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신분석학> - 욕망을 다스리는 무의식의 힘!
초월적 자아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 제공… 다양한 영역에서 사유의 폭 넓혀나가
이진경/성공회대 강사
(사진/마그리트의 <정신치료사>)
제2부를 시작하며
“새로운 희망을 찾는 기획”의 제2부는 20세기에, 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지적인 성과와 유산을 정리하고 점검함으로써, 21세기의 지적 흐름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전망하고자 한다.
어느 시기나 인간은 자신이 사는 시대를 중요한 변화가 응축돼 진행되는, 그런 만큼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20세기 역시 그 점에서 다르지 않다. 후기 인상주의와 입체파 등은 15세기 이래 서양인의 시각을 지배해 온, 그리고 과학적인 지각방식으로 당연시되어 온 ‘투시법’을 깨고, 새로운 시각예술의 세계를 창조했으며, 역시 그만큼의 세월을 지배하던 ‘조성’이라는 음악적 형식은 해체되었다. 20세기 초두에 나타난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갈릴레이와 뉴턴 이래 자연과학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 혁신의 끝자락에서 원자폭탄과 우주선이, 그리고 생물체에 대한 복제가 출현했다. 두번에 걸친 세계대전은 물론 일상화된 전쟁과 파괴, 파시즘, 본격적인 현안으로 대두한 생태적 환경의 위기 등등은, 급기야 인간 자신의 생존과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까지 인식되었다.
이러한 ‘격변’ 속에서 인간의 삶과 생존조건, 삶의 방식과 생산방식을 사유하고 연구하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어떤 새로운 문을 열었던가? 그것으로 인해 가능하게 된 새로운 삶의 영역은 무엇이며, 그것으로 인해 우리 사유의 경계선은 어떻게 변경되었던가? 이제 여기서 우리가 대략이나마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게 될 또 하나의 세기가 펼쳐지게 될 지반인 것이다. 편집자
‘의식’이란 우리가 알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내 이름은 무엇이고, 저 사람은 누구며,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이고, 저 기차는 부산으로 가는 기차다 등등. 그런데 만약 우리가 알고 있지만, 알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혹은 내가 행하고 있지만,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예수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지 않은가. “주여, 저들은 자신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저 여자를 좋아한다고? 내가 지금 이렇게 수다를 떨고 있는 게 저 여자를 꼬드기기 위한 것이라고? 내가 저 여자를 좋아하는 건 그 여자가 엄마와 닮았기 때문이라고? 사실 내가 바라는 것은 엄마와 함께 자는 것이라고? 내가 아버지와 사이가 나쁜 것도 다 그것 때문이라고?
이처럼 알고 있거나 행하고 있지만, 그런 줄 모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일러 ‘무의식’이라고 한다. 사실 내 자신에 대해 내가 이처럼 모르고 있는 것은 너무도 많다. 우리는 내 자신의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며, 내 머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모른다. 이런 사실은 우리도 잘 아는 것이고, 예전의 사람들도, 고대적인 세계를 살던 사람들도 잘 알고 있던 것이다. 스피노자도 무의식에 대해 말했고, 소포클레스도 그랬으며, 예수도 석가도 그랬다. 유식불교는 그런 무의식이 얼마나 여러 가지가 있는지를 열심히 설명해준다.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근본적 역설
그러나 무의식은 일종의 근본적 역설 안에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이기에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고, 이게 바로 네 욕망이고, 이게 바로 네가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어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알 수 없는 그 세계를 들여다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무의식에 대한 이론이나 사유는 크게 진전될 수 없었다. 다만 무의식에 관한 몇몇 개념만이 있을 뿐이었다. 20세기의 벽두에 프로이트가 개척한 정신분석학은 바로 이 점에서 남다른 면모를 갖고 있었다. 먼저 그는 무의식의 존재를, 그 세계에 접해보지 못한 사람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고 극적인 사례를 풍부하게 수집해 보여준다. 가령 신경증 환자들의 강박증적인 행동들은, 환자 자신으로서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는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밑바닥에, 환자 자신도 모르고 있는 어떤 상처나 사건, 경험이 묻혀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환자 자신의 경험이고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 역시, 아니 그의 몸이 알고 있는 것이지만, 알고 있음을 모르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그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사실은 어떤 일반적인 욕망이나 욕구에 기초하고 있음 또한 보여주었고, 그것을 통해 이해할 수 없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환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동들이 단지 환자라는 극단적인 사람들만이 아니라 정상적인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도 마찬가지로 항존함을 보여주었다. 꿈, 말의 실수, 농담 등이 그것이다. 이로써 그는 무의식이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잠재적 형태로 항존하면서 일상적인 모든 행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어떤 것임을 보여준 셈이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무의식이 작동하는 방식과 동력까지 일반화해서 보여준다. 무의식의 기저를 이루는 것은 일차적으로 흔히 ‘리비도’라고 부르는 성적인 충동 내지 욕망(‘이드’ 혹은 ‘거시기’)이며, 거기에 그것을 제어하고 통제하려는 힘(‘초자아’)과, 이 두 힘 사이에서 양자의 대립을 조정하는 ‘자아’가 추가된다. 세 가지 힘들의 역학관계가 사람들의 모든 행동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예술이나 진리를 추구하는 활동조차, 일차적으로는 성적 욕망이 이런 역관계 속에서 ‘승화’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가령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과 글, 심지어 세탁표까지 분석해서 그의 작품이 사실은 모두 성욕과 관련된 것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무의식에서도 일차적인 자리를 차지한 성적 충동은, 사람이 동물과 별로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보여주는 개념인 셈이다.
