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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3. <모더니즘> - 상식을 거부하는 다른 느낌!

by 내오랜꿈 2009.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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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모더니즘> - 상식을 거부하는 다른 느낌!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예술·사상적 전위 형성… 당대에는 빛을 보지 못한 저주받은 존재


(사진/회화의 오래된 전통을 깬 피카소의 그림 <아비뇽의 처녀들>)

번역하면 ‘근대주의’ 내지 ‘현대주의’가 될 말인 모더니즘은 문학이나 예술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개념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을 떠올린다면, 그게 단순히 예술 영역에서 일어난 특정한 사조를 지칭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처럼 이 말 또한 모호한 외연을 갖는다. 그것은 근대(modern)라고 불리는 역사적인 경계와 관련된 것이다(그러나 이 모호함에 대해서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쓸 때 다시 언급할 것이다).


전통적 관행? 그런 건 없는 거야


모더니즘이란 말에 담길 것이 가장 먼저 출현한 곳은 회화였다. 통상 현대회화의 출발점으로 삼는 1906년은 피카소의 그림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그려진 때다. 아프리카 조각을 연상시키는 것을 아가씨의 얼굴로 그려놓고, 등에다 얼굴을 붙여놓은 이 그림은, 피카소라는 사람이 데생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낳았지만, 사실 그는 여러 방향에서 본 형태를 하나의 시점에서 볼 수 있게 만듦으로써, 하나의 시점에서는 오직 하나의 면, 한 가지 형태를 볼 수 있을 뿐이라는, 회화의 오래된 전통을 깬다. 투시법(회화에서는 ‘원근법’이라고 잘못 불리고 있지만)이라는, 사물을 보고 그리는 오래된 방법이 거기서 깨지고 만다. 이런 시도의 단서는 사실 고흐나 세잔 같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도 있었다. 고흐는 애시당초 사물의 정확한 묘사나 재현에는 관심이 없었고, 저기 불 같은 삼나무처럼 끓고 있는 자신의 열정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렸고, 세잔은 색채와 형태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 필요하다면 투시법도 위반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이들은 사물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방법인 투시법과 대결하겠다는 것을 명시하거나 목표로 한 바 없다. 그러나 피카소나 브라크, 혹은 마티스 등은 그것을 투시법에 대한 대결로 이해했으며, 그것을 더 밀고 나가 투시법이 깨진 공간 속에서 그림이 어떻게 그려져야 하는가를 고심했다. 그래서 종종 입체파 혁명은 세잔에 대한 피카소의 ‘오해’에서 비롯했다고 농반진반으로 얘기된다. 이후 회화는 사물의 정확한 재현이라는 오래된 강박에서 벗어나, ‘추상 충동’(예를 들면 입체파)이나 ‘감정이입 충동’(예를 들면 표현주의)에 따라, 색채와 형태의 구성물로 그려지게 된다. 이후 그림을 이해하는 건 그만두고, 그게 뭘 그린 건지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된다.


(사진/위에서부터 파블로 피카소, 프란츠 카프카, 제임스 조이스)

재현에 반하는 저항은 비슷한 시기에 문학에서도 나타난다. 의식이나 정신의 무질서하고 혼란된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즉각적으로 기록하고자 했던 제임스 조이스나 세심하게 재구성된 기억의 여행을 통해서 ‘잃어버린 시간’(지나간 시간)을 되찾고자 했던 마르셀 프루스트, 혹은 서로 인접하여 있는 사무실들로 둘러친 둘레를 갖는, 그래서인지 접근하고자 해도 접근할 수 없는 중앙을 갖는 법과 관료제가 지배하는 근대적 ‘성’을 묘파했던 프란츠 카프카 등이 그렇다.


사물 세계의 법칙적 질서나 그 속에 존재하는 주인공인 ‘나’들의 삶을 재현하려고 했던 근대적 서사는 이들과 더불어 근본적인 동요를 경험하게 된다. 재현적인 내러티브를 조직하던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과 잘 정돈된 공간의 질서는 깨지고, 주제도 줄거리도 사라진다. 그 대신 사물의 표면을 스치며 지나가버리는, 붙잡을 수 없는 현재나, 그 현재를 따라 우리로부터 아스라이 멀어져 가버린 과거가, 때론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는 기억의 선을 따라, 때론 미래를 현재로 이끄는 욕망의 선을 따라 되살아난다. “되찾은 시간” 혹은 위반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코드(법조문! 규칙!)들로 짜여진 세계, 그래서 나를 위해 마련된 문 앞에서도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만을 서성대는 ‘나’의 우화적인 삶이 표현적 힘을 갖고 되살아난다. 물론 그것을 이해하고 거기서 재미를 느끼며 감동을 얻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 되었지만.


음악에서 모더니즘은 약간 다르다. 왜냐하면 음악은 근대음악의 경우에도 어떤 것을 단순히 재현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서양의 근대음악은 ‘조성’이라고 부르는 형식에 바탕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그너를 필두로 하여, 드뷔시나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 등에 이르면 조성 전체가 깨지고, 나아가 ‘박자’라는 시간적 형식도 깨진다. 이른바 무조음악이 시작된다. 쇤베르크는 무조음악을 더 한층 밀고 나가 ‘12음 기법’이라는 새로운 작곡법을 제시했는데, 이는 보통 ‘주제’(가령 베토벤 <운명> 교향곡의 ‘빠바바 밤’ 같은 것)라고 불리는, 재현과 관련된 최소한의 요소마저도 제거해버린다. 이후 ‘추상적 구조’를 추구하는 음악과 ‘표현적 능력’을 추구하는 음악이 현대음악의 커다란 두 방향을 이루게 된다. 이제는 음악도 듣기 힘든 것, 아니 때론 고통스런 것이 된다.


