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혀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 온다
아이야 박주산채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추사와 함께 근세 한국의 글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추앙 받는 석봉 한호가 쓴 시조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다. 여기서 솔불은 관솔불을 일컫는다. 관솔이란 송진이 많이 엉겨 붙은 소나무의 가지나 옹이를 말하는데 옹이 부분에 자연스럽게 생길 수도 있고 가지가 꺾인 상처 부위에 생길 수도 있다. 이 관솔은 불을 쉽게 붙일 수 있기에 화덕이나 난로에 장작불을 피울 때 불쏘시개 용도로도 쓰이고 여름 밤 개울가에서 천렵을 즐길 때 길잡이불 역할도 하곤 한다. 아주 옛날에는 군사용 횃불로 쓰인 기록도 있다 하니 관솔의 화력은 꽤나 괜찮았음을 알 수 있다.
나에게 소나무는 관솔불에 얽힌 추억보다는 소나무 가지를 잘라 껍질을 벗기고 핥아 먹던 달콤한 송진에 대한 기억이 대부분이다. 봄철 춘궁기에 접어들면 시골 아이들은 늘 배고프기 마련이다. 보리밥이라도 실컷 먹던 겨울철과는 달리 봄이 깊어지면 점점 더 밥이 아니라 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가 늘어나게 된다. 각종 봄나물과 죽순, 논고둥 등을 넣은 범벅이 자주 상에 오르게 되는 것. 지금이야 그때 먹던 범벅을 일컬어 건강음식이니 웰빙음식이니 하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한 끼 끼니를 메꾸는 음식이었다. 보리밥도 먹고 돌아서면 배고픈 시절인데 아무리 배부르게 먹은 범벅인들 얼마나 오래 가랴. 그래서 아이들은 이른 봄까지는 칡을 캐러 다니고 봄이 깊어지면 소나무 가지의 송진이나 찔레순을 꺾어 먹으면서 허기를 달래게 된다. 아마도 먹어서 배가 부른다기보다는 하나의 놀이 수단이었으리라. 먹을 것은 물론이고 놀 것도 변변찮던 시절이었으니...
▲ 유주산 산책길에서 만나는 소나무. 위에서부터 적송, 해송, 리기다소나무
나름의 추억이 있건 없건 소나무는 오래 전부터 우리네 일상 속에서 늘상 마추치며 함께 살아온 나무다. 소나무는 소와 나무의 합성어인데 보통은 적송(赤松)이라 부르는 소나무의 한 종류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소나무 품종의 구분 없이 모든 소나무 종류를 통틀어 지칭하기도 한다. 이때 솔은 흔히 오해하듯 한자어 '송(松)'이 우리말 '솔'로 변한 게 아니라 하늘 높이 힘차게 치솟는 소나무의 수형에서 유추한 '솟다'의 의미로부터 솟, 솓, 솥, 솔로 변화한 게 아닐까 추론하는 게 일반적이다(김종원, <한국식물생태보감>, pp 547~549). 이것 말고도 두세 가지 설이 더 있는데 고려시대부터 소를 묶어 두던 나무라는 의미에서 소를나무, 솔나무, 소나무로 불렸다는 설과 우리말 '으뜸'을 뜻하는 '수리'라는 말이 변형된 '솔'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그것이다. 그런데 '으뜸'을 뜻하는 우리말 '수리'에서 변형되었다는 설은 조금 문제가 있어 보인다. '수리(首吏)'는 순 우리말이 아니라 지방 관아의 아전 중에서 이방을 달리 이르던 말이다. 아전 중에 으뜸이라는 뜻인 것. 이 외에 으뜸을 뜻하거나 그 비슷한 의미를 가진 우리말 수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니 이 설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 육송.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소나무로 줄기가 붉은 색을 띄기에 적송(赤松)이라고도 불린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소나무는 우리나라 농촌지역 산지의 대부분에서 우점종의 지위를 차지했었다. 내 어릴 때만 하더라도 동네 주변의 산에는 소나무가 주류를 이루고 굴참나무나 졸참나무 같은 참나무 종류는 아주 큰 나무가 아니고서는 흔하게 보기 힘들었다. 음식을 하는 아궁이에 들어갈 땔감이 무엇보다 절실했던 시절이었기에 이미 크게 자란 나무들을 제외한 잡목 활엽수들은 온전히 자랄 새도 없이 베어져 아궁이 속으로 사라졌다. 그 덕분에 일생 동안 양지에서 살아가야 하는 호광성인 소나무 군락지가 넓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
그런데 1980년대 이후 농촌지역에서도 부엌 개량 사업이 지속적으로 전개되면서 땔감으로 쓰일 나무를 벨 일이 줄어들었다. 이렇게 되자 잡목 활엽수들이 점점 울창하게 자라게 되는 천이가 진행되면서 소나무는 그늘진 숲속에서 하나둘씩 도태되어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다. 인간이 정착생활을 선택한 농경사회의 시작과 함께 번영을 누려 온 소나무의 전성기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소나무는 인간의 개입이 없으면 스스로는 활엽수들과의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나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당장 소나무가 사라진다거나 조만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건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우리 산야에서 우점종의 지위를 유지하던 옛 영화를 되찾기는 어려울 거란 이야기다.
▲ 해송. 해안가 절벽지에서 자생하거나 사구의 방품림으로 조성되는 소나무. 표피가 거무칙칙한 탓에 흑송(黑松)으로도 불린다.
