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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생태환경

생명의 자연농법1~5

by 내오랜꿈 2011.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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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자연농법1-자연농법의 이해

 

관행농업의 폐해로 인한 각종 암 등 난치성 질환의 증가, 토지의 황폐화 등 생명의 위협과 농업의 위기가 들어나면서 자연농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자연농법은, 오래 전 일본의 후쿠오카 마사노부 선생이 자연농법이라는 無(무)의 깨달음을 통한 구도자적 수행적 삶을 살며 창시한 생명의 농업입니다. 일본에서는 기적의 사과, 잡초와 함께 짓는 자연농법, 예술자연농법등으로 발전하여 잘 알려져 많은 농민이 적용하고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슬로우라이프, 슬로우푸드, 로컬푸드 등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습다.

 

우리나라에는 1988년에 정신세계사에 의해 처음 그의 저서가 소개 되었고 1994년에 보완판이 최성현 선생과 시오다교오꼬씨에의해 번역되어 소개되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4무농법이나 무투입농법 등의 이름으로 정농회와 일부 과일생산 농민이 적용할 정도입니다. 생명의 농업을 번역한 최성현 선생이 충북 제천의 백운산 자락에서 후쿠오카 선생의 정신과 자연농법을 구현하여 많은 이의 귀감이 되다가 개발에 밀려 고향인 홍성으로 돌아갔습다.

 

우리나라에는 자연농법의 방법은 정립되어 있지 않고 정신은 그나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자연농업에 대한 정보도 일부 단편적으로 인터넷에 검색되고 있으며 자연농법 책도 절판된 지 오래되어 구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자연농업의 정보에 목말라 하는 회원들의 요청으로 후쿠오카 마사노부 선생의 저서들을 참고하고 요약하여 체계적으로 올리려 합니다. 가급적 후쿠오카 선생이 의도했던 본의를 훼손하지 않으려 노력 했지만 많은 부분을 한정된 지면에 요약함의 한계가 있으리라 인정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선생의 자연농업의 정신이 가장 중요 하리라 생각되여 그 부분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중복되는 부분은 통합하였고 일본의 지명과 식물명 등은 상당 부분 보편적 대명사로 대체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난해한 부분은 쉽게 풀어 의역하려 노력하였지만 짧은 식견으로 누를 범하지 않았나 걱정이 됩니다. 요약하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여러 사정으로 동시에 올리지 못하고 한편식 연재식으로 올리려 합니다. 자연농업을 실천하려는 先覺的 회원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바램 합니다.


기술되는 자연농법의 구체적 방법은 따뜻하고 화산재로 비옥한 일본에서 실시한 것입니다. 기후와 토질과 생태계가 다른 우리 나라에서 바로 적용될 수도 없고 하여서도 안됩니다. 우리의 산야에는 기능이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수많은 자원 식물들이 잡초라는 이름으로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 소중한 보물들은 제초제와 제초기와 기계톱에 의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휘귀나무.약초.산채.야생화등 우리의 자원들을 깨워서 적용 하여야 합니다. 서구에서 들어온 종자들과 품종 개량으로 멸종되고 잊혀진 우리 토종 씨앗들을 찾고 복원하여 자연으로 되돌려 주어야합니다. 우리의 특성에 알맞게 연구되고 실험되여 나름의 방법이 재정립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회원 여러분의 몫입니다.

 

자연농법을 만나는 것은 자연으로 돌아 가려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신의 선택적 소중한 인연입니다. 자연농법은 그 결과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자연농법의 여정은 진리로 가는 구도자의 수행이여야 하며 명상적 삶 전체 이어야 합니다. 그대가 평생 동안 축적한 모든 지식과 고정 관념을 하나하나 내려놓는 全無(전무)를 향한 여정 이여야 합니다. 그 구도적 여정의 어느날 그대는 자연을 직관하는 마음의 혜안이 열릴 것이고 이윽고 자연의 실체인 神과 직면하게 될것입니다. 아니 신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농법을 유기농 통곡물과 야채와 과일을 얻어 돈으로 비꾸려는 수단으로 전락 시키다면 그대는 또다시 좌절하고 포기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자연농법이 회원 여러분의 참얼을 찾는 전 삶적 과정이기를 바램합니다.

