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구조언어학> - 기호의 약속, 말이 통하네!
사회적 관계를 맺어주는 언어의 과학… 다양한 말글살이는 구조 밖에 존재
‘구조’라는 말은 약간이라도 심각한 말을 하거나 글을 읽을 때면 쉽사리 부닥치는 단어다. ‘사회구조’ ‘정신구조’ ‘경제구조’ ‘심리구조’ 등등. 그래서 매우 익숙한 말이지만, 사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물으면 대답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언어에 대해서도 이런 말은 사용된다. ‘언어구조’. 구조언어학이란 쉽게 말하면 이 ‘언어구조’를 연구하는 언어학을 말한다. 확실히 구조언어학은 언어구조를 연구하는 중요한 방법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그저 그뿐이라면 그런 언어학이 ‘구조주의’라고 불리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언어에 대한 연구였지만, 언어의 영역을 넘어서 사용할 수 있는 아주 새로운(당시에는 ‘과학적인’이라는 말이 선호되었다) 사고방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만일 개를 개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구조언어학의 탄생지점에 있는 사람으로 흔히 꼽히는 사람은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와 프라하 학파의 야콥슨과 트루베츠코이 등이다. 1915년, 바이이와 세쉬에는 제네바대학에서 행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의 노트들을 정리해서 <일반언어학 강의>라는 제목의 책을 펴낸다. 강의를 직접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편집해서 후일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어쨌든 이 책은 이후 구조언어학의 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구조주의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다른 한편 구조언어학의 직접적 창시자인 야콥슨과 트루베츠코는, 한때 문학작품이 다루는 내용보다는 문체나 언어적 표현 등에 주목했던, ‘러시아 형식주의’에 속했던 러시아인이다. 체코슬로바키아로 이주한 그들은 다른 체코슬로바키아 언어학자들과 함께 프라하 언어학회를 결성하는데, 이들이 후일 ‘프라하 학파’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 학파가 구조언어학의 본산지가 된다.
(사진/구조언어학 태동의 산파 구실을 한 페드디낭드 소쉬르)
구조언어학이 새로이 제시한 것은 무엇인가? 먼저 그것은 언어학의 대상을 하나하나의 기호나 개별적인 문장이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적 규칙, 사회적 약속으로 정의한다. 언어는 모두 사회적인 약속이요 규칙이다. 내가, 가령 지나는 행인만 보아도 마치 도둑인 양 몰며 시끄럽게 짖어대는 저 피곤한 동물을 개라고 부르기 싫다고 다르게 부른다면, 부르는 건 자유지만 남들이 그걸 알아들을 순 없을 것이다. “나는 그대를 사랑해”라는 말이 너무 상투적이어서 싫다고 가령 “니구 고투하 란살까”라고 말한다면, 아무도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불만스러워도 남들이 알아듣게 하려면 문법이라는 사회적 약속과 규칙에 따라야 한다. 그래서 소쉬르는 언어란 사회적 규칙이라고 했고, 이 사회적 규칙으로서 언어를 ‘랑그’라고 불렀다.
그런데 특정한 대상에 대해 어떤 기호를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자의적이다. 우리는 저 동물을 ‘개’라고 부르지만, 굳이 그렇게 부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그걸 “쭈꾸”라고 부르기로 약속했다면, 우리는 그 동물을 ‘쭈꾸’라고 부르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걸 소쉬르는 ‘기호의 자의성’이라고 부른다.
한편 기호는 이미 존재하는 다른 기호들과 관계 속에서 사용되고,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 다시 말해 어떤 기호의 의미는 다른 기호와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관련된 기호들이 달라지면 의미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영어의 ‘머튼(mutton)’은 불어 ‘무통(mouton)’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불어 무통은 살아 있건 죽었건 모든 양을 가리키지만, 영어에서는 그 말이 들어오기 전에 양(sheep)이란 말이 있었기에, 무통은 죽은 양, 즉 양고기를 가리키는 데만 사용되었다. 새로운 기호가 이미 사용되고 있던 기호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의미’를(소쉬르는 이를 기호의 ‘가치’라고 불렀다) 갖게 된 것이다. 이는 기호의 의미를 다른 기호와의 관계에서 보아야 한다는 중요한 사고방법으로 이어졌다.
이런 생각은 ‘음소’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음소란 언어적인 소리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데, 발음기호로 표시하는 b와 v, a와 e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령 vavo라고 하든 babo라고 하든 우리는 모두 ‘바보’라고 알아듣는다. 왜냐하면 우리 말에서는 b와 v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비슷한 소린데도 우리는 ㅃ과 ㅍ을 구별하지만, 영국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 두 소리가 영어에서는 구별되는 특질을(‘변별자질’이라고 한다) 갖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별자질은 다른 소리와 관계 속에서 대립되는 특질을 가질 때 나타난다. 즉 다른 소리(ㅂ)와 대립적인 관계 속에서만 우리는 ㅃ을 알아듣고 사용한다.
