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곡우(穀雨)다. 전해지는 속담에 비추어 보면 별로 좋지 않지만 전국적으로 비가 오고 있다. 농사에서 24절기라는 게 다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지만 곡우는 1년 농사의 풍흉을 짐작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곡우와 관련된 속담도 제법 많은 편이다. "곡우에 비가 오면 농사에 좋지 않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 자가 마른다." 같은 농사와 관련된 것뿐 아니라 "곡우가 넘어야 조기가 운다." 같은 어로 관련 속담도 있다. 그만큼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절기의 하나란 말이리라.
옛날에는 곡우가 되면 가장 먼저 볍씨를 물에 담궜다. 요즘에는 거의 대부분 규격화된 모판에 볍씨를 넣어 이앙기를 이용하여 모를 심지만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못자리를 만들고 이틀 정도 항아리에서 따뜻한 물에 침지한 볍씨를 뿌렸다. 이 못자리에서 4~50일 정도 기른 모를 쪄 무논에 일일이 못줄을 대 가며 사람 손으로 모를 심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어른들이 일하는 틈바구니에서 어린 나도 새참에 쓸 막걸리를 사러 커다란 주전자를 들고 술도가가 있는 면소재지까지 왕복 10리 길을 오가곤 했다. 하지만 이런 모내기 정경은 이제는 극소수의 천수답이나 유기농을 하는 몇몇 농가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어 가고 있다.
내 유년의 추억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곡우도 우리 생활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못자리, 못줄, 모내기, 모를 찐다 같은 단어의 사용은 일상생활에서 점점 추방당하고 있고 하우스가 보편화되면서 곡우를 전후한 씨앗 파종도 점점 더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그나마 녹차의 유행으로 우전차라는 단어의 사용은 전보다 빈번하게 쓰이는 거 같다. 이때의 우전이 곡우전이라는 의미를 알고 쓰든 모르고 쓰든.
속담에서는 '곡우에 비가 오면 농사에 좋지 않다'고 하기도 하고 '곡우에 비가 오면 풍년 든다'고도 하는 등 상반된 견해가 전해진다. 어떤 형태로든 나름의 의미가 입혀진 속담일 텐데 아마도 발화자의 기원이나 희망의 다름이 이런 차이를 가져온 것 같다.
제주도를 비롯한 남부 지방은 '고사리마'(고사리가 올라오는 시기에 지는 장마)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곡우를 전후하여 장마가 질 정도의 비가 잦은 경우가 많았던 듯하다. 올해 같은 경우 내가 사는 지역은 4월에 들어와 오늘까지 13일 동안 비가 내렸다. 이 정도면 보통의 6월 장마보다 더 잦은 비다. 그러니 이런 장마를 만날 경우 농사에 차질을 빚는 것 자명한 일. 이런 경우를 자주 접하게 되는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해서는 '곡우에 비가 오면 농사에 좋지 않다'란 속담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반대로 중부지방이나 북한 지역 같은 경우는 땅이 석 자나 마를 정도의 가뭄이 잦은 경우를 접하게 되니 비를 기원하게 되고 이 기원이 '곡우에 비가 오면 풍년 든다'는 속담을 만들어내게 되었으리라. 이렇듯 속담이나 속설은 많은 경우 발화자의 기원과 바램이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 같다.
곡우날 아침, 텃밭은 이틀 동안 내린 비에 흠뻑 젖어 있다. 옮겨 심은 지 3주차인 양배추나 브로콜리, 케일이 힘겹게 버티고 있다. 잎벌레 피해는 없이 지나갔는데 어떤 포기는 벌써 나방의 애벌레에게 뜯긴 흔적도 있다. 자세히 살펴 보니 조그마한 나방 애벌레가 부화하는 포기도 있고 다시 진딧물이 끼이기 시작하는 포기도 있다. 손으로 대충 훑어서 수습하고 만다. 몇 포기 정도야 언제든 적선할 수 있으니 다 먹지만 말기를 바랄 뿐이다. 비가 좀 잦아들어야 막걸리를 뿌리든 은행잎 효소액을 뿌리든 할텐데 쉬이 그칠 것 같지는 않다. 고사리, 고비, 취나물 삶아서 늘어놓은 게 몇 채반인데 언제 다 말리나.
곡우날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마음은 여러 가지로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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