 

기다림의 긴 시간과 땀으로, 그리고 수많은 실패의 역경을 딛고 얻어질 회원 여러분의 자연농법 지혜들을 나눔하고 공유함으로 한국적 자연농법을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자연과 인간을 살리는 생명의 농업으로 보편화 되기를 염원 합니다.

 

 

생명의 자연농법 2


후쿠오카 마사노부(福岡正信) 그는 누구인가?


자연농법, 생명의 농업이란 말은 일본남부 시꼬쿠(四國)의 한 작은 마을에서 농사를 짓던 후꾸오까 마사노부 선생이 주창하는 농사법이다. 선생은 작은 키에 작은 오두막에서 마치 선인(仙人)처럼 살았다. 무우를 비롯한 각종 채소와 귤 사과 등의 과일이 심겨진 야트막한 산에 농장이 있다. 그는 80평생을 평범한 농부이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씨뿌리는 사람이고 싶다“고 외친 그 어떤 聖子(성자)나 覺者(각자) 이기를 거부한 은둔의 농부였다.


후쿠오카 선생은 1914년 일본 에히메현 이요시 오오히라에서 촌장(면장)의 아들로 태어나 기후농고 농학부를 졸업한뒤 요꼬하마항 세관의 식물검사과에 근무하면서 작은 식물병리 연구소를 만들어 현미경과 싸웠던 열혈청년이였다. 그가 25세되던해 과로로 폐렴에 걸려 입원하게 된다. 그때까지 부유한 가정에서 행복한 생활을 했던 선생은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인생에 대한 회의와 고뇌와 절망에 빠지게된다. 깊은 허무에 빠진 그는 밤낮 집 주변의 언덕을 홀로 방황한다.


그러던 어느날 밤 그 밤도 절망과 좌절감 속에서 언덕을 방황하다가 지쳐 나무밑둥에 몸을 기댄채 비몽사몽으로 새벽을 맞이한다. 그때,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의 여명을 뚫고 한 마리의 해오라기가 솟구쳐 오르면서 짧은 비명을 질렀다. 순간 무아의 경지에 빠지면서 우주의 완전성과 인간의 무능력함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된다.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의 신비함과 자신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었다. 완전 無(무)에 의한 자연 直觀(직관)이 신과의 합일을 경험하게하고 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후 선생은 무의 철학을 전개하며 이를 바탕으로 자연농법의 실천과 보급에 힘쓴다. “짚한오라기의 혁명”. 자연으로 돌아가다“. ”무씨리즈 3부작“ 저서를 통해 현대의 과학농법을 비판하고 자연관과 세계관의 발상의 전환을 외친다.


세계 여러나라의 초청으로 미국등지에서 무의 철학과 자연농법을 강연하여 많은 호응을 받고 2번째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자연으로 돌아가는길”을 발표한다. 그를 따르는 젊은이와 함께 현대의 노자라 불리우며 고향의 산으로 돌아가 은둔의 원시적 삶을 살며 가끔은 산에서 논밭으로 내려와 전세계에서 몰려온 젊은이와 대화하며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짖는다. 1994년농업부분 막사이상을 수상하게된다. 50여년이 지난 어느날 선생은 신과 멀어진 자신을 발견하고 깊은 산속에서 은둔의 생활을 시작한다.

 

빛고운 어느날 “나는 죽을 때까지 씨뿌리는 사람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본향인 자연으로 영원히 돌아가셨다. 선생의 자연농법은 구도자적 수행의 삶 그 자체엿다. 신을 보고 듣고 느끼고 만나는 방편이였다. 자연에서 생명의 농법을 깨우치고 자연농법울 통해 신과 하나 되었다. 자연농법은 신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선생의 무한한 사랑이였다.

