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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문화예술

<스페니쉬 아파트먼트>, 통합 유럽의 두 가지 길과 혼종성의 대항 제국

by 내오랜꿈 2007.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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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니쉬 아파트먼트>, 통합 유럽의 두 가지 길과 혼종성의 대항 제국

- 68세대의 후예들에게 놓여진 유럽통합의 미래상 -


양새슬 기자

출처:<진보누리>(www.jinbonuri.com) 2004. 10. 20



 


 
  ▲ <스페니쉬 어파트먼트>

변방의 우리에게는 기껏해야 올림픽의 도시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바르셀로나는 건축가 가우디의 주 무대로 유명한 도시이다. 수입의 대부분이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을 보기 위해 찾아온 관광객의 호주머니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바로 그 바르셀로나를 찾은 프랑스 유학생이 여기에 있다. 낯선 거리를 배회하고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고단한 유학생, 프랑스 청년 자비에는 6명의 유학생이 사는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에 입주하고, 이때부터 유쾌한 유럽 버전 ‘프렌즈’가 펼쳐진다. 물론 그것은 오리지널 ‘프렌즈’처럼 허무맹랑하지 않다. 


영화 얘기는 이쯤에서 멈추도록 하자. 스포일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극도로 사악한 성정의 유형이 그 하나요, 지극히 우둔한 성품의 유형이 그 둘이다. 어느 것도 내 컨셉은 아니다. 다만, ‘범 유럽이여, 단결하라!’라고 일갈하는 에피소드가 하나 나온다는 것 정도는 서비스로 덧붙여두어야겠다. 부록으로 덧붙이자면 자비에가 벌이는 프랑스 유부녀 안네소피와의 불륜 행각의 현장이 가우디의 구엘 공원이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라는 것, 따라서 파파라치처럼 인물에만 포커스를 맞출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도 한번쯤 눈길을 던져봄직하다는 것 정도를 카피레프트 정신에 따라 밝혀 두는 바이다. 


내 관심을 끄는 것 중 하나는 유럽 젊은이들의 섹스다. 그 ‘젊은 유럽’들은 68세대의 자식뻘에 해당하는 세대인데, 이들의 섹스는 그네들의 부모 세대가 물려준 혁명의 리듬처럼 즐겁고 가볍다. 이들은 정말이지 함부로 ‘한다’. 급기야, 이들의 섹스는 혼비백산 친구들을 달려오게 만들고, 동생을 동성애자로 거짓 커밍아웃하게 만들며, 옛 애인으로 하여금 이역만리에서부터 유모차를 끌고 오게 만들거나 호의로 대한 한 의사의 입에서 ‘다시는 내 아내 만나지 마’라고 내뱉게 만든다. 섹스는 점점 더 가벼워진다. 


이들의 무례함은 섹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취해 부리는 주사, 모여 피우는 마리화나, 파리의 교미를 흉내 내는 더러운 농담, 여자를 절정에 달하게 만드는 방중술 실전 강의 등이 마치 이들의 더럽고 너저분한 욕조처럼 혹은 거실처럼 장면마다 펼쳐진다. 땅에 떨어진 유럽의 공맹지도(孔孟之道)!! 


허나 전혀 불쾌하거나 ‘오호 통재라’를 외치게 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오히려 입 꼬리가 올라가고 거추장스러운 짐을 벗어던진 것처럼 유쾌해진다. 은근히 저 유럽이 부럽고 이 섬나라 한국 땅이 억울해 훌쩍 떠나고 싶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벼워지고 있는 것은 한국 역시 다르지 않다. ‘섹스? 어머머, 그런 거 난 몰라’ 하는 시대는 물 건너간 지 오래다. 공식성과의 간극은 있을지언정 한국에서도 ‘성’은 적어도 21세기 청춘 남녀에게 개방됐고 해방됐다고 말할 수 있다. 곧이곧대로 말했을 리 없는 고등학생들의 성 경험 통계만 보아도 그건 이미 시대적 추세요, 세대적 경향이라 말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의 성적 진보의 문제는 이 ‘경험치의 제고’가 얼마나 다양한 형태의 섹스와 다기한 경험으로 미분될 것이냐에 있다. 


 

▲불안한 눈빛의 프랑스 청년 자비에. 그는 낯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어떤 길찾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은 영화 속의 한 장면 ©양새슬


어쨌든 간에 이들의 섹스는 생활, 아니 삶 자체의 가볍지만 결코 허술하지 않은 활기로 연결되는데, 그 활기의 정체는 혼종성이다. 섹스란 본질적으로 새로움을 낳는 그 무엇이 아니었더냐. 그런데 이들이 육체를 부단히 부대끼며 새로움을 형성할 때 그 활기와 면해 있으면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다소간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다른 모습의 유럽이 있다. 그들의 위에 군림하는 국가들의 연합, 바로 유럽연합의 실루엣이다. 


통합된 유럽의 꿈이 현실화되는 이면에 작동하는 힘은 아마도 두 가지 정도일 것이다. 그 하나는 1968년 혁명이 꾸었던 국제주의의 이상이며, 다른 하나는 미국과 소련에 빼앗긴 전후 헤게모니에 대한 유럽(국가들)의 욕망일 것이다. 전자가 훨씬 근원적인 힘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혹자는 유럽통합의 역사를 더듬으며 통합된 유럽에 대한 꿈은 68혁명보다 더 먼 과거부터 시작되었다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그렇게 따지자면 국제주의의 이상 역시 그보다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문제는 기원이 아니다. 문제는 현실적인 힘이다. 


