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강연회]“다윈과 『종의 기원』을 제대로 알면 근사한 세계가 펼쳐진다” - 『종의 기원』 박성관
인간은 결코 유일하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이 세상의 비밀은 거룩한 기원에 있지 않다.
지난해 2009년. 다윈과 링컨은 탄생 200주년이라고 떠들썩했다. 1809년 2월12일, 한날 태어난 두 사람. 우리나라에선 그들의 위상이 영미 같지 않아서인지,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되진 않았지만,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언론 등을 통해 상당히 나왔다. 특히, 다윈은『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과 맞물려 책이 지닌 의미와 위상 등도 많이 언급됐다.
출처:<채널예스>(http://ch.yes24.com/Article/View/16113)
일시:2010. 07. 09
어쩌다 생일이 같았을 뿐이었다. 어떤 연관성이나 필연 따윈 없다. 그럼에도 가장 보통의 인간에겐, 단지 위인들과 생일이 같다는 것도 사소한 위안이 된다. 별 볼일 없는 가장 보통의 남자인 내게도 그렇다. 다윈, 링컨, 예니(마르크스, 카를 마르크스의 아내)와 나는 생일이 같다. 더구나 그들은 의도야 어쨌든,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진화시킨 해방의 파수꾼들 아닌가. 나도 뭔가를 해방시키고 싶었다. 그래봤자, 내 몸과 마음을 세상의 흉포한 율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밖에 더하겠느냐마는, 가장 보통의 인간에겐 그것만으로도 벅차고 뿌듯한 일이고.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해방시켰느냐. 내가 알고 있던 얄팍한 지식을 들이대자면, 다윈은 창조론에 포박된 기독교적 세계관과 관념에서 인류를 해방시켰으며, 링컨은 아프리카계 아메리칸을 노예에서 해방시켰고, 예니는 남편인 카를을 도와 계급적 사유에 익숙하지 못한 인류의 사고를 해방시켰다. 직간접적으로 나는 그 해방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지난해 2009년. 다윈과 링컨은 탄생 200주년이라고 떠들썩했다. 1809년 2월12일, 한날 태어난 두 사람. 우리나라에선 그들의 위상이 영미 같지 않아서인지,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되진 않았지만,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언론 등을 통해 상당히 나왔다. 특히, 다윈은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과 맞물려 책이 지닌 의미와 위상 등도 많이 언급됐다.
하지만, 많은 우리는 『종의 기원』을 들출 생각까진 않는다. 숱한 경로를 통해 『종의 기원』이 진화론 주창서라고 알고 있고, 진화론이 대세인 마당에 굳이 책까지 들춰볼 엄두를 낼 턱이 없다. 우리가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어떤 오류. 보지도 않았으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실제로 읽어보면 문장은 평이하기 이를 데 없고, 게다가 난해한 구절도 없으며, 심지어 무슨 전문 용어들로 범벅인 책도 아니다. 문장이 좀 길다는 점을 빼고는 고전 중에서도 가장 쉬운 책 중의 하나다. (…) 그런데 왜 사람들은 『종의 기원』을 (거의) 읽지 않는 것일까? (…)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진화론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현대 과학이 다 증명해 놓은 이론을 구태여 150년 전의 책까지 먼지 털어 가며 읽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p.11)
그러니, 이 말이 솔깃할 수 있겠다. “다윈의 현재성과 불온성을 되살린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윈과 『종의 기원』의 다윈이 어떻게 다른가? 창조론과 자신이 살던 시대의 진화론 모두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다윈의 참모습을 통해 새로운 자연학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다윈과 사랑에 빠진 인문학 연구자 박성관과 함께 읽는 다윈의 『종의 기원』.”
호기심 작렬이다. 나와 생일이 같은 다윈, 제대로 알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다녀왔다. 지난 5월 27일 서울 동교동 그린비출판사를 찾았다.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박성관 지음|그린비 펴냄) 출간 기념 저자 특강이 있던 자리. 박성관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보는 다윈. 다윈 그리고 『종의 기원』, 널 다시 보게 됐어. 물론 제대로 알게 됐다고 말하기엔 한참 미약하지만, 기존의 관념을 깨부쉈던 박성관의 특강. 이 또한 흥미진진하지 않았겠는가. 다윈, 누구냐, 넌. 『종의 기원』, 어떤 책이냐, 넌.
다윈 가라사대. “바보들을 빼면 인간의 지능은 별 차이가 없다고 늘 생각해왔다.” 나나 당신이나 바보가 아니라면, 다윈과 우리, 지능 차이 별로 없는 인간일 테니, 어려워 마시라. 박성관 가라사대. “다윈은 150년 전, 온몸으로 하는 생각을 해보자고 제안한 거다.” 새로운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질문이렷다. 당신도 할 수 있고 생일이 같은 나도 언젠가는 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이날의 특강을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종의 기원』, 리라이팅의 이유
우선, 『종의 기원』. 1859년 11월 첫 출간된 원서는 499쪽(요즘 판형으로는 800~900페이지)에 이른단다. 1,250부를 찍었는데, 2백몇 부를 다윈이 샀단다. 땅 투기도 하던 부자 다윈이었다. “다윈은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으로도 꼽힐 거다. 정말로 친절하고 온화하다.”