 


생명의 자연농법3 - 자연농법의 필요성

 

인류가 욕망의 길을 이대로 계속 질주한다면 머지 않아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46억년의 긴 세월동안 형성된 지구는 불과 200년의 짧은 기간에 인간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반자연적 현상은 멈출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인류의 문명은 자연을 희생시켜 구축되었다. 그로 인해 인간의 몸과 마음은 병들고 허상과 허구의 문명은 인류를 지구 최후의 멸종 할수밖에 없는 동물로 전락시켰다. 그것도 지구를 멸망시킨 부끄러운 오명을 남긴 채......

 

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약탈 행위는 결국 자원의 고갈과 식량위기의 형태로 나타나면서 인류의 미래에 불길한 그림자를 던지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無知(무지)하다”에서 출발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단언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무지를 알지 못하고인간과 대립되는 외부 세계와 자연을 인간의 뜻대로 지배해도 된다는 근대과학 문명의 기초를 구축했다. 이러한 무지의 착오는 허구와 지식만 확대해서 허구의 현대문명이라는 자타 相剋(상극)의 꽃을 피워왔다. 그 최대의 과오는 神(신) 자체인 자연을 단순한 물질의 가치로 하락시킨 것이다. 서양종교의 경전에서도 인간의 조상 아담이 지식의 열매를 먹음으로 선악의 분별이 생기고 그의 신에 의해 에덴에서 추방된다. 동양 붓다의 경전에서도 인간의 분별적 지식은 無明(무명)의 지혜 곧 무지라고 부정하고 있다.

 

과학이 자연을 해체해서 세포속의 DNA를 파헤친다 해도 생명의 근원과 의미는 알길이 없다. 의학은 과학과 메스로 인간을 고통속에서 오래 사는 생명의 연장은 할지라도 인간이 웃으면서 기뻐하며 자연사로 죽을 수 있는 길은 알길이 없다. 의사가 먼저 알아야할 것은 죽음의 고뇌외 생의 목적은 육체의 생과 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름다운 꽃을 조각조각 해체했을 때 생명의 아름다움은 파괴되고 사라져 버린다. 물을 단순히 H2O라고 정의 해버리는 순간 물의 精(정)은 사라져 버린다. 예술가는 자신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 그림자를 ?고 과학자는 껍질에 지나지 않는 자연의 형태를 해체하는 것으로 오만에 빠져있다. 그들은 자연과 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연을 이용하고 희생시키며 그위에 모래위의 문명을 쌓아왔다. 자연의 붕괴가 지구의 파멸이며 인류의 자살행위임을 알면서도 신과 자연에 등을 돌린채 질주하고 있다.

 

자연농법은 생명의 농법이며 인류 미래의 유일한 대안이다. 자연농법은 인위적 지식과 행위를 버리고 無爲(무위)의 자연에게 맏기는 농법이며, 신의 대지에 봉사하는 방편이다. 神과 만날 수 있는 門이다.

 


 

생명의 자연농법4 - 자연농법의 개요와 일체무용론

 

一切無用(일체무용)의 농사법


클로우버 속에서 벼와 보리가 함께 자란다고 하면 대부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일체무용이라하면 필요없는 인력의 낭비를 하지않는 것이다.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않고 벼나 보리.채소 과일들을 수확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 농사를 짖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것이 핵심이다.


지상의 모든 식물은 땅을 갈지 않아도 힘차게 싹을 틔우고 힘차게 자란다. 쟁기로 갈지 않아도 미생물들과 작은 땅속의 동물들이 논밭을 갈아주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논밭을 경운기와 화학비료가 죽이고 여름내내 물을 깊이대서 뿌리를 썩게만든다. 그결과 벼는 허약해저 농약과 비료를 필요로한다. 반년전에 논바닥에 볍짚을 깔아주기만하면따로 고생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산속의 흙은 해마다 비옥해져 간다. 자연에는 生도 死도 없다. 잡초도 없고 해충도 없다. 산의 나무들은 그렇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인간이 기계톱을 들이대지만 않느다면......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자연을 살리수도 죽일수도 없음을 깨달아야한다. 과학과 지식과 행위는 전혀 무용하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자연농법의 개요.


