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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생태환경

생명의 자연농법 6~7

by 내오랜꿈 2011.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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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자연농법 6 자연농법의 이론-두 가지 자연농법


1.大乘的(대승적) 자연농법


인간의 마음과 생활이 대자연의 흐름속에 융합되고 오직 자연에 봉사하기만 하며 어떻한 인위적 노력을 가하지 않아도 자연의 뜻에의해,자연의 혜택으로,자연의 일환으로 살아갈 수 있다. 대승적 자연농업이란 인간이 자연과 合一(합일)되었을 때 성립되는 無爲(무위)의 시공을 초월한 깨달음의 농법이다. 인간과 자연이 부부와 같이 구하지도,주지도,받지도 않는 스스로 그러함의 삶 그 자체이다. 이 농법은 부족함도 족함도 없는 無(무) 그 자체의 생활이다. 이러한 대승적 농법의 시람이 眞人(진인)또는 仙人(선인)이다.

 

2.小乘的(소승적)자연농업


대승적 자연농법의 경지를 추구하며 꾸준히 실천하는 단계의 농법이다. 대 자연의 혜택을 구하고 그것을 받아드릴 태세가 되어있고 준비되여있는 상태이다. 깨달음의 완성을 목표로하는 과정의 여정으로 아직 미완의 상태이다. 자연과 인간이 연인의 관계로 자연을 흠모하는 무한 봉사의 생활이다. 이러한 소승적 농법의 사람이 自然人(자연인)이다.


자연농법의 4대 원칙


인간은 어리석게도 과학농법의 이름으로 까다로운 조건을 연달아 만들어 놓고 그것에 억매여서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한다. 그것들을 모두 버려야 돤다고 하면 불안해 한다. 자연농법을 긍정하는 사람들도 一切無用(일체무용)의 자연농법을 실제로 실행하는 데에는 비약적인 결심이 필요하고 그결심에는 불안이 따를수 있다. 그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나의 경험을 말하려 한다.


나의 자연농법은 一切無用에 거의 근접해 있다. 지난 30년동안 살패한적도 있다. 그러나 그 원칙이 옳았기 때문에 현재는 과학적 관행농업을 능가하고 있거나 그에못지않은 수확을 얻고 있다. 제일 중요한 점은, 노력과 비용이 수십분의 일밖에 들지 않았다. 현재는 그것마저 無(무)로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길러낸 작물 뿐 아니라 그 과정에도 자연의 훼손이나 파괴는 전혀 없고 토양은 영원히 살아 숨쉬며 비옥하다. 이 농법은 나의 오랜세월 실시한 체험의 결과로 실질적이고 확실하며 누구나 할 수 있는 농법임을 보증한다.

 

1.땅갈지 않기(무경기)

논밭을 간다는 것은 관행농에서는 매우 중요하며 또한 중노동이다. 땅을 갈지 않는다면 농사일은 상당히 수월해 진다. 농작물의 뿌리는 물과 공기와 영양분을 얻기 위하여 땅속깊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것들을 많이 공급하면 농작물의 성장 도와주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쟁기로 갈아주고 잡초를 뽑아 주었다. 갈아주고 사이갈이를 하면 땅이 부더러워저서 공기가 잘통하고 거름도 깊이 들어가 잘 흡수 다고 생각했다.

 

흙은 갈면 나뻐진다. 논을 쟁기로 갈고 밭을 호미로 맬 때 일시적인 눈으로 보면 흙과 흙 사이에 공간이 생겨서 연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넓은 안목에서 보면 흙은 갈면 갈수록 입자는 더욱 작아지고 흙 분자의 배열 상태는 고르게 된다. 분자간의 공간이 적어짐에 따라 흙은 굳어지고 단단해진다. 일시적이나마 흙이 연해지는 것은 퇴비등을 뿌려서 사이갈이와 함께 땅속에 묻혀진 경우 뿐이다. 사이갈이도 되풀이하여서 행해지면 흙의 입자는 더욱 부서지고,부서진 입자는 더욱 잘게 분해되여 되여 굳게 뭉처지며 비가오면 떠내려가 유실되여 버린다.

 