『종의 기원』은 다윈 생전 6판까지 찍었다.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몇 년에 한 번씩 개정판을 냈다. 유럽을 점령한 다윈 이론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쏟아져 나온 탓이란다. 당대 생판 ‘듣보잡’이었던 자연선택설에 대한 연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잘 된 이유였다. 그러다보니, 1판에서 6판까지 차이가 무려, 76%. 박성관 왈, “이게 차이냐. 다른 책이지.(웃음)”
다윈,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거나 잘못 알려진 것이 엄청 많다. 그 가운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평생 건강이 나빠 하루 2~3시간밖에 활동할 짬이 없었다는 것. 그런데 책 20권을 냈다는 것. 놀랍다. 더 놀라운 것 알려줄까? 그냥 책도 아니요, 모두 연구서란다. 그걸 2판, 3판, …, 6판까지 냈다니. 미친 것 아냐?
“그런 책들을 쓴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교양으로서 다윈을 아는 것은 삶에 큰 변화를 주지 못한다. 무의미하다. 우리의 생각 전체를 바꾸려 한 건데, 실제로 많이 바꿨다. 그런데 그것을 근대인들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것으로 바꿨다. 작년이 탄생 200주년이었는데, 여러분 삶에 변화가 있었나? 딱 하나, ‘언젠가는 읽어야 하는데…….’(웃음) 이런 건, 살아 있는 고전이 아니다. 표창처럼 가슴에 와서 물음표나 느낌표가 박혀야 한다. 그래야 살아 있는 건데, 작년에 아무것도 없었잖아. 살아 있지 않으니까. 그래서 내가 다윈을 살리려고 이 책을 썼다.”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은 그런 책이란다. 기존의 것을 반대로 뒤집는. 그는 자신한다. “지금의 자연과학 기준으로 하면, 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의 자연과학, 세계를 바꾸려고 이 책을 썼다. 진짜다. 수사가 아니고. 나를 바꾸고 여러분을 바꾸고, 이 세계를 바꾸기 위해. 나는 다윈을 통해 한 세상을 봤다.”
박성관의 리라이팅이 의도한 바는 ‘공생’이다. 『피터 래빗 이야기』의 저자 비아트릭스 포터에 대한 이야기가 『공생, 그 아름다운 공존』에 나온다. 화가이자 생물학자인 포터의 그림은 얼핏 보면, 지저분하단다. 뿌연 이끼 등이 있어서. 그러나 핵심은 뿌옇게 한 것인데, 편집자가 그것을 깨끗이 지우는 ‘오류’를 범해서 나온 것이 『피터 래빗 이야기』. “포터의 핵심은 뿌옇게 칠한 그것이었다. 그 생물들. 우리가 생물이라고 일컫지도 않는!”
다윈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박성관의 설명. 생물학 교과서에 나온 상리공생, 편리공생. 그것은 공생을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본 무엇. “이 책 쓴 이유 중 하나는 이 점을 꼬집기 위함이다. 경쟁이고 협동이고, 모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다. 부르주아도 협동은 바란다. 이익이 된다면. 진짜 공생은 그런 게 아니다. 지금 우리는 공생을 사유할 수 없게 돼 있다. 더 큰 나를 구성하는 것을 협동이라고, 공생이라고 생각한다. 이익을 주고받는 거. 그 외에는 상상을 못한다. 이익 빼고는 상상조차 못한다. 부르주아는 그래서 이를, 생존경쟁이라고 바꿨다.”
고로, 다윈이 말한 것은 생존경쟁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분투! 자연은 선택으로 충만했기에 다윈은 이를 ‘자연선택’이라고 썼다. 그러나 해석한 이들이 이를 ‘자연도태’로 바꿨다. 적자생존? 그것은 전혀 다른 말. “그것이 다윈의 얘기와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썼다. 원전을 갖고 대조하면서 그걸 보여줬다. 읽고 나면 부르주아 근대인들이 왜 다윈을 은폐할 수밖에 없었는지, 새로운 눈을 갖게 하는 것이 책을 쓴 목적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기존의 창조론적 과학자들과 진화론자들 모두에 대한 공격이었다. (…) 다윈이 넘어서야 했던 논적이 창조론뿐만 아리라 진화론, 즉 당대의 모든 박물학자들이었다는 것을 깊이 유념한다면, 다윈이 왜 그렇게 발표를 지연했는지, 또한 『종의 기원』을 출간하는 시점에 가서도 왜 자신의 책이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초본’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pp.33~34)
자연선택, 제대로 알고 있는가
다윈의 『종의 기원』의 핵심은 자연선택이다. 우월한 것이 남고, 열등한 것이 도태되는 건 자연도태일 뿐, 자연선택이 아니다. 다윈은 그런 측면도 있지만, 자연선택은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자연계라는 야생에도 선택이라는 작용이 있다. 또 하나는 자연스러운 선택. “다윈 당대에 주변에서는 자연선택을 적자생존으로 바꾸라고 말했는데, 그는 안 바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적자생존으로 해석했다. 사람들은 싫어했다. 자연선택이 신비주의라면서.”