여기는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조금 높은 언덕의 귤밭이다. 산에는 오두막이 두채있다. 도회지에서 온 젊은이들이 원시적 생활을 하고 있다. 전기와 수도도 없으며 현미와 채식 중심의 식사를 자급자족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생활비는 거의 들지 않는다. 도시생활과 종교에 절망한 젊은이들이 반바지 하나로 논두렁을 기어다니며 농사를 짓는다. 젊은날 파랑새를 찾아 헤메다가 결국 속세와 격리된 산속의 오두막에서 자연농법에 따라 300평 정도의 농부실습을 하고 있다. 자연농법에 의해 조성된 귤밭에는 재래종 닭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클로우버 속에는 들풀처럼 자라라는 채소가 무성하다. 산위로 올라가면 멀리 평야가 보이는데 보리가 푸르고 유채와 자운영이 피어나는 목가적 풍경은 이미 사라지고 황무지가 된 논과 밭에는 썩어가는 짚더미만 보인다. 그 속에서도 우리의 젊은이들이 자연농법으로 농사짓는 논밭은 초록으로 선명하다. 


이 논과 밭은 30년동안 한번도 땅을 갈지 않았다. 화학비료를 준적도 없고 농약을 뿌린적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않는 농법이지만 이것만으로도 30평당 600KG의 쌀을 수확했다. 1톤이 목표이다. 자연농법은 간단하고 분명하다. 가을에 벼를 베기전에 벼 이삭위의 고랑에 클로우버 씨앗과 보리씨앗을 뿌려 놓는다. 그런후 몇센치미터로 자란 보리를 밟으며 벼를베고 사흘쯤 말린다음 탈곡을한다. 이때 나온 짚은 모두 그대로 논바닥에 뿌려 놓고 닭똥이 있으면 그위에 뿌려 놓는다. 정월이 되기전에 볍씨를 흙과함께 경단을 만든후 짚위에 뿌려 놓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전부이다. 보리를 벨때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수확할 때 300평당 2인정도의 일손이면 충분하다. 5월 중순 보리를 벨때는 발밑에 크로우버가 무성하고 그 속에 있는 흙경단속에는 볍씨가 ?을 틔우고 있다. 보리를 베고 탈곡을 마치면 거기서 나온 보리짚은 모두 논바닥에 뿌려준다. 그런 다음 논두렁을 손보고 4-5일동안 물을 대주면 클로우버는 약해지고 경단속의 볍씨가 싹을 튀우고 올라온다. 그다음 6-7개월동안은 물을대지 않은 채로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 8월이되면 7-10일 마다 물을 대었다가 빼주면 된다.


 

자연농법5 - 자연농법과 과학농법

 

농업의 본래 모습인 자연농법은 無爲自然(무위자연)의 손도 대지 않는 達磨農法(달마농법:일본의 달마인형은 손과 발이 없다)이다. 엄격한 자율성으로 흙은 흙, 풀은풀, 벌레의 일은 벌레에게 맡기는 자연순리의 농법이다. 논에는 거미와 개구리가 활동하고 하늘에는 빨간 고추잠자리와 나비가 떼지어 나는 자연현상을 자세히 관찰하여 보라. 벼멸구가 많이 발생하면 반드시 거미 새끼가 쏟아질 정도로 발생하여 먹어치운다. 이렇게 우리가 해충이라고 부르는 곤충들도 천적이라는 자연현상으로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자연농업은 근원적으로 자연관적 철학을 바탕으로 둔 것이기 때문에 세월과 상관없이 가장오랜된 농법인과 동 시에 가장새로운 미래의 대안적 농법이다.

 

과학농법은 인간의 욕망이 확대됨에 따라 자연으로부터 이탈하는 遠心的(원심적) 확산의 농업으로 휴식이 없는 자멸의 농법이다.

기계화로 작업능률을 올린다고 하지만 줄어진 노동시간은 농기계을 사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농부는 또다른 노동을 하여야 한다.

기름을 사기위해 도시의 막노동판에서 중노동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과학농법이란 인간의 지식과 힘을 자연에 가하는 농법으로 인간이 주체이며 자연을 이용하여 얻으려는 물리적 농사법이다.