제초제가 생기면서 그것을 뿌렸을 때 사이갈이 횟수가 적을 때 오히려 수확량이 많아짐이 밝혀졌다. 사이갈이가 잡초뽑기를 겸한 작업이였기 때문에 잡초 제거의 효과만 있었을뿐 그 외의 효과는 아무것도 없음이 증명 되었다. 사이갈이가 필요없다고 해서 땅을 연하고 부드럽게 하는 것조차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아니 나는 누구 보다도 땅속에는 풍부한 공기와 거름과 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연상태의 흙은 해가 갈수록 구멍이 많아지고 부더러워지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이것은 땅속에서의 미생물 번식과 땅힘(地力)을 높이고 뿌리가 깊숙이 들어가기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다만 나는 그것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갈아 엎는 것은 해롭다는 것이다. 흙의 일은 흙에게 맏겨두면 부더럽게 되는것도,기름지게 되는것도 자연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땅은 스스로 간다. 쟁기나 가래로 갈아 보았자 갈 수 있는 흙의 깊이는 10-20cm에 불과하다. 이것에 비해 잡초의 뿌리는 30-40cm이상의 깊이로 땅속으로 들어가 땅을 갈아준다. 뿌리가 땅속 깊이 들어가면서 공기와 물과 거름 성분도 스며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깊숙이 들어간 그 뿌리들은 죽어서 거름이 되고 미생물이 번식하여 땅은 더욱 연해진다. 썩은 식물이 있는곳에는 지렁이가 늘어나고 지렁이는 땅속에 구멍을 뚫어 더욱 부럽게 하여준다. 지렁이가 있는곳엔 지렁이를 먹는 두더쥐가 찾아와 땅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땅을 갈지 않아도 자연이 갈아 준다는 것이다.

 

괭이와 쟁기를 안쓰고 비료도 안주는 산속의 나무들은 왕성한 성장을 계속하고 농부는 밭에서 매년마다 갈아주고 거름과 비료와 농약을 주고 해마다 그 양을 더욱 늘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표면에만 눈을 돌리고 땅속 깊은곳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소나무가 골짜기 밑바닥에서 자라는 법은 없다. 삼나무가 산꼭대기에서 싹을 틔우는 일도 없다. 뭍에서 자라는 식물이 물에서 자라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식물조차도 자기가 성장하는 곳으로 어디가 좋은지 정확히 알고 있다. 무지한 인간은 인위적으로 땅의 지반이 무엇인지 토양의 구성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인위적으로 돈이 되는 식물들을 선택적으로 심어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있다. 자연의 산속 숲에는 아무런 인위적 수단을 가하지 않더라도 거목이 무성하게 자랄 토양 조건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자연에서는 풀과 나무와 흙속의 지렁이와 두더지 그리고 곤충들과 수많은 미생물들이 철저하고 완전하게 토양을 비옥하게 유지해 오고 있다.

 

표면의 흙은 풀로, 깊은 곳은 나무로 사이 갈이를 하면 된다. 흙의 일은 흙에게 식물의 성장은 식물에 맡게두는 것이 현명하다.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묘목을 옮겨 심는다. 다른 종류의 나무에 접붙이기를 하거나 뿌리를 마구 잘라 옮겨 심기를 한다. 이때부터 과일 나무의 뿌리는 곧은 뿌리를 잘려 버리고 굳은 바위를 궤뚫는 힘까지 상실해 버린다. 옮겨심기 할때에 뿌리가 조금만 엉켜 버려도 그 나무는 일생동안 뿌리의 정상적인 발육을 방해받게되고 깊이뚫고 들어가는 힘이 약해진다.

 

뿌리는 확학비료를 주면 깊이 들어갈 필요가 없어 짐으로 더욱더 땅 거죽만 기어 다니게 된다. 잡초를 몽땅 뽑아버림으로 기름졌던 흙은 황폐해 질 수밖에 없다. 또한 땅을 일굴 때 밑뿌리까지 전부 뽑아버림으로 땅속 깊은 곳의 썩은 밑거름이 부족할 뿐더러 미생물 번식의 여건이 사라저 버린다. 이렇게 해서 본래는 필요치 않았던 사이갈이와 그루갈이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땅은 갈거나 개량해 주지 않아도 자연은 태고 이래로 순리와 생태계의 순환작용으로 땅갈이를 스스로 계속해 왔다.

 

2.비료안주기(무비료).


작물은 흙에 의해서 성장한다. 작물이 땅에서 어떻게?,왜?,무엇으로? 성장할수 있는지를 바로 알 때 거기에는 인간의 아무런 지식이나 행위가 가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인위적 거름이나 양분은 근본적으로 필요없다는 것을 알 수 없다. 작물은 흙에 의해서 성장한다. 나는 과일이나 쌀과 보리와 채소를 거름안주고 가꾸는 가능성의 여부를 실험해 왔다. 자연의 힘을 최대한 발휘시킬 수 있는 방법을 취함으로 수확량의 감소 없이 거름안주고 가꾸기는 가능하다. 식물들은 자연생태계에 가장 알맞은 모습으로 자연의 법칙과 순리에 따라 시기와 절기기에 알맞게 성장하고 자란다.