휴일,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유주산 산책길. 점점 더 영역을 넓혀 가는 잡목 활엽수들 사이로 소나무들이 힘겹게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있다. 식생 발달 과정에서 천이가 진행됨에 따라 소나무 종류들은 낙엽 활엽수와의 싸움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최근에는 솔잎혹파리나 소나무재선충이라는 치명적 병충해까지 발병하는 마당이니 소나무의 삶은 더없이 고달픈 셈이다.
표피가 붉은 빛깔을 띄는 적송들을 쳐다보며 산행길을 시작했는데 능선길을 따라가는 어느 지점에서부턴가 적송은 보이지 않고 해송들이 세찬 바닷바람을 맞으면서도 올곧게 자라고 있다. 적송을 보다 해송을 보면 확실히 억세고 거칠다는 느낌을 받는다. 표피 색깔부터가 거무칙칙한 흑빛이다. 가지도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적송과는 달리 태풍에도 견딜 것 같은 강인함을 풍긴다.
▲ 리기다소나무. 리기다(rigida)는 유연하지 않은, 딱딱하고 튼튼한 재질을 뜻한다. 그래서 강송(剛松)으로 불린다
이런저런 생김새의 소나무를 쳐다보며 도달한 정상. 탁 트인 남해 바다를 조망한 뒤 되돌아오는 길. 등산로에 깔린 낙엽들을 밟으며 내려오다 올라갈 때는 보지 못 했던 소나무를 발견했다. 아무 생각없이 지나간 길이었는데 유난히 샛노란 솔잎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 자세히 살펴 보니 솔잎이 세 가닥으로 나 있다. 리기다소나무다. 그렇다면 이 등산길 주변에는 적송, 해송, 리기다소나무가 모두 나름의 군락을 이루어 자란다는 말이다. 내가 아는 한 이 세 종류의 소나무가 같은 곳에서 한꺼번에 군락을 이루고 자라는 것은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다.
우리 주변의 산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소나무는 적송, 해송 그리고 리기다소나무다. 적송은 보통 육송(陸松)이라 불리는데 소나무의 대표 품종이다. 나무줄기가 붉은 빛을 띄는 까닭에 적송이라 불리는데 주변에서 가장 흔한 종류다. 해송(海松)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드럽다고 해서 여송(女松)이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해송은 적송에 비해 억세고 강하다는 말일텐데, 실제로 남부 해안가 암벽지나 바위 틈에서 자생하거나 사구의 방품림으로 조성되는 경우가 많다. 해안가가 아닌 내륙 산간지역에서도 심심지 않게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인간이 인공적으로 조림했다는 걸 뜻한다고 보면 된다. 해송은 적송에 비해 남성적이고 우직하다고 해서 '곰솔'이라 불리고, 수피가 적송과 달리 거무칙칙하다고 해서 '흑송(黑松)'이라고도 불린다. 일반적으로 내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가 '솔'이라면 해안가 거친 환경에서 자라는 것이 '곰솔'인 것이다.
▲ 육송, 해송, 리기다소나무의 잎 비교. 해송은 육송에 비해 잎이 길고 두껍다. 리기다소나무는 솔잎이 3가닥으로 나온다.
육송, 해송과 구별되는 리기다소나무의 가장 큰 특징은 솔잎 세 개가 모여 난다는 것이다. 육송과 해송은 잎이 두 개인 건 같지만 해송이 훨씬 크고 두껍다. 해송의 잎이 남성의 억센 손가락 같다면 육송은 그야말로 여성의 가녀린 손가락 같다. 리기다소나무는 흔히들 일본이 원산지인 것처럼 오해하곤 하는데 사실은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 인근 지역이 원산지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경에 들어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대규모로 조림사업이 진행된 건 1970년대라고 한다(김종원, <한국식물생태보감>, p 551. 또 다른 자료에서는 1907년 경에 처음 들어왔다고도 한다). 오래 전부터 이 땅에서 자라 온 육송이나 해송에 비해 외래종인 리기다소나무가 문제되는 건 리기다소나무 조림지역은 숲의 종 조성이 매우 빈약하게 발달한다고 한다.
리기다소나무는 소나무 종류 중에서 송진이 아주 많은 종인데 상처 부위로 방출되는 송진도 많을 뿐더러 잎에도 송진이 많이 함유된 까닭에 그 만큼 부식되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그렇지 않아도 소나무 종류는 피톤치드 같은 물질로 인해 상호대립억제작용(allelopathy)이 심한 식물인지라 주변에 다른 식물이 잘 자라지 못 하는데 주변 토양마저 영양분이 빈약하고 척박하게 되니 숲 조성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 하는 것이다. 세 종류의 소나무 사진에서 보듯 리기다소나무는 가지 발달도 육송이나 해송에 비해 빈약하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기에 새나 야생동물의 서식처로도 적합하지 않다. 조류나 동물의 배설물이 숲 조성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볼 때 리기다소나무 조림지역은 모든 면에서 빈곤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셈. 생태학적 고려라고는 생각조차 없었던 1970년대식 녹화사업의 폐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덕분에 한 지역에서 세 종류의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행운을 만나게 된 것이긴 하지만.
사람의 눈은 언제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 봄철, 산나물 채취하느라 숱하게 드나들었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지 않던 소나무들이 낙엽 쌓이는 겨울의 초입에 들어와서야 서로 다른 종류의 나무들이었음을 깨닫게 되니 말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리가 아님을 새삼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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