자비에가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에서 ‘또 다른 나’인 그/녀들과 겪었던 1년간의 삶은 ‘통합된 유럽’의 두 가지 길에서 그가 선택해야할 길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줬다. 어마어마한 청사의, 90도로 꺾어지는 복도를 지나, 네모난 사무실에서, 넥타이 꽉 조인, EU 규정대로 움직이는 공무원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일견 무질서해 보이지만 역할을 찾아가며 개성을 발휘하는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의 삶을 살 것인가, 그 갈래 길에서 자비에는 전자를 ‘가지 않은 길’로 제쳐두고 그 무수한 ‘나’ 중 하나인 ‘아이’(였던 자신)의 꿈을 좇아 ‘작가의 항로’로 이륙한다. 그 첫 작품의 제목으로 새겨 넣는 것이 바로 ‘스페니쉬 아파트먼트’(L'Auberge Espagnole / ‘스페인 자취방’ 정도가 맞는 번역이라고 한다)이다. 


이들은 좌절된 68의 아이들이었던 부모세대의 무력감과 거리가 멀다. 잔소리를 늘어놓는 엄마, 주식 시장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아버지, 청사의 깊은 사무실에 꼭꼭 숨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서류로써 집행하는 행정 관료 아버지 친구, 바로 이들이 파리의 68년 소르본느 라탱 구역에서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고 바리케이드를 세웠을 사람들이다. 기성의 권위에 냉소하며 보도블록을 깨고 바리케이드에서 키스를 나눴을 이들이 이제 이렇게 기성의 일부가 되어 국제주의의 아련한 꿈을 고작 유럽연합의 파일 혹은 화폐에서 찾고 있을 때, 살부(殺父)라도 할 것 같은 반역의 아이들이, 부모를 배반하며 부모의 꿈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있다.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는 묻는다. 어떤 통합을 원하느냐고. 세계를 문명으로 재편하는 강고한 통합 유럽의 부활하는 제국의 영화로움인가, 아니면 유쾌, 통쾌, 발랄, 발칙한 우정의 아파트에서 육체로, 위트로, 문화적 잡종성으로 끊임없이 생성해 나가는 젊은 유럽이냐고. 


그렇다고 이 영화가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관료 유럽, 국가들의 연합으로서의 유럽연합의 의도는 늘 파산 선고에 직면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자비에 뿐만 아니라 많은 젊은이들은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을 밟는다. ‘에라스무스’란 교환학생 프로그램이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더욱 경쟁력 있는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한 탈장소화된 공장으로서의 학교다. 또한 국경을 넘어 구축된 노동력 생산 시스템이다. 노동유민의 흐름을 단속적(斷續的)으로 단속(團束)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제적인 노동력 생산 라인이 돌아간다. 


자비에와 유학생들은 바로 이 시스템 내부에 있는 존재들이다. 꿈속에서 ‘에라스무스’의 걱정 어린 눈길을 받으면서도 이들은, 시스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 시스템은 늘 누수 되는 시스템이다. 자비에와 유학생들은 늘 샛길로 빠져 나간다. 급기야 아버지의 희망을 거스르면서 새버린다. 


시스템이 허술해서일까? 아니, 오히려 아무리 파이프 관을 견고하게 짜 맞추고 틈새를 막아도 샐 수밖에 없는 물과 같다고 말해 두자. 인간이 누수를 막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는 사람들의 힘과 의지, 에너지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란의 힘은 파이프를 따라 흐르면서 전파되고 누수의 힘을 결집한다. 자비에는 그 제도를 통해서 다른 유럽을 발견한 예이다.


 

▲유럽의 젊은이들이 빚어내는 혼종성의 유럽, 그것이 국가 기구의

통합을 통한 길과는 다른 통합 유럽의 방식이 아니겠는가.

사진은 영화 속의 한 장면. ©양새슬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 역시 ‘젊은 아시아’를 ‘국가/시장의 연합’과는 다른 길로 꿈꿔야 하는가? 만약 우리의 꿈이 여기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68세대의 좌절과 다를 바 없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왜 우리의 상상력을 유럽을 유럽과만, 아시아를 아시아와만 교배하도록, 하나로 느끼도록 제한해야 하는 것인가? 


감독은 혼동스러워 한다. 그로데스크하고 거대한 관청에서 서류더미와 파일, 양복 입은 관료들의 유럽에 반대하면서, 문화적 혼종성과 생성하는 유럽을 바르셀로나의 유학생들을 통해 제시하는 감독이, ‘양키에 대한 유럽의 단결’을 다소 희화화해서 호소할 때, 앞에서의 그 진정성은 훼손되고 관객인 우리 역시 타자화되어 버린다. 왜 그 미국인은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에 낄 수 없는 것일까? 아메리카 제국이 휘두르는 전횡과 헤게모니에 대한 유럽의 콤플렉스는 관료 유럽의 것이지, 자비에와 그 친구들의 것은 아니다. 내셔널리티를 모르는 ‘아이 자비에’의 것은 더욱더 아니다. 


국적과 피부색, 언어와 젠더, 계급을 넘어, 연합한 인류의 꿈은 지속된다. 그 꿈이 가리키는 방향은 이 영화가 미리 보여줬지만 다 보여주지 못한 유럽 너머 지구를 가리킨다. 꿈은 계속되고, 꿈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대륙을 넘어, 북/남을 넘어, 선진국과 후진국, 유럽과 비유럽을 넘어, 아시아인과 미국인, 남미인과 유럽인이 하나로 응집하여 외치는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슬로건이 지금 인도에서 외쳐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10만여 세계사회포럼 참가자들이 우리들의 자비에고,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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