 

비료의 피해는 막대하다. 대자연의 흐름속에서 자라는 식물들에 비료를 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연의 운행과 생태계에 어떻한 양향을 미치는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비료를 준다는 것은 오직 눈앞에 보이는 고속성장의 변화에만 현혹되여 대도를 못보는 결과이다. 1g의 흙과 한알의 씨알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어있다. 사람들은 흙을 광물로 만 안다. 밭의 흙속에는 대개 1억마리 이상의 소동물과 미생물과 곰팡이,박테리아,뜸팡이등이 살고 있다. 흙은 죽어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살아있는 생물의 덩어리이다. 이러한 미생물들은 저마다의 역할과 이유를 가지고 생존하고 투쟁하고 공생하며 생태의 축으로 유전을 계속하고 있다. 비료의 일시적인 효과만을 강조한 남어지 그 피해와 악영향은 가려진 채 무차별 적으로 살포 되고 있다. 그 영향은 말할 수 없이 많다.


1. 비료의 작물 성촉진효과는 일시적이고 부분 적이나 약화현상은 필할수 없다. 성장호로몬의 경우도 마찬 가지다.

2. 약해진 작물은 자연 섭리작용의 장해와 병충해에대한 저항성의 약화를 가저온다.

3. 토양에 뿌려진 비료는 연구실 실험실에서 나타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토양의 질소 성분은 30%정도가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여 공기중으로 사라저 버리며 많은 양은 빗물에 의해 유실되여 오랜세월동안 버려저 하천을 오염시키고 있다. 남아지 성분 마저도 토양의 5cm 정도 밖에는 흡수되지 않는다.

4. 비료의 직접적인 피해도 크다. 비료의 3대 원소인 황산 암모니아,과린산,칼륨등은 모두 70%이상이 진한 황산으로 흙을 산성화하여 직,간접으로 작물에 큰 피해를 주고 있다. 이 산성 비료가 토양속의 미생물을 약화,억제 시키거나 죽이고 있다. 이 결과로 인한 흙속의 혼란은 어떤 식으로 인간에게 대 반란으로 반격해 올지 아무도 예측조차 할 수 없다. 흙은 이미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지만 우리는 모르는체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5. 물기질 등 소량의 성분 부족 현상 역시 비료의 심각한 나뿐 영향 중의 하나이다. 한정돤 몇 가지의 성분뿐인 비료에 의지한 재배는 토양의 심각한 무기질등 소량원소의 부족 현상을 초래하였고 그 토양에서 성장한 작물 또한 필요 영양소의 결핍으로 저항력과 자생력을 잃어 더많은 비료와 농약의 사용을 불러오는 악영향을 불러오고 있다. 그러한 작물들은 자연식과는 거리가 먼 영양소 결핍의 저질 식품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농작물에 국한되지 않고 과일나무에도 급격하고 중대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과일나무에 뿌려지는 질소나 인산은 요오드가 부족한 흙속에서는 잘 분해되지 않는다. 토양의 산성화로 석회를 뿌리면 토양이 알카리성이 되는데 토양이 알카리성이 되면 아연,망간,붕소,요오드등은 물에 녹기 어려움으로 결핍현상으로 이어진다. 칼륨성분이 너무 많아지면 요오드가 있어도 흡수되지 않는다. 붕소도 명백히 감소된다. 질소,인산 칼륨의 사용이 많아 질소록 아연,망간,붕소는 부족해 지며 이는 과일의 미량원소 결핍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토양에 축적되고 그러한 현상이 인간의 눈과 감각에 드러나고 느껴질 때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다. 농부들은 매년 비료를 얻기위해 총 생산비의 30-50%를 비료값을 지출한다. 이는 그나마 어려운 농민의 주머니를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

 

무비료 자연농법은 가능하다. 나는 완전한 자연상태에서의 무비료 재배는 철학적으로 가능하고 그 농법이 과학적 방법보다 유리하며 가장 바람직한 농법임을 확신한다. 비료 안주기가 가능하다해도 실제로 현재 행해지고 있는 잡초를 뽑고 땅을 갈아업는 농사법의 논밭에서 바로 갑자기 적용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 논밭은 이미 살아있는 자연상태의 살아 있는 흙이 아니다. 죽어 있는 토양에서 비료나 퇴비를 주지안고 재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토양은 우선 흙을 살려야 한다. 잡초를 살려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자연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자연에 가까워지는 환경을 우선 먼저 만들어야 한다. 자연농법을 행하기 위해서는 관행 농법이 시작되기 이전의 흙의 상태로 먼저 복원하여 회복시켜야 한다.

 

자연을 바로 보라. 비료 안주기의 가능성은 작물을 보고서는 알 수 없다. 자연을 응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 산과 들의 식물들은 자연생태에서 성장한다. 조건이 좋은 곳의 삼나무는 20년 동안에 300평당 40톤 이상 성장한다. 자연생태의 산에서 매년 2톤의 생산량을 올린 셈이다. 잎과 가지까지를 합한다면 4톤에 육박할 것이다.