이런 생각은 나중에 구조주의의 중요한 사고방법으로 이어진다. 그에 따르면 어떤 것도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가 결정된다(달라진다). 예를 들어 흑인은 백인들과의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노예가 된다. 관계가 달라지면 그들의 의미는 달라진다. 어떤 문장들의 의미는 다른 어떤 문장들에 끼어들어가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이처럼 어떤 것도 그것을 둘러싼 관계 속에서 그 의미가 결정된다는 식의 생각을 ‘관계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관계가 의미를 규정…규칙적 언어 배열
(사진/구조언어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이바지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구조언어학은 작은 영역에서는 이런 새로운 방법으로 음소나 기호의 이론을 펼쳤다면, 더불어 언어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 그것은 마치 데카르트 평면의 x축과 y축처럼 단어들의 배열이 이루어지는 두 축을 찾아낸 것이다. 가로축은 예컨대 “나는 그 여자를 죽도록 사랑했다”처럼 단어들이 서로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되고 결합되는 축이다. 이를 결합축(결합체)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여기서 ‘나’라는 말은 ‘너’나 ‘그’, ‘개’, ‘갈릴레이’ 등과 같은 다른 말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 여자’도 마찬가지다. ‘사랑했다’ 역시 ‘미워했다’ ‘슬퍼했다’ ‘먹었다’ 등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이처럼 가로축의 각 자리에 있는 단어들은 다른 단어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단어들의 계열을 갖는다. 이는 보다시피 세로축을 그리면서 가로축과 교차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 축을 계열축(계열체)라고 부른다.
그런데 가로축의 말들은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어서 ‘그 여자를’이란 말을 생략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다. 이처럼 가로축에서 단어들은 긴밀한 연관성(이를 인접성이라고 부른다)을 갖고 결합된다. 반면 ‘그 여자’와,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그 개’나 ‘저 빵’은 유사성을 갖고 있다. 즉 세로축에서는 유사성 연관에 따라 단어들이 다른 단어로 대체된다. 야콥슨은 인접성 연관에 따른 단어들의 결합을 ‘환유’라고 불렀고, 유사성 연관에 따른 단어들의 대체를 ‘은유’라고 불렀다. 이는 언어학이 시학 내지 수사학으로 나아가는 문턱을 형성하는 개념이 되었다.
이러한 사고방법은 이후 구조주의에서 구조라는 개념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또 하나의 재료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 망명했던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는 거기서 야콥슨과 만났고, 그에게서 구조언어학을 배웠으며, 그것을 인류학 내지 인문과학에 이용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수학이 거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구실을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구조언어학의 방법이 사변을 통해 진행되는 다른 철학이나 실증주의적 방법과 달리 과학적이라고 확신했다.
“단어의 의미는 사용법에서 나온다”
구조언어학은 언어를 기호(기표)들의 집합체로만 다룬다. 그것이 구조언어학의 고유성이고 ‘장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 그렇듯이 결함과 ‘단점’이 나타나는 곳은 바로 그 장점이 뻗어나간 곳이다. 일단 그에 따르면 우리는 언어를 배우는 것이 불가능하다. 단어의 의미를 배우려면 관련된(사실 무한히 많은) 다른 단어들을 이미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구조언어학자들은 사회적 약속에 대해 강조하면서 개별적인 발화가 갖는 특성은 언어학에서 제외해버렸다. 그러나 예컨대 우리는 ‘오늘밤’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전혀 다른 수많은 의미를 만들어 전할 수 있다. 어조를 바꾸고, 말투를 바꾸고, 음고를 바꾸면 전혀 다른 기호가 된다. 이는 다른 기호들을 수반하지 않으며, 다만 발화 방식을 바꿈으로써 진행된다. 사실 “시원하다”라는 하나의 단어도 얼마나 다르게 사용될 수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김치찌개를 먹을 때, 사우나에서 나올 때, 화채를 먹을 때 등등. 이런 점에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의 사용법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더욱더 설득력이 있다고 보인다. 같은 단어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면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다. ‘강아지’와 ‘개새끼’의 차이는 기호들의 상호관계보다는 차라리 언제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는 구조언어학으로선 다루지 않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의 삶은 이런 식의 용법에 더 익숙하고 가까운데, 과학이 된다는 것은 이 세계로부터 이토록 멀어져야 하는 것일까? 우리에겐 소중한 많은 것들을 이렇게 버려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꼭 그러면서까지 과학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진경/ 성공회대 강사
'스크랩 > 인문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4. <포스트모더니즘> - 이성의 지배는 정당한가 (0) | 2009.11.01 |
---|---|
3. <모더니즘> - 상식을 거부하는 다른 느낌! (0) | 2009.11.01 |
1. <정신분석학> - 욕망을 다스리는 무의식의 힘! (0) | 2009.11.01 |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 - “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 (0) | 2009.07.13 |
파시즘X의 탄생 (0) | 2009.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