잠재된 형태로 일상에 커다란 영향력 행사
(사진/<프로이트>)
여기서 다시 출발하는 프로이트는 이제 사람들의 ‘인격’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모든 사람의 일차적인 본능의 자리를 차지한 성욕은 본질적으로 어머니와 하나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욕망이고, 따라서 허용될 수 없는 욕망이다. 아버지가 개입하고, 거세공포를 이용해 아이로 하여금 엄마와 자려는 욕망을 포기하게 한다. 이에 대한 반감에서 살부의 욕망이 무의식에 자리잡지만, 아이는 복종을 요구하는 규칙을 받아들이고, 불가능한 욕망을 포기하는 대신 아버지와 동일시하는 타협을 한다. 이 좌절된 욕망을, 그러나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잠재화된 이 욕망을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알다시피 테베의 왕인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인 왕비와 결혼한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러한 복종이 법이나 규칙에 대한 복종의 출발이며, 이로써 가족의 질서, 친족의 질서, 사회의 질서가 가능하게 된다. 문명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런 계기를 통해서다. 하지만 그 문명은 아버지에 대한 불만처럼 근원적으로 소멸되지 않은 불만을 담고 있다.
대부분 풍부한 임상사례로 가득 찬 그의 이러한 분석은 놀랄 만한 설득력을 갖는 것이었다. 그가 말한 내용은 처음 들었다면 누구라도 반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이론은 무의식에 대한 진정한 과학을 창안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융이나 아들러, 클라인, 라이히 등의 탁월한 정신분석학자는 나름의 새로운 방향으로 그의 이론을 밀고 갔지만, 누구도 무의식의 문제에서 프로이트가 이룬 업적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시간이 더 흐르면서 프로이트의 영향력은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을 넘어 문학이나 예술은 물론 인류학이나 신화학, 철학, 사회학 등으로 확장된다. 특히 프랑스의 사회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자크 라캉은 이러한 확장과 일반화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레비―스트로스는 거의 모든 종족의 혼인제도와 신화에 나타나는 근친상간 금기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대응시켰고, 그것을 통해 친족관계의 구조를 심층적인 차원에서 보여주려고 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구조언어학의 연구와 결합하여 프로이트의 이론을 철학적인 차원으로 확장하고 일반화했다.
프로이트이 선구적 연구로 철학적 차원 접근
(사진/푸코(왼쪽)와 들뢰즈)
레비―스트로스는 무의식이란 개념을 통해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던 데카르트의 명제를 비판한다. 즉 그것은 나라는 주체 내지 자아를 오로지 의식적인 존재로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있는 심층이 있으며, 그것에 의해 내가 행동하고 욕망한다면,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여기서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의식 내지 의식적 주체인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고, ‘생각하지 않는 곳’이란 의식이 생각하지 않는 곳이다. 그곳은 무의식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다. 결국 나라는 주체 내지 자아 안에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식이 알 수 없는 영역과 의식으로 그 주체(자아)가 분열돼 있다는 것을 뜻하며, 의식이나 생각이라는 특징으로 주체를 정의할 수 없음을 뜻한다. 주체란 개념은 불가능하다는, 현대 철학의 매우 중요한 명제가 바로 여기서 명확하게 이론적으로 자리잡게 된다.
반복이지만, 프로이트는 모든 욕망을 성욕으로, 오이디푸스적인 욕망으로 정의했고, 다른 욕망이나 활동, 심지어 성욕과 무관한 창조활동이나 성욕에 반하는 욕망조차 이런 성욕이 승화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가족이나 친족관계, 결혼과 관련된 관계에서 사람들의 행동은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거기를 벗어난 활동을 그걸로 설명하는 데는 무리와 억지가 따른다. 혹은 모든 작품이나 활동, 태도나 증상에서 성욕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발견할 수 있다는 프로이트의 신념에 따르면, 어떤 분석도 결론은 정해져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세상사가 그렇게 단순하고 명료하리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다.
모든 욕망이 성욕이며, 엄마―아빠―나라는 오이디푸스 삼각형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는 명제일 뿐이다. 철학자 질 들뢰즈와 함께 쓴 책에서 정신분석가 가타리는 정신분석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욕망이란 어떤 활동을 생산하려는 의지이고, 따라서 성욕 이전에 생산적인 힘 그 자체와 결부돼 있다. 욕망이란 항상―이미 사회적으로 투여되는 것이란 점에서 사회적 욕망이고, 다양한 방향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이란 점에서 분열적이다. 그것이 오이디푸스 삼각형 안에 갇히는 것, 가족적 영역에 갇히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미셸 푸코는 환자의 고백을 요구하고 그것을 들어주며 그것을 통해 감춰진 오이디푸스적인 (악한!) 욕망을 찾아주는 정신분석가의 구실이, 17세기 이래 강화된 고해제도 아래서 신자들의 성생활에 대한 고백(고해)을 요구하면서 그들의 악한 욕망을 드러내고 성적인 욕망을 통제하려고 했던 사제들의 구실과 동일하다고 비판한다. 그런 점에서 정신분석가란 근대의 사제라는 것이다.
이제는 정신분석학으로 사회적 욕망 해석한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은 여전히 수많은 영역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것은 무의식과 욕망에 관한 사유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무의식에 대해 말하려는 한 피할 수 없는 통과점이 된 것이다. 물론 거기를 어떤 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통과할 것인가는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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