 

산의 식물들은 인간이 돌보지 않는 오랜 세월 동안 풍화작용에 의해서 바위도 삭고 낙엽에 의해서 부식물들이 증가한다. 이로 인해 미생물들이 증가하고 수많은 곤충들과 동물들의 먹이사슬에 의한 순환의 법칙으로 대사하고 죽고 태여남이 계속됨에서 그 시체들은 토양의 중요한 영양 성분으로 환원되여 토양은 부식되여 검게되고 흙의 알갱이들이 뭉쳐저서 물을 비축하며 식물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쑥쑥 잘 자라난다.


자연은 죽지않고 살아 있다. 살아있는 자연의 숨겨진 힘을 그대로 이용하여 작물과 과일나무가 자라도록하면 그만이다. 인간은 그 힘을 이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연의 힘을 죽이고 있다. 잡초뽑기와 땅갈이를 하는 밭은 땅힘(地力)이 해마다 떨어저 간다. 미량성분들이 고갈되고 활력이 떨어지며 굳어저서 미생물들은 죽어간다. 급기야 죽은 흙이 되어 단순히 작물을 지탱해주는 역할밖에 못하는 죽은 흙이 되어 버린다.

 

원래 비료는 필요치 않았다. 농부들은 논밭과 가수원 조상할 때 나무와 풀을 베어내고 뿌리채 뽑아 밖으로 실어내어 불태우고 내 버린다. 돌을 골라내고 파내고 엎고 평평하게 고르는 동안 토양의 구조는 파괴되여 땅속의 공기도 미생물도 부식물도 모두 사라저 버린다. 이렇듯 완전히 흙을 죽여놓고 묘목을 심고 그 위에 거름과 비료를 주어가며 농사를 짖는다. 농부들은 어이 없게도 자연을 역행한 거꾸로 가는 농사로 돈과 인력을 버리며 고생을 자초한다.

 

화학 비료가 필요 없는 것처럼 과학적인 거름주기 또한 원칙적으로 무의미하다. 자연에 가까운 두엄,퇴비등 유기비료는 언듯 보기에는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짚과 풀과 톱밥등에 축산의 부산물과 발효 세균과 질소질,석회,쌀겨.똥오줌을 넣고 수분을 공급하여

만드는 유기질 비료는 많은 인력과 돈을 필요로하며 가축분뇨의 항생물질과 성장호로몬,염분은 토양을 오염시키는 또다른 피해를 가져다준다. 이러한 기술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으며 그 피해가 더 클 뿐이다. 퇴비가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기물을 퇴비화하는것도 원칙적으로 필요치 않다고 본다. 그러한 생각 자체가 근본적으로 자연에 위배되며 틀린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비료와 거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이 관여치 않으면 스스로 필요한 영양분을 만들고 가장 알맞은 생태적 환경을 만들어 식물들을 무럭무럭 자라게 한다.

 

3. 잡초 안뽑기(무제초)


잡초는 과연 존재 하는가

잡초는 작물의 성장을 방해하고 해롭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우리가 아무런 의문도 없이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 농작물과 잡초를 구별해서 보는 인간의 분별심이 김메기의 근본적인 갈림길이 되는 것이다. 땅 속에는 각종 각양의 미생물들이 서로 다투고 공존하면서 생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땅 위에서도 각양각색의 초목들이 공존공영하는 것이 자연의 모습이다. 


자연 속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특수한 식물 몇 종을 가려낸 뒤 이것을 농작물이라고 이름 붙이고 다른 것은 잡초라고 해서 없애버리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자연에서 식물들이 공존하고 번영하는 것이 인간의 눈에 다투는 모습으로 본다. 이렇게 분별적인 지식으로 작물과 잡초를 이분법으로 구분했을 때부터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작물을 키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자연에서 잡초의 씨는 없앨 수 없으며 이것을 제거하려고 할때 고행은 끝없이 시작되는 것이다. 


비료를 주어 작물을 재배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함께 자라는 잡초는 비료와 거름을 훔쳐가는 도둑이기 때문에 당연히 없애야 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러나 비료를 주지않고 작물을 키우는 자연농법의 입장에서보면 잡초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이다. 수목이 있고 그 밑에 잡초가 무성한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들판의 모습이다. 잡초가 우거짐에 따라 나무의 성장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자연을 잘 관찰하여 보면 큰나무가 우거지게 자란 그 밑에는 키작은 소목들이 자라고 소목들 밑에는 풀들이 또 그밑에는 이끼들이 자라고 있다. 거기에는 거름을 서로 빼앗으려는 쟁탈전이라기보다 생성과 소멸의 생태적 순환으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끼는 죽어 썩어져서 풀들의 거름이 되고 풀들은 죽어 썩어져서 나무들의 거름이 된다. 서로 돕고 공생하는 것이 식물들의 자연생태적인 불가사의 한 힘이다.

 

 

풀은 흙을 기름지게한다.