 

이에 반에 자연농법은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無爲(무위)의 또렷한 목표를 가진 求心的(구심적) 수렴의 농법이다. 無(무)의 철학으로부터 출발하여 無爲(무위)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歸然(귀연)의 농법이다. 자연이 주체로서 자연이 농작물을 기르고 인간은 자연의 이치를 배워나가는 것에 지나지 안는다. 최종적으로 자연의 순리,이치,조화,질서의 세계속에서 참얼을 찾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無爲(무위)가 출발점이고 과정과 수단이며 결과이다. 느리고 한가로운 求道的(구도적) 농부의 길이다. 땅을 갈지 않고 비료나 퇴비를 안주며 농약을 안 치고 잡초를 뽑지 않는 불경기,무비료,무농약,무제초의 4무농법이 원리이고 원칙이다.


인간은 무지하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신이 무엇인지, 자연이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신은 없으며, 자연은 이용할 수 있으며 인간은 생각하는 만물의 영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과학적 지식을 과신하게 되었다. 인간이 물질문명으로 이룩한 거대한 도시와 기계문명은 치열한 생존경쟁을 유발하고 인간을 부품화했으며 그로 인하여 정신은 황폐해졌고 인체는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자연의 약탈 행위는 기후변화, 자원고갈, 식량위기, 석유전쟁의 형태로 나타나면서 인류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로 인해 자연에서 이탈하여 도시의 공허에 고립된 인간은 생명의 얼을 잃어버리고 육체는 지치고 병들어 갈 뿐이다. 인간은 한 잎의 이파리, 한 줌의 흙조차도 영원히 그 본질을 알지 못한다. 지구는 동물들과 미생물과 각종 식물들의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공동체이고 인간은 동물의 한 종에 지나지 않는다. 그 종들의 사이에는 먹이사슬,물질순환 등 끝없는 불생불멸의 유전이 계속되고 있다. 이 순환계를 인간은 분별하여 분해하고 파괴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파멸의 길인지 잘 모른다. 


가령, 비닐 온실 속에 귤이나 딸기를 심어놓고 온갖 농약을 뿌려 곤충들과 미생물을 전멸시켜 놓고는 인간이 붓으로 꽃가루를 칠해 수정을 시킨다. 산에서 자생하는 온갖 나무들을 무차별적으로 벌목하고 피톤치트가 많이 나온다고 삼나무를 심고 목재로 돈이 되는 소나무를 심는다. 그 인공 식목의 숲에는 다른 식물들이 살아남지 못하고 생태계는 무너지고 만다. 활엽수가 사라진 숲에는 벌레들이 살지 못하고 그로인해 새들이 사라지고 새들이 사라지면 장수하늘소가 번성하여 소나무를 죽이는 선충을 만들고 인간은 다시 소나무에 구멍을 뚫어 살충제를 집어넣는다. 산림청은 해마다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소나무에 구멍을 뚫고 살충제를 집아넣고 항공기로 뿌린다. 이로 인해 꿀벌들과 곤충등 곤충이 사라지면 소나무는 더욱더 병들고,더욱더 강력하게 방제하고의 악순환을 국민의 새금으로 축내고 있다. 이러한 생태계의 교란과 파괴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어리석음을 자행하고 있다. 


인간은 절대 자연을 지배할수 없다. 그 지배에 의한 자연의 파괴는 자연의 자기회복과 치유의 가공할 보복으로 인간에게 되돌아 오고 있다. 온난화로인한 인한 태풍,폭우,폭설,사막화 그리고 생태의 파괴로 인한 돌연변이의 바이러스들은 각종 괴질들로 인간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무너진 농업


옛날의 농부는 가난하고 천하고 착취당하는 피지배의 위치에서 살았다. 그들이 그러한 삶을 이어간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깊은 산자락 눈덮힌 두메의 산골에서 살던 농부들은 모두 대 자연속에서 자급자족하고 남으면 이웃과 나누면서 고고한 삶을 영위하다가 이름도 말도 없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대자연의 일원이였고 신의 정원을 가꾸는 보람의 나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 했으리라. 해가 뜨면 들에나가 일하고 해가지면 쉴 수 있는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날이면 날마다 좋은 날이였다. 매일매일이 영원한 생명의 한 아름다운 순간순간 이였다. 아무 것도 바라지않고, 아무것에도 침해당하지 않고, 아무것도 해치지않는 無爲自然(무위자연)의 삶이였다. 속세를 벗어난 세계의 은자들이었고 그들이 모여 은자의 마을을 이루어 대도의 길을 걸었다.

