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종속이론과 세계체제론> - 제국주의의 간판을 바꿨네!
자본의 힘으로 주변부 ‘종속적 발전’ 추구… 누구를 위한 자본주의 이식인가
‘선진국’의 자본이 ‘후진국’에 투자되면, 후진국의 경제는 발전할까 아니면 반대로 후퇴할까? 이 질문은 지금처럼 ‘후진국’이 선진국의 자본을 찾아 투자를 호소하고 다니는 요즘 시대엔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들린다. 더구나 한국처럼 빚을 내서 사업하는 나라에서라면, 이런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은 현실 경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선진국 투자의 이면에 감춰진 현실
하지만 이 질문에 진지하게 ‘인생을 걸었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 질문에 대한 부정적 대답이 진지하게 검토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하나의 국적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 하나의 이론을 공유하지도 않았기에 하나의 학파를 형성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종속이론’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었다. 이는 아마도 그들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나 문제설정이 갖는 강력한 공통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앞서서 나가니, 살고 싶은 자여 따르라”라는 슬로건 아래, 이른바 ‘선진국’ 자신들의 발전 경로가 후진국이 따라야 할 모델이라고 주장하던 이른바 ‘발전이론’에 대한 비판, 후진국에 대한 선진국의 투자가 후진국의 경제를 발전시킬 것이라면서 착취를 위한 자신들의 활동을 무슨 자선사업이라도 되는 양 주장하던 경제이론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선진국이란 이름 뒤편에서 제국주의를 보고, 투자라는 개념 안쪽에서 착취를 보며, 그것을 통해 선진-후진을 잇는 단선적인 경제발전의 끈을 끊어버린다. 따라서 그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부정적 비판일 뿐만 아니라 나름의 새로운 경로를 모색하자는 긍정적 제안이기도 했고, 제국주의 중심의 시야에 대비되는 제3세계적 시야의 독립선언이기도 했으며, 단일한 역사적 발전 개념에 대한 전복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것은 그 결과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경제와 발전,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20세기의 중요한 지적 유산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다.
(사진/종속적 발전은 사회적 불평등을 구조화한다. 귀금속을 고르는 부유층과 빈민가의 가족 모습은 브라질 경제의 양면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종속이론의 역사는 대략 세개의 문턱을 통과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첫째 문턱은, 선진국 중심의 발전모델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가령 대표적인 발전이론가였던 로스토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여러분은 땅바닥을 기고 있지만, 이왕 기는 거 열심히 기라. 기는 데 익숙해지면 점차 속도가 붙을 거고, 속도가 빨라지면, 저기 비행기 보이지? 비행기가 이륙하듯이 여러분도 땅바닥에서 둥실 떠올라 이륙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여러분은 우리 선진국의 대열에 함께 서서, 그동안 참고 참으며 부풀린 빵을 나누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로스토의 ‘이륙이론’이라고 부른다. 물론 여기서 몇몇 솔직한 단어들을 경제학 용어들로 바꾸면, 생각처럼 자존심 상하는 얘기로 들리진 않을 것이다. 여기서는 발전된(developed) 나라와 발전중인(developing) 나라, 그리고 혹시 있다면 아직 발전하지 않은 나라만이 있을 뿐이다.
종속이론의 문제설정을 가장 명확하게, 그리고 가장 먼저 이론적으로 제시한 사람은 라틴아메리카 경제학자 앙드레 군더 프랑크였다. 그는 발전된-발전될 나라만이 있다는 생각을 반박하면서, 제3세계에 대한 선진국, 아니 제국주의 나라들의 투자는 발전을 가져온 게 아니라 반대로 ‘저발전의 발전’만을 가져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저발전(underdevelopment)이란 아직 발전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발전할 어떤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고, 발전과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저발전의 발전이란 발전과는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쉽게 말해 땅바닥을 아무리 빨리 긴들, 혹은 자동차를 타고 아무리 빨리 달린들 그게 비행기처럼 ‘뜰 수는’ 없다는 것이다.
프랑크의 문제제기 이후 발전의 환상과 반대되는 여러 가지 상이한 양상들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적되었다. 가령 엠마뉴엘은, 선진국과 후진국간의 무역이란 부등가 교환이기 때문에, 무역과 거래가 늘면 늘수록 국제적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 ‘발전된-발전할’의 단선적인 경로에 대한 프랑크의 비판은 이후 여러 사람들에 의해 ‘중심부’인 선진국과 상이한 발전경로를 갖는 ‘주변부’라는 개념으로 이어졌다. 더불어 주변부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중심부에서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입증하려는 이론적이고 실증적인 노력들이 행해졌다. 가령 중심부와 달리 주변부 사회에서는 자본주의나 근대화가 몇몇 국지적인 영역이나 ‘잘 나가는’ 영역에서만 진행되고, 그것을 위해 빈민들이나 농민들처럼 근대화의 그늘에 가려진 영역을 착취하면서 진행되기 때문에, 계급적 분화도 자본가와 노동자계급으로 분해되는 과정을 겪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도시빈민과 같은 소부르주아층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변부 사회에서는 산업 노동자계급 못지 않게 도시빈민 등과 같은 ‘주변적’ 계급들이 변혁운동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에 선다고 한다. 여기서 보듯이 이제 중심부와 주변부라는 개념은 국제적인 차원은 물론, 주변부 사회 내부에서 경제적 파행성을 표시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주변부가 아무리 잘 나가도 한계는 분명
(사진/사미르 아민(이집트 경제학자(위)), 카르도수(현 브라질 대통령))
둘째 문턱은 ‘종속적 발전’이라는, 앞서의 맥락에서 보면 기묘한 개념으로 표시된다. 지금은 브라질에서 대통령을 하고 있는 카르도수가 이런 논리를 펴던 사람이다. 그것은 ‘저발전의 발전’이라는 말로 포괄하기 힘든 사례 때문에 생겨났다. 즉 브라질이나 한국, 대만, 싱가포르처럼 당시 ‘용났다’ 소리 들으면서 잘 나가던 나라들의 경제적 발전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나라들은 모두 자본과 시장에서 대외의존적인 경제구조를 갖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종속이나 주변부라는 상황이 모든 경제발전을 원천봉쇄하며 오직 저발전만을 발전시킨다는 주장과 달리, 종속적인 상황에서도 일정한 발전이 가능한 게 아닌가? 반면 ‘한번 주변이면 영원히 주변’이라면 거기서 빠져나갈 전략도 꿈꿀 수 없다는 말인가?