잡초를 없애려는 노력보다는 잡초가 존재하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여 잡초가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힘을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농부가 취해야 할 바른 길이다. 잡초 안뽑기의 이론은 잡초 有用論(유용론)이기도 한 것이다. 태초 이래로 땅속의 미생물과 지표면의 그 많은 풀들이 없었더라면 기름진 토양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며 나무들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풀들의 뿌리가 땅속 깊이 들어감으로 흙은 부드러워지고 뿌리가 죽으면 부식물이 증가하여 미생물이 번식하게 되어 흙은 비옥하게 된다. 빗물과 공기도 땅속 깊이 스며들어 지렁이가 살 수 있게 되고 지렁이를 먹이로 하는 두더지가 찾아온다. 


풀은 살아있는 유기적인 토양이 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 요소이다. 또한 지표면의 풀이 없으면 빗물에 의해서 흙의 고운 입자들은 흘러 내려 가버려 황폐화 될 것이다. 비탈이 심하지 않은 논밭에서도 흙은 몇천만톤씩 흘러가고 2-3년 후에는 표면에 흙이 사라져 땅힘은 제로에 가깝게 된다. 인도 등지에서 논밭이 마르고 땅표면이 사막화로 변화는 원인은 소를 신성시 하여 마구 놓아 키움으로 엄청난 풀들을 먹어치우는 것이 한 요인이다.

 

풀두고 가꾸기의 효과

나는 최초에 과수원에 잡초 재배를 시도하다가 풋거름 주고 가꾸기로 바뀌어갔고 지금은 잡초 안 뽑고 땅 갈지 않으며 거름도 안 주는 클로오버와 채소가꾸기를 하고 있다. 잡초가 농사짓기에 불편하다면 인간의 손으로 잡초를 없애기보다는 잡초는 다른 풀들에 의해서 없애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자연의 들판에서는 오만 가지의 잡초가 혼란스럽게 자라다가 말라죽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무지일뿐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그 속에는 생태적 법칙과 질서가 있다. 그 토양에 필요한 종류가 자라고 번성해야 할 원인 있고 퇴락하고 소멸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말라 죽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위대한 법칙에 의한 투쟁과 공존의 순환작용으로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풀들 속에서 홀로 고립되어 생존하는 것도 있고 무리지어 사는 것과 집단적 군락을 이루어 사는 것 등이 있다. 어떤 것은 드문드문 홀로 자라고, 무더기로 자라기도 한다. 다른 식물을 압도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감겨붙어 공존하는 것도 있고 압도하여 쇠약하게 만드는 것이 있는 반면 밑풀이 되어서 썩어져 죽는 것도 있다. 이러한 모습을 고찰하여 활용함으로서 잡초를 하나의 풀로 두고 작물을 가꿀 수 있는 것이다. 


잡초 대신에 자연과 농부와 작물 모두에게 이로운 풀, 즉 풋거름을 번식시키면 김메기 작업은 필요없게 되고 이 풀들에 의해서 토양이 유실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뿐 아니라 비옥한 땅으로 만들어 지력을 높일 수 있다. 특히 과수원에 있어서 김메기는 필요없을 뿐 아니라 잡초가 해롭다는 것은 인간의 무지일 뿐이다. 벼 보리와 채소에 있어서도 원칙적으로 김메기의 무용론은 성립된다. 다만 벼 보리 속에 잡초가 자라게 된다면 거두어 들일 때 지장이 있으므로 잡초 대신에 키 작은 다른 풀로 대신하는 수단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보리씨를 벼가 자라 이삭이 고개를 숙일 때 그 속에 클로버 씨앗과 동시에 뿌린다. 그리고 다음해 봄 보리 이삭이 익어갈 때 그 보리골 사이에 볍씨와 풀씨를 섞어뿌리는 연속적인 방법으로 보다 자연생태에 가까운 벼와 보리 농사를 짓고 있고 잡초 안뽑기 재배를 성공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이 방법은 단순하게 김메기를 안 하고 잡초 안뽑기 재배의 가능성을 실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모습에 보다 가까운 방법으로 재배함으로 순수한 자연식 먹거리와 생태적인 자연농법을 실천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나의 오랜 자연농법으로 벼나 보리,채소등과 과일나무도 잡초를 뽑지 않고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잡초도 안 뽑고 비료도 안 주면서 관행적 재배에 필적하는 수확을 올릴 수 있는 채소재배에도 확신을 얻었다.

 

4.농약안주기(무농약)


해충이라는 것은 없다.

농작물에 병충해 문제가 생기면 곧 병충해 방제법을 거론한다. 그러나 원래 이것은 “병충해는 도대체 있느냐 없느냐” 는 점에서 검토되어야 할 문제다. 자연의 초목에는 수백수천 가지의 병이 있으나 실제로는 해롭지 않다는 것이 원칙이다. 병충해를 운운하는 것은 농작물에 대해서 뿐이다. 농작물이 병충해로 인해 피해를 받는다고 하여 벌레가 눈에 보이면 당장 살충제를 뿌린다. 벌레는 있어도 해충은 없다는 관점에서 방제를 하지 안 해도 되는 방법을 취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 될 것이다. 