골치 아픈 재해석… 먼저 느낀 자들의 고통


이런 점에서 모더니즘은 한마디로 말해 “골치 아픈 것”이다. 그것은 알아보기 힘든 그림을 그리고, 알아듣기 힘든 곡을 만들며, 알아먹기 힘든 시나 소설을 쓴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전에 사람들은 무언가를 재현하는 것, 그래서 그걸 보거나 들으면 무언가를 떠올리는(표상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고, 따라서 보거나 듣고서도 어떤 것을 떠올리기 힘들면, 골치 아프고 어려운 것, 불편한 것으로 간주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반면 모더니즘은 어떤 모습을 표상하기(떠올리기)보다는 어떤 강렬함을 느끼게 하려고 한다. 혹은 단순한 하나의 형태를 떠올리기보다는 형태들이 뒤집히거나 뒤섞이는 복합적 양상을 느끼게 해주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은 골치 아프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작품을 보면서 무언가를 명확하게 떠올리려 하는 노력만 접어둔다면, 대신 그것을 통해 우리의 신체를 울리는 어떤 것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골치 아플 거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잘 ‘느끼는’ 사람과 못 느끼는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냐고? 그건 강렬도의 차이다. 표현된 무언가를 강렬하게 느꼈다면 그건 그 작품을 잘 알게 된 것이고, 그게 약했다면 아직도 잘 모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더니스트들은 상투적인 형태나 상식화된 스타일을 깨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들이 보기에 그런 실험정신이 없는 예술은 (모던) 예술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를 ‘아방 가르드’(전위)라고 부르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들은 시대를 앞서가며, 남들이 아직 느끼지 못한 것을 앞서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골치 아픔 내지 난해함이라는 문제는 바로 이런 사정에 연유하는 거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따라서 그건 시간이 좀 지나면 익숙해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때 그들은 생소하고 익숙지 않은 무언가를 또다시 앞서 느끼고 표현하려 하겠지만.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저주받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비난받고 외면당할 저주받은 운명. 물론 지금은 저주받은 존재가 아니라 위대한 예술가요 심오한 사상가로 존경받고 있지만. 더불어 대학의 중심에 자리잡고 앉아, 많은 대학교수들을 먹여 살리고 있지만.


근대의 정치는 ‘대의’(representation)라는 형식을 특징으로 갖는다. 이른바 국민의 이익을 대의하는 국회의원이나 그들로 구성되는 국회가 그렇고, 역시 국민을 대표하는 존재로서 뽑히는 대통령이 그렇고, 그가 지휘하는 정부가 그렇다. 비슷하게 근대의 예술은 ‘재현’(representation)을 특징으로 갖는다. 줄거리를 통해 사건을 재현하고, 그것을 통해 삶이나 세계의 법칙을 재현하는 소설이 그렇고,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려는 그림이 그렇다. 반면 모더니즘은 지금까지 본 것처럼 이러한 재현에 맞서 싸운다. 그것은 재현하려 하기보다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expression)하려 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려 하기보다는 무언가를 느끼게 하려고 한다. 혹 그것이 재현하려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재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더니즘은, 모던(근대적)이라는 말과 정 반대로 모던한 방법, 모던한 예술에 반대하며, 그것을 넘어서려 한다. 따라서 모더니즘은 ‘근대주의’로 번역될 수 없다. 그것은 대개 근대주의라기보다는 차라리 ‘반(反)근대주의’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세상사, 그래도 차이는 있다


이렇게 볼 때 모더니즘은 흔히 하는 비난처럼 퇴폐적인 데카당스가 아니라 전투적인 ‘전위’들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현실에 대한 직접적 비판을 하지 않는 경우에조차 이 현실의 커튼으로 가려진 것을 들추어내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전혀 다른 측면에서 보게 하려는 것이란 점에서 강렬한 비판이다. 물론 그들의 실험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이 새로이 찾아낸 것이 언제나 삶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어차피 세상사는 반복인지 모른다. 가령 화이트헤드는 플라톤 이래 서양의 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주석의 역사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주석’들이 그저 플라톤의 단순한 반복이었다면, 2000년을 계속해서 반복될 수 있었을까? 차이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그처럼 반복되지 못한다. 그러한 차이가 없다면 반복되는 세상사는 지루하고 견디기 힘든 것일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반복되는 세상사에 차이(difference)의 틈새를 만들고, 다른(different) 측면에서 보고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려는 것은 반복에 덤으로 추가되는 사소한 조건이 아니라, 반대로 반복되는 세상사를 유의미하게 만드는 결정적 조건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그렇다면 차이를 만드는 작업의 그런 가치를 찾아냈던 모더니즘을 ‘저주받은 운명을 자임하는 시대착오적 전위’라고 비난할 건 없지 않을까?


이진경/ 성공회대 강사


한겨레21 2000년 03월 30일 제3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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