대도의 길을 간다는 의식조차 없이 대도를 터득한 이들이 옛날의 농부들이였다.

 

삶도 모르고 죽음도 모르면서도 알고있는 삶을 살았다. 그러기에 생사의 의심도 근심도 없이,배움도 학문도 道(도)의 구함도 없는 無學(무학)의 자연적 삶을 살아냈다. 그들에게는 철학을 배울 틈도 필요도 없으면서 최고의 지순한 철학이 있었다. “철학은 필요없다”는 철학이였다. 철학이 필요없는 철인들의 사회 그것이 옛농민이며 농촌이였다. 그들이 오랜세월 인간의 영원한 고향으로 인간의 모태로 끈질긴 삶을 지탱해온 저력은 일체가 필요없다는 無(무)의 철학이였다. 그들의 살아냄이 곧 철학이였고 신으로 향하는 길이였기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불과 20-3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산에는 전기톱의 굉음이 울리고 논밭에는 트렉터와 이양기와 탈곡기가 달리고 공장같이 길게 늘어선 비닐하우스는 엄청난 화석연료를 태우며 철도없이 채소들을 생산하고 있다. 밤이면 오순도순 모여 이야기 나누던 화롯불은 사라지고 젊은이들은 경쟁적으로 도시로도시로 떠나갔다. 아기들의 웃음소리는 사라진지 오래다. 홀로남은 노인들은 농기계 대여료와 농약,비료값을 대느라 허리가 휘고 부채는 점점 늘어만 간다. 농민과 농촌을 지탱하던 無(무)의 철학은 마음을 녹여주던 화롯불과 함께 영원히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우리의 농업은 그렇게 무너지고 있다.

 

도시인들의 주식이 서구화된 육식위로 바뀐 것은 이미 오래다. 그 고기를 충당하기위해 엄청난 곡류와 풀이 필요하고 사료의 대량생산을 위해 해마다 제초제와 농약의 사용은 늘어만 간다. 수많은 가축떼들은 드넓은 들판의 자연생태계를 파괴하고 황폐화 시킨다. 땅은 견디지 못해 황폐화 하여 사막화가 진행중이다. 그러한 사막화를 보는 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육식 국가들에서 보기란 어렵지 않다.

 

대량생산을 위해 종이다른 식물간의 유전자 조작과 조합은 무시무시하게 큰 슈퍼 곡물,채소,과일들을 생산하고 유전자의 조합은 동물과 곤충에게도 적용되어 벌과 파리의 조합인 괴곤충과 여우와 너구리의 혼혈동물이 태어 날 날이 멀지 않았다. 인간도 배양기 속에서 배양되고 인조 영양공급장치가 부착된 보육기에서 사육될 날이 멀지 않다. 이러한 종간의 교란은 어떤 모양으로 인간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와 어떠한 재앙을 가져올지 아무도 예측조차할 수 없다. 지상의 생물과 무생물을 인간의 멋대로 바꾸고 새로운 생물을 창조했다 할 지라도 그것은 한계를 들어낼 것이고 그것들에 의해 인간은 멸망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젊은 농부들은 밀폐된 공간의 공장에서 과학의 조수인 한낱 노동자로 전락해 간지 오래다. 농부가 자신의 어머니인 자연을 버리고 욕망을 따를 때, 도시의 소비자가 생명의 양식을 영양학적 식품으로 전략 시킬때, 위정자들이 농민을 우습게보고 부담으로 여길 때, 과학과 지식인들이 자연을 실험의 대상으로 볼 때, 실업가들이 자연을 치부를 위한 개발수단으로 볼 때, 자연은 인간에게 죽음으로 반응할 것이다. 자연은 이미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잃어버린 옛 농부의 “없음의 철학”이 무너진 농업의 토양에 씨뿌림되여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자연농법이 확립되고 확산하는 일에 한가닥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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