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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문화예술

에릭 로메르의 세 가지 매력

by 내오랜꿈 2007.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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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로메르의 세 가지 매력 

[문화+프리즘] <보름달이 뜨는 밤>, <가을 이야기>, < O 후작 부인>

출처 : <컬쳐뉴스> 2007-10-24 
정이창 / 문화비평가


▲ 에릭 로메르의 영화 세편. 왼쪽에서부터 <보름달이 뜨는 밤>, <가을 이야기>, < O 후작부인>


에펠탑, 바캉스, 포도밭, 철학적 수다. 프랑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에릭 로메르의 영화도. 올해로 여든일곱이 된, 이제는 노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이 노년의 감독은 이미 오래전에 경력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누벨바그 동료들과 달리 여전히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젊은 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 아마도 작은 영화들(영화의 규모나 미학이나 태도에 있어서)을 꾸준히 만들면서 영화적 체력과 도전정신을 소모하지 않고 비축해온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을 분위기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보름달이 뜨는 밤> - 남녀관계의 어긋남에 대하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에릭 로메르의 회고전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확인한 사항은 <보름달이 뜨는 밤>의 상영 여부였다. 오래전 프랑스문화원에서 정기적으로 영화를 상영하던 시절에 이 영화를 보았는데, 내가 처음으로 만난 그의 영화로 내겐 각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는 대체로 비슷한 구성을 취한다. 주인공을 난감한 상황에 밀어 넣은 뒤 그 또는 그녀로 하여금 선택을 하게 만든다. 난감한 상황이란 주로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고, 이는 정서적 흔들림과 도덕적 갈등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주인공의 행동이나 감정에 개입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 관찰한다. 그래서 나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선택과 결단과 기다림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보름달이 뜨는 밤>의 주인공 루이즈는 사랑의 달콤함은 누리면서도 사랑이 주는 구속에서는 벗어나고 싶어한다. 파리 외곽에서 레미와 같이 지내는 루이즈는 애인이 모든 일을 함께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자 파리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겨 두집 살림을 한다. 한편 옥타브는 그녀에게 친구 이상의 관계를 집요하게 원하고, 바에서 만난 바스티앙은 그녀를 침대로 유혹한다. 루이즈는 자신이 이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명확하게 선을 긋고 있다고 생각한다. 레미는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해주는 애인으로, 옥타브는 가끔 만나는 친구로, 바스티앙은 스쳐 지나가는 관계로. 문제는 남녀 사이가 그렇게 수학공식처럼 딱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자신이 요구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 관계는 변하기 마련이다.

결국 루이즈는 레미의 행동을 의심하게 되고, 그녀의 우려대로 레미는 루이즈의 친구의 친구와 눈이 맞아 그녀 곁을 떠난다. 그러면 이제 루이즈는 쿨하게 관계를 정리하고 새 출발을 할까. 아니면 홀로 된 자의 자유를 만끽할까. 그녀는 독립적인 삶을 항상 중시했으니까. 그런데 그녀의 표정을 보니 왠지 의구심이 든다. 사실 모든 것이 그녀의 뜻대로 돌아가던 시절에도 그녀 표정은 항상 그늘져 있었다. 예쁜 용모 덕에 남자가 끊이지 않았지만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했다. 마치 자신의 확신을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보름달이 뜨는 밤>과 흥미로운 관계에 있는 영화는 <겨울 이야기>다. 이 영화의 주인공 펠리시아 역시 많은 남자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고민을 하지만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던, 하지만 주소를 잘못 건네는 바람에 한동안 소식이 끊어졌던 샤를르를 우연히 시내에서 만나자 현재의 애인들을 미련 없이 버리고 샤를르의 품에 안긴다. 영화는 물론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루이즈와 펠리시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루이즈는 겉으로는 씩씩한 척하지만 자신의 삶에 확신이 없고, 펠리시아는 자신의 선택에 한 치의 의심도 없다. 그럼 에릭 로메르는 이들 중 누구 편일까. 앞서 말했듯이,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선 인물을 보여주고 관찰할 뿐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가을 이야기> - 중년여성의 사랑 찾기


▲ 에릭 로메르, 이제는 노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이 노년의 감독은
이미 오래전에 경력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누벨바그 동료들과 달리
여전히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젊은 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는 취향을 크게 타는 편이라서 남들에게 선뜻 추천하기가 망설여진다. 그렇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으니 그 영화가 바로 <가을 이야기>다. 중년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영화는 다른 에릭 로메르의 영화들과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사변적인 대사가 있고 사건이 천천히 진행되는 다른 영화들과 달리 <가을 이야기>는 현실감 넘치는 대사에 무엇보다 진행 속도가 빠르다. 등장인물도 여럿이고 사건들도 비교적 많이 일어나고 서로 풍부하게 얽힌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보통 주인공들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해 갈등하는 것과 달리 이 영화의 주인공 마갈리는 (그리고 다른 인물들 역시) 명확한 목표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카메라조차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에 적극 관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의 주제는 중년여성의 사랑 찾기다. 마갈리는 남편을 오래전에 잃고 포도농장에서 농사를 지으며 혼자 산다. 그런 그녀에게 짝을 맺어주려는 두 명의 후원자가 등장한다. 한 명은 서점을 운영하는 그녀의 친구 이사벨로, 딸의 결혼을 앞두고 문득 시골에서 외롭게 지내는 친구가 생각나서 신문에 구인광고를 낸다. 또 한 명은 마갈리의 아들의 여자친구다. 그녀는 엉뚱하게도 자신이 틈틈이 만나고 다니던 옛 스승을 남자친구 어머니에게 소개하려고 한다. 두 명 모두 당사자 모르게 일을 진행시키다가 이사벨의 딸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모두들 만나게 된다.