과학농법은 농약의 사용이 인체를 병들게 하고 자연 오염 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공해문제와 부작용이 없는 농약의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천적을 이용한거나 독성이 낮은 농약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 천적이용은 생물학적 방법으로 인간에게는 해가 없어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생물의 연쇄 관계를 아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무엇이 천적이며 어떤 것이 해충인지 또는 익충인지 도저히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와 같은 행위는 넓은 안목으로 보면 생태계의 교란과 자연 질서의 파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근시적으로는 천적을 보호하고 해충을 죽이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것이 해충인지 또는 익충인지 조차도 알 수 없고 언제 해충이 익충으로, 익충이 해충으로 변할지는 아무도 알수 없다. 더구나 천적이 제1차, 제2차, 제3차, 그렇게 계속되고 해충을 이롭게 하는 익충을 죽이는 또다른 해충, 그 해충을 죽이는 익충, 이렇게 연속되는 경우 어떻게 해충만을 구별하고 선택하여 죽일 수 있는지 도저히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없다. 이러한 생태계의 교란의 결과는 이미 우리에 논과 밭 그리고 과수원에서 경고를 보내고 있다. 언제 어떻게 인간에게 반격으로 되돌아 올지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생태계를 교란하는 새로운 농약제품의 공해

최근 농약의 부작용과 공해 문제의 해결이라는 방편으로 생태계를 교란하는 새로운 농약들이 개발되고 있다. 곤충과 미생물의 특수한 효소를 억제하는 농약, 태양이나 미생물의 완전분해 작용을 이용한 농약은 가스가마이신등의 항생물질과 생물체를 이루는 성분인 아미노산, 지방산, 당핵산 등을 농약으로서 이런 것들을 활용하면 잔류농약에 대한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곤충이 분비하는 생태호르몬의 작용을 방해하거나 억제하여 성장과 생식기능을 말살하는 농약을 월계수 나무로부터 추출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물질들은 특정한 곤충에만 작용하는 선택성 농약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근시한적인 기대에 지나지 않는다. 


동물의 세포나 미생물의 세포 또는 식물의 세포는 원자와 분자의 상태에서는 서로 본질적으로 비슷하거나 같은 것이다. 벌레나 균에 약효가 있다면 크던 작던 식물과 동물,그리고 전 생태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인간에게도 결코 예외일수 없다. 우선은 해롭지 않게 보이거나 공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미세한 작용들이 파급되고 누적, 축적되어 눈에 보이거나 현상으로 나타날때는 이미 때가 늦다. 특히 活(활) 페로모네스(pheromones)는 생물의 생체내에서 만들어지고 아주적은 양으로 해충의 숫컷,암컷만을 유인하고 흥분시키고 불임시키는 용도로 사용된다. 이러한 현상들이 특정 해충에만 작용한다는 증명이 없다는 것이 크나큰 문제이다. 어떤 특정 해충에게 사용된 불임제가 언제 어떠한 형태로 식물이나 동물 그리고 인간에게 까지 영향을 미쳐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자연의 생태계에서는 특정한 한종의 생물을 전멸 시키거나 괴멸시키면 먹이사슬이 파괴되고 그영향은 생태계의 교란으로 이어져 반드시 큰 보복을 불러온다. 피시피(pcp)와 같은 고엽성분의 제초제를 뿌릴 때 잡초만 죽는 것이 아니다. 살균제 역할도 같이 하는 이농약은 살아있는 식물들의 흑점병 병균을 죽이고 낙엽에 붙어서 부식 작용를 하는 수많은 균류나 박테리아까지도 죽인다. 이로 인해 낙엽등 식물의 잔해가 분해되지 않으면 그 밑의 흙속에 사는 미생물과 지렁이나 먼지벌레등의 서식생태에 큰변화가 일어난다. 땅속에 흡수된 pcp는 토양속의 미생물도 모두 몰살시킨다.

 

배추나 무의 세균성 무름병균은 크로로피크린(chloropicrin)으로 토양소독을 하면 일시적으로 당해에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1-2년 후에는 병이 급격히 늘어나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만다. 크로로피크린에 의해서 무름병만 죽는 것만 아니라 무름병균에 대항하여 그 발생을 억제하던 다른 균들도 전멸해버리기 때문에 그 토양은 아예 무름병균의 독무대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각양각색의 미생물들이 함께 모여 사는 토양 속에 각종 살균제를 뿌린다면 자연의 균형 상태를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 농약을 가지고 자연에 생태를 파괴하여 순리와 운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물러서는 것이 대도의 길이다. 제초제로 풀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엄청난 과오를 가져온다. 제초제에 내인성을 가진 강한 수퍼잡초가 엉뚱하게 생겨나서 식물의 생태계를 교란하고 인간을 더욱더 곤란하게 만들 것이다. 예로 제초제에 강한 캔터키 등의 잡초만 무성하게 번지고 그 잡초를 잡기 위해 캔터키를 먹어치우는 해충을 수입하여 그 해충은 농작물도 함께 피해를 주고 이 해충을 잡기 위해 또다른 농약을 개발하는 멈출줄 모르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무지한 농부들은 이러한 사실들 조차도 모르고 농약만 뿌려대고 있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후쿠오카님의 원본에는 결론 부분이 없어 다음은 요약자가 예를들어 기술 하였다)

