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흐리다. 약간의 수사적 표현을 더한다면 잔뜩 찌푸린 하늘과 가늘게 윙윙거리는 바람이 스산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란 벼이삭들로 넘실거리던 집 주변 논마저 회색빛을 더하니 세상이 온통 휑한 느낌이다.
더 놓아두어 봐야 붉게 익기 힘든 풋고추를 따 쪄서 말릴 준비를 한다. 언제든 수확 가능할 정도로 자란 양배추와 브로콜리도 몇 포기 수확했다. 무도 조금 뽑아 무말랭이 만들 준비를 한다. 내일부터는 또 며칠 화창한 날씨일 거라고 하니...
이런저런 정리를 한 뒤 오후 늦게 산책길을 나섰다. 집에서 야트막한 언덕길 하나 넘으면 닿는 이웃 마을까지. 왕복 한 시간 삼십 분 정도 거리다. 한적한 오솔길 느낌이 나는 시멘트 포장길을 끼고 있어 옆지기, 강아지와 함께 가벼운 운동 삼아 자주 다니는 곳이다.
칠게 무리가 장악한 갯벌을 지나 이십여 분 걸으면 야트막한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한적한 오솔길이 나온다. 봄이면 고사리, 취나물을 뜯느라 자주 다니는 곳이다.
길가에 핀 구절초, 쑥부쟁이, 벌개미취 같은 늦은 들국화 무리들을 감상하며 걷고 있는데 경사진 절개지 위에 붉게 핀 꽃이 눈에 들어온다. 진달래다. 순간 제일 먼저 날짜를 연상하게 된다. 오늘이, 11월의 첫날이다. 당혹스럽다. 철 모르고 핀 개나리는 많이 봤는데 늦가을에 핀 진달래를 막상 눈 앞에서 보기는 처음이다. 하늘은 찌푸리고 바람은 윙윙거리는 스산한 날에 피어난 진달래가 애달프다.
저 하나 일찍 피어 무얼 말하고 싶었을까? 한 발자국 더 내디디면 붉게 익은 청미래덩굴 열매가 탐스럽고 유자는 노랗게 물들어가고 호박은 붉게 익어간다. 세상은 여전하고 가을은 깊어만 간다.
을씨년스러운 11월의 첫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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