, 곧 비평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내고 동시대의 문학(의 경향)을 읽어낼 수 있었던 전통을 잃어버리고 '동업자비평' 수준으로 전락한 현실에 맞서고 저항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일본의 문화, 문학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색안경을 끼고 보게 마련인 우리나라에서조차 최근에 소개되고 있는 그의 저서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번역서는 '덧붙이는 글' 참조). 

이를 문학평론가 홍정선 교수는 문화일보를 통해 "가라타니의 저술활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적인 학문풍토와 상당히 다른 세계다. 그는 작은 주제에 철저하게 매달리는 일본적인 아카데미즘과는 반대로 넓고 큰 문제들을 거침없이 다루는 서구적인 아카데미즘의 세계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는 문학이라는 영역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철학, 역사, 건축, 마르크시즘 등 폭넓은 세계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개방시켜왔다"고 하면서 이런 가라타니의 세계성과 열린 정신이 우리나라에서도 주목받게 된 이유일 것이라 말하고 있다. 실제로 가라타니는 일본에서는 드물게도 천황제에 반대하는 비판적 지식인 그룹에 속한다.

<유머로서의 유물론>은 이런 가라타니 고진이 1969년부터 작업해온 것들을 모아서 엮은 '평론'집이다. 그 대부분이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잡지에 실린 원고들이라고 한다. 평론이라고는 하지만 '하나의 공간, 두 개의 19세기', '비데카르트적 코기토', '푸코와 일본', '라이프니쯔 증후군' 등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철학과 문학, 건축을 오가는 '메타담론'에 가까운 비평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편집 순서대로 읽어도 좋고 각 글마다 따로 읽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필자는 후자의 방법을 택했는데, 그건 전적으로 필자의 일본 문학에 대한 무지 탓이다. 

일본 문학이나 문화에 생경한 필자에게는 그들의 작품이나 작가들이 나열되는 문학사가 다소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푸코와 일본', '라이프니쯔 증후군'과 같이 어느 정도 익숙하게 다가오는 글부터 읽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아마도 문학보다는 철학에 익숙한 필자의 취향 탓일 것이다. 그러나 다 읽고 난 후에 생각해보니 이건 쓸데없는 선입견에 따른 선택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글이나 단순히 철학이나 문학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학문영역을 횡단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기에.

이러한 가라타니의 방법론은 어찌 보면 푸코의 '고고학'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다만 푸코가 광기나 성, 권력 등 서구 근대사회의 메타담론에 입각해서 고고학적 계보학을 형성하고 있다면, 고진은 근대국가의 성립,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근대의 형성에 가장 가까이 있는 문학담론의 형성으로써 일본 근대의 기원을 파헤치는 수순을 밟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1980)에서 도입한 이러한 방법론을 이용해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에서는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원용, '에크리튀르'(Ecruture:문자/글말)에 대한 통찰을 얻어내고 이를 메이지(明治)시대의 언문일치 연구를 통해서 다시 데리다를 뒤집어 버린다. 

언어에서 문자를 배제한 소쉬르 이래의 언어학의 음성중심주의를 데리다는 플라톤 이래의 서양 형이상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지만 가라타니는 근대 민족의 형성과 분리할 수 없는 문제로 보는 것이다. 

"근대의 민족은 각각 '세계 제국' 안에서 분절화되어 출현한다. 그것을 정치적인 국가의 측면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별도의 계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문학'에 의해, 아니면 '미학'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 64쪽)

이를 설명하기 위해 소쉬르, 야콥슨, 데리다는 물론 우리에게 생소한 토키에다와 같은 일본 언어학자들의 이름들이 나열되지만 결론은 (일본)언어(≒문학)를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분리해서 사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곧 일본만의 고유한 '표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라타니의 인식은 "푸코와 일본"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푸코가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일본에 관해 책을 썼던 (…) 하이데거로부터 코제브, 바르트,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 그들에겐 일본이란 서양 외부의,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nowhere)이며, 그곳에 그들의 '서구' 비판이 투사되고 있다. 그 '일본'이 그들의 표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일본인으로서도 '일본'은 중국이나 서양이라는 거울에 비친 표상이며, 그 경우의 '중국'과 '서양'은 어디에도 없는 장소이다. 그리고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통해 스스로의 문화를 비판하는 일은, 자기동일성을 확립하기 위해 가장 흔히 사용되는 수단이다." ("푸코와 일본", 107~108쪽)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흔히들 다른 나라의 문화나 현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우리의 기존의 사고틀에 맞추어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가하지만 원래 '인식'이란 것의 속성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문화의 비교를 통해 보고 싶은 것은 다른 나라의 문화나 현실이 아니라 거꾸로 그 안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과도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서구 철학이나 사상을 구부러뜨리고 일본의 문학을 종횡무진 오가며 일본의 근대, 동양의 근대에 대해 파헤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일본의 것, 일본의 사상을 옹호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오늘의 일본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드러내는 작업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히로키는 이 작업을 바로 오늘의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병'을 치유하고자 하는 흔적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일본만의 것이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바다 건너 우리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리라. 이것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희망'으로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이것이 이 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도 못하는 짤막한 글 "유머로서의 유물론"을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유머'란 '희망'의 또다른 이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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