주인공이 중년이라는 사실은 의외로 이 영화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리저리 생각하고 재는 젊은이들과 달리 이들은 새로운 기회에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는 생각에 설렘을 숨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화가 중년의 로맨스를 낭만적으로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마갈리의 얼굴은 가끔 감정을 읽어내기 어려운 묘한 표정을 지으며, 프랑스 남부의 시골 풍경은 적막하고 때로는 황량하기까지 하다. 아무런 감정도 없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사진 같은 분위기다. 이것이 로메르가 보여주는 중년의 모습이다. 이럴 때는 스쳐가는 한 자락 인연도 소중한 법. 소극적이고 다소 위축되어 보였던 마갈리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적극적으로 새로운 기회에 몸을 맡긴다.

<가을 이야기>는 노년에 이른 에릭 로메르의 완숙한 경지를 내보인 작품으로 그가 평생 영화 작업에 매달리며 깨달은 인생의 교훈을 담담하게 펼쳐 보이는 영화다. 문득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말년에 만든, 딸을 시집보내고 홀로 남게 될 어머니에게 인연을 맺어주려는 영화 <가을 햇살>이 생각난다. 가을이라는 계절은 이렇듯 풍요로운 결실과 함께 겨울이라는 외로움을 예비하고, 우리는 외로움에 대비하기 위해 마음을 분주히 놀린다. 

<O 후작 부인> - 한 장면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


▲ 에릭 로메르 회고전 포스터
우리는 에릭 로메르를 문학적인 영화를 주로 만든 모럴리스트로 생각하지만 그도 평생 이런 양식의 영화만 만든 것은 아니며 가끔은 외도를 했다. 그는 시대극을 세 편 만들었는데 그중 첫 번째가 1976년에 나온 <O 후작 부인>이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스탠리 큐브릭은 <배리 린든>(1975)이라는 시대극을 만들었고, 리들리 스코트는 나폴레옹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결투자들>(1977)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O 후작 부인>은 에릭 로메르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이례적인 작품이지만 세계 영화사에서도 독특함으로 유례가 없는 영화다. 독일 작가 클라이스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독일어 대사를 사용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영화는 오직 한 장면만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잠시 대략적인 줄거리를 따라가 보자. 남편을 잃은 후작 부인은 전쟁이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대피하는 와중에 병사들에게 겁탈당할 위험에 처했는데, 러시아 백작이 나타나 그녀를 구해준다. 이후 백작은 집요하게 부인에게 청혼을 하지만, 엄격한 규율에 재혼하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한 부인은 결정을 계속 미룬다. 그런데 몇 달 후 갑자기 그녀의 배가 불러온다. 그녀는 분명 성관계를 가진 기억이 없는데 의사의 진단 결과 임신으로 밝혀진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여기서 문제의 장면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백작에 의해 위기에서 벗어난 부인은 지친 몸으로 임시 거처에 마련된 침대에 누워 달콤한 잠에 빠진다. 그런데 이 장면이 아주 수상하다. 헨리 퓨젤리의 그림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포즈로 누운 부인의 가운의 주름이 마치 꿈틀대는 벌레들처럼 너무도 생생하고 육감적이다. 카메라는 이 장면을 집중해서 잡은 다음 부인을 바라보는 백작의 표정을 줌인으로 잡아낸다. 이 장면이 안겨주는 인상이 너무도 강렬하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관객도 이 장면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O 후작 부인>은 강렬한 이미지 하나와 이를 설명하기 위한 평범한 (혹은 지루한) 나머지 장면들로 구성된 영화다. 물론 19세기의 성윤리와 경직된 귀족사회의 규율을 비판하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영화는 일차적으로 이미지를 통해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마치 연극 세트처럼 말끔히 정렬된 무대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을 따라가는 카메라다. 때로는 가만히 정지해서 인물들이 프레임을 벗어날 때까지 지켜보다가, 인물의 감정이 움직이는 장면에 이르면 그의 동작을 천천히 따라간다. <O 후작 부인>은 로메르의 일반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있는 영화이지만 새로움을 원하는 관객이라면 꼭 한번 찾아서 볼 만하다. 



* 정이창 문화비평가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10대를 보냈고, 팝 음악과 영화로 20대 청춘을 보냈다. 음악, 영화, 책 등을 벗삼아자유기고가와 번역가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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