산에서 자라는 산채들을 보라. 산채에는 해충의 피해도 무름병도 섞음병도 없다. 땅을 갈아주지도, 거름을 주지도, 잡초를 뽑아 주지도, 농약을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인간이 인위적으로 재배한 산채는 맛도, 질도, 크기도 영양도 산에서 자란 산채와 비교될 수 없다. 인간은 땅을 갈아 미생물울 죽이고 표토층을 해마다 유실시킨다. 비료를 주어 토양의 생태계를 파괴하여 미량원소들의 부족 현상을 유발시킨다. 잡초라는 이유로 풀들을 모부 뽑아 미생물과 벌래들을 죽이고 땅을 황폐화시킨다. 특정 작물만 무리지어 심어서 그 식물을 좋아하는 특정 벌래들와 미생물을 불러 들이고 공기와 햇볕의 부족현상을 불러와 썩음병이 생겨난다. 그러고는 농약을 무차별 살포하여 익충과 유익균도 모두 괴멸시켜 버린다. 그 결과는 해충과 해균의 대 반격이 시작 되여 농약 없이는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여 버렸다. 여기에 무농약의 진리기 숨어 있다. 우리는 다만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자연농법7 - 자연농법의 원리

 

자연은 하나(전체)이다. 자연농법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은 완전하며 분별적이지 않은 지혜에 의해서 작물을 키울수 있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확인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농사법은 연구실 학자들의 이론이나 논리의 가정을 위한 것이 아니며, 게으른 농부를 위한 편리를 위한 농법이 아니라 신과 자연과 인간 참 얼의 실체를 직관하여 삶의 회의와 의문을 전 삶적 合一을 통해 이루려는 것에 근본 바탕을 둔 것이다.

 

인간은 산을 이해하려 할 때 보편적으로 다음과 같이 한다. 과학자들은 산에 올라 광물과 식물과 동물과 생물의 분포를 조사하고 생물학적, 지질학적, 기후학적 연구하여 이것을 종합하여 산이라 규정한다. 예술가들은 산의 진정한 모습은 멀리서 조망함으로 알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산의 원경을 그림과 사진과 영상에 담아내어 그것이 산의 참모습이라 정의한다. 일반적인 합리주의자들은 과학자들의 견해와 예술가들의 생각 모두를 수용함으로 산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전체가 없이는 부분이 없고 부분이 없이는 전체는 없다. 산을 분별하여 일부를 보고 산이라 단정짓는 한 그것이 어떠한 방법이든 산은 알 수 없다. 산을 진정으로 알려면 먼저 산을 구별하기 이전에 진정한 참나 즉 진아(참얼)를 보아야 한다. 그것은 일생동안 축적한 모든 지식과 관념들을 하나하나 내려 놓아 텅빔(空),완전한 無(무)에 도달 했을 때 일체의 分別智(분별지)는 사라지고 진정한 산을 直觀(직관)하는 開眼(개안)이 열릴 것이다.

 

자연농법은 신과 자연과 인간이 合一(합일:하나됨)하는 방편이며 방법이다. 자연과 작물과 인간이 하나 된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한그루의 벼가 되어서 바로 보고 듣고 이해하여야 한다. 벼는 키우는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라는 것일 때, 벼의 자라남을 無心(무심)으로 바라볼수 있을 때 벼와의 合一(합일)은 이루어 지며 벼와 하나 될수 있다. 자기를 내려놓고 버리는 것만이 자연과 하나되는 지름길이다.

 