이러한 반론을 통해서 ‘종속적 발전’이라는 개념이 나타나고, 그런 나라를 중심부나 주변부와 구별하기 위해 ‘반주변부’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이제 종속이론은 새로운 논쟁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끼치는 경제적 영향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면서, 좌파 이론의 중요한 논제를 형성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제국주의와 자본수출의 효과에 관한 것이다. 일찍이 레닌은 제국주의의 특징으로 ‘자본수출’을 들면서, 이전의 자본주의와 달리 제국주의는 상품수출이 아니라 자본수출로 식민지를 착취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자본수출은 자본관계의 수출이다. 수출된 자본은 공장을 만들고 노동자들을 고용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당연히 식민지에 자본주의를 이식하고 ‘발전’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착취를 위한 것이기에, 당연히 식민지에서 생산된 잉여가치를 제국주의 본국으로 이전시킨다. 여기서 앞의 입론을 강조하는 논리는 제국주의나 중심부 자본주의가 식민지 내지 주변부의 자본주의를 발전시킨다고 하는 주장으로 이어진다면, 후자를 강조하는 논리는 저발전과 종속을 강조하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사실 이러한 논란과 난점은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 혹은 발전과 종속 사이에 ‘반주변부’나 ‘종속적 발전’과 같은 어떤 ‘중간’을 끼워넣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런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발전법칙의 차이라는 질적이고 근본적인 차이가 대립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변부에서 나타나는 발전의 불균등함을 개념화하기 위해, 가령 사미르 아민 같은 사람은 자본의 축적이란 세계적 규모에서 진행된다고 보고, 그러한 불균등함이란 특정 지역과 연관된 축적 전략의 차이로 설명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로써 드러난 것은 발전이란 개념과 마찬가지로 ‘종속’이라는 개념 역시 종속적인 나라들 사이에 결코 단일하거나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 새로이 부각되었다.
셋째 문턱은 종속이론과 세계체제론이 연결되는 곳에 있다. 사실 종속이론은 명시적으로 개념화하지는 않았지만, 중심부 나라와 주변부 나라의 관계를 전제로 시작하기 때문에, 이론 자체가 국제적인 스케일로 펼쳐진다. 그렇지만 주된 관심은 주변부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런 스케일에서 중심부 자본주의를 보면 어떨까? 중심부 자본주의의 발전, 혹은 제국주의의 발전이란 식민지나 주변부에 대한 착취를 통해서 가능해진 것이 아닌가? 요컨대 이른바 선진국의 ‘선진됨’(developed)이란 주변부의 착취, ‘후진됨’을 전제조건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것이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자본주의란 본래 일국적인 게 아니라 세계체제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70년대에도 있었다.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을 쓴 페르낭 브로델과 <세계체제론>을 쓴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그렇다. 그래서 이들의 이론은 흔히 ‘세계체제론’이라고 불리는데, 이 지점에서 종속이론의 문제설정과 연결되게 되고, 그럼으로써 종속이론은 자본주의에 대한 거대한 이론과 더불어 새로운 ‘일반성’을 얻게 된다.
자본주의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시스템들
이러한 반복적인 일련의 논쟁과 이론에서 부닥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좀더 근본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즉 ‘주변부를 착취한다는 것’과 ‘주변부를 발전시킨다는 것’이 대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논쟁은 언제나 그 중 어느 하나를 지지하고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만약 <세계체제론>에서 주장하듯이 중심부의 발전과 ‘진보’가 주변부의 착취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면, 반대로 주변부에서의 착취는 주변부의 ‘발전’을, 다시 말해 주변부의 자본주의화 내지 근대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식민지 노동력을 자본주의적으로 착취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노동, 자본주의적 규율, 자본주의적 사고, 자본주의적 생활을 만들어내야 했다는 것이다. 가령 일본 총독부가 학교를 세우고, 애들을 학교 보내라고 종용하고 다닌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러한 근대화 내지 자본주의 발전을, 역사 발전이요 역사적 진보며, 따라서 ‘좋은 것’이라고 간주하는 평가방식은 아닐까?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자본주의가 왜 좋은지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겐 문제가 차라리 쉬워 보이는 것일까?
이진경/ 성공회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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