자연에는 불완전함이란 없다.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보리 씨알은 틀림없이 싹이 트고 스스로 자라나며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는다. 만약 도중에 보리가 병들고 시들어 죽어가는 부자연스러운 현상이 일어난다면 그 원인은 인간의 불완전한 지식과 행위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을 각성하고 버려야 한다. 자연에는 善惡(선악)이란 없으며, 본래는 해충도 없고 익충도 없다고 보는 것이 자연농법의 길이다. 해충이 발생하여 보리를 망쳤다면 그것은 인간이 무엇인가 물리적인 힘을 가한 것이다. 땅을 갈아 땅의 균형을 파괴했던지. 풀들을 모두 뽑아 황폐화하였거나, 보리를 지나치게 밀식 했다던지, 보리에 붙어 살아가는 벌f레들을 해충이라 하여 전멸시키는 등 자연의 균형을 파괴했을 때 발생한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곧게 자라나면서 제나름의 수형을 유지한다. 뿌리는 뿌리대로 줄기는 줄기대로 가지는 가지대로 잎은 잎대로 서로 겹치거나 엉키지 않고 균형을 이루어 자라므로 골고루 햇빛을 받으며 성장한다. 인간이 나무들을 옮겨 심고 가지를 전정하면서 나무의 고통은 시작된다. 수형은 꼬부라져 변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헛가지를 친다. 뿌리는 곧은 뿌리를 잘려버려 더 이상 깊게 뻗어나가지 못하고 필요한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한다. 과일나무는 인간의 이기를 위하여 가위로 잘려지고 철사줄로 꼬부려져 강제로 열매를 맺는다. 인간이 물리적 힘을 가할 때 나무들은 본래의 모습이 파괴되고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된다. 본성을 잃어버린 나무는 약해지고 병들어 간다. 자연은 완전하며 불완전함이란 없다는 것을 깨달아 무지한 행위들을 반성하고 자연 스스로의 힘에 맏기는 것이 자연농법의 길이다.

 

자연농법은 時空(시공)을 超越(초월)한다. 인간은 태어남이 시작이며 죽음은 끝이라는 생각으로 生老病死(생노병사)에 괴로워 하고 슬퍼한다. 대자연의 순리를 시공을 초월해서 보면 모든 작물은 봄에 싹이 트고 여름에느 스스로 성장하고 가을이면 죽어간다. 그 죽음의 내면에는 씨알이라는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으며 그 씨알은 봄이 오면 또다시 싹이터서 보리의 삶은 영원히 이어나간다. 이러한 작물의 순리를 이해하고 그 순리에 의해서 작물이 스스로 자라고 결실을 맺어 순환 하도록 도우는 것이 자연농법임을 이해 하여야 한다.

 

인간은 곡식과 채소 과일만을 가치가 있는 작물로 생각한다. 자연에서는 작물이란 없다.작물이라는 이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기일 뿐이다. 자연농법은 分別智(분별지)와 相對界(상대계)적 관념을 버리고 시공을 초월한 絶對界(절대계)적 사고에서 이루어 져야한다. 시공의 초월이 자연농법의 시작이고 끝이며 바른 이해이다. 작물을 벌레가 먹는다면, 인간에게 필요한 작물과 그 작물을 먹는 벌레로 따로 분별하여 보는 것이 分別智(분별지)이며, 작물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며 벌레는 작물을 해치는 해충이라고 보는 것이 相對界(상대계)이다. 반면에 작물과 벌레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상생의 관계로서 자연의 순리와 운행의 이치로 보는 것이 時空(시공)을 초월한 相對界(상대계)적 사고이며 자연농법의 이해이다.

 

자연계에는 부분(땅,하늘,동식물,미생물)을 포함한 전체 즉 지구가 있고, 그 전체를 포함한 더 큰 전체 즉 태양계가 있으며, 더 큰 전체를 포함한 더더욱 큰 전체 즉 은하계가 존재하고, 더더욱 큰 전체를 포함한 무한한 전체 즉 우주가 있다. 동심원의 파장처럼 그 우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짐작조차 할수 없는 것이다. 이 우주는 한치의 불완전이나 착오도 없이 스스로 운행되고 있다. 이것이 대 자연계이다. 이러한 대자연계에서 인간이 사물을 분별한다는 것은 무지이며 무식의 극치일 뿐임을 아는 것이 자연농법 이해이다.

 

자연농법은 無慾(무욕)의 농법이다. 자연농법은 작물의 생산으로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거나 조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서는 안 된다. 인간의 목숨을 건강하게 유지할 생명의 양식을 얻는 것이 사명이다. 만족할 줄 알며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더 많은 수확을 욕망하며, 맛있는 쌀, 부더러운 보리, 쓰지 않고 깨끗한 채소, 크고 단 과일들을 요구해 왔다. 그 결과로 인간의 욕망이 원하는 대로 과학자들은 무분별하게 품종을 개량하고 유전자를 조작해 왔다. 개량되고 조작되 대량생산되는 작물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그 끝은 어디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아주 조그마한 맛의 욕망, 작은 단맛을 키우기 위해서 품종 개량을 했을 때조차도 자연은 아주 강하게 저항한다. 과일나무들은 인간이 다수확과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한 번 가지치기를 하면 일생동안 가지치기를 하여 주어야 한다. 나무는 스스로 가지를 조정하는 일을 멈추고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무는 혼란에 빠져 살아남기 위해서 수많은 헛가지를 만들고 인간은 해마다 가지 잘라내기의 많은 노동력을 낭비 하여야 한다. 일생을 잘리고 솎아지고 농약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강제로 자라나는 과일나무에서 생산되는 과일은 인간에게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無慾(무욕)과 無對策(무대책)의 농법을 깨우치는것이 자연농법의 올바른 이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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