박성관이 말하고자 하는 것, ‘자연이란 무엇인가’. 자연의 반대 개념으로 문화를 들먹이지만, 그것 또한 우리의 편견이란다. “있는 그대로가 자연이고, 목적을 갖고 변경을 가하면 문화라고 한다. 식물에게 문화가 있나? 지렁이에겐 문화가 있나? 없다고 그러잖나. 그런 태도가 잘못됐다. 내가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문화라는 것도 자연스러운 활동 중의 하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거다. 어떤 잔인하고 위대한 일도 그만한 이유와 까닭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고, 문화도 그렇다.”
말인즉슨, 이분법 타파하기. 가령, 생물-무생물 나누기. 이걸 어떻게 나눌 수 있냐는 거다. 책 부제에 생명의 다양성, 운운했지만,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생명이 아닌 세계의 다양성이란다.
“예전에는 무생물을 생물과 이 정도까지 대립시키지 않았다. 의자에도 영혼이 있다고 했다. 근본적 차이가 없고, 정도의 차이라는 거지. 식물도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다만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 모든 것이 백인 남성에서 출발했다. 과장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그랬다. 고릴라 지능을 4세의 지능이라고 하잖나. 놀라운 건, 인간만을 척도로 하는 그 척도가 없는 한 과학연구가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박성관은 주장한다. 인간이라는 척도 없이 과학은 불가능하다. 동물실험도 그렇고. 생물과 무생물을 구별하는 지금 과학자들의 카드패는 버려야 한단다. 다윈은 이걸 넘어섰다. 생물-무생물 구분이 아닌, 공통 조상의 후손이라는 것. 주체(개체)와 환경을 깨는 것.
그러나 인간중심주의에 사로잡힌 부르주아들은 이것을 자기 식대로 해석했다. ‘아, 그럼 인간이 가장 진화했다는 얘기지?’ “침팬지와 사람은 유전자를 보면, 1~2% 차이밖에 안 난다. 그러면 상식적인 사람, 합리적인 안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인간이 우월하지 않구나.’ 몇 년 전 생물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며, 인간게놈프로젝트를 했는데,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러면, 결론이 뭔가. 하나, DNA가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구나. 둘, 인간과 침팬지는 큰 차이가 없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인간이 끝까지 우월하고 싶었던 앙탈(?)이었다고 할까. “다윈은 인간과 지우개, 민들레, 거북이가 공통조상의 후손이라고 말했는데, 과학자들 인정하지 않는다. 도그마다. 그 구조 자체가 도그마로 돼 있다. 지금의 과학은 인간중심주의가 없으면 작동을 못 하게 돼 있다. 그래서 인간게놈프로젝트도 DNA가 중요하다고 해 놓고선, 결론이 그렇지 않으니까, 이 중에 뭐가 발현되는지가 중요하구나, 이게 생물학자들의 결론이었다. 어떤 결론이 나와도 안 바뀐다. 양파가 인간보다 유전자가 훨씬 많은데, 그래서 역시 DNA가 중요하지 않았어, 라고 말한다.”
인간을 척도로 한 다양한 이분법 구상은 결국, 백인 남성의 우월함을 계속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전형적인 미국인 내러티브. 그 이분법은 또한 이런 것이다. 동식물의 차이에 대한 통념을 보자면, 동물은 이동을 하고, 식물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다윈은 『식물의 운동력』을 통해 식물이 동물보다 더 많이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줬다. 도구를 이용한다고 해서 호모 파베르(도구의 인간)라고 일컫지만 제인 구달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인간만이 아님을 알려줬다.
“우리 인간의 핵심 중 하나가 선택인데, 선택을 확실히 하는 존재가 신이다. 그래서 선택이라는 말이 핵심이다. 다윈이 자연선택을 버리지 않은 이유가 신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택이라고 하면 주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주체가 없이도 주체 중의 최고라는 하는 신보다 더 훌륭하고 풍부한 선택효과가 발생한다고 했을 때, 다윈은 전율했다. 그래서 자연선택이라는 말을 썼다. 20여 년을 연구하면서 가장 집중한 것이 언어 문제였다. 생물을 얘기할 때, 거주자, 출생지, 이런 단어를 일부러 썼다. 인간이라는 단어는 500페이지 동안 딱 두 번 잠깐의 예로, 썼을 뿐, 전혀 쓰지 않았다. 그걸 쓰면 과학자들이 반대하니까. 다윈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공격은 아직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사상의 불온함, 혁명성은 꺼지지 않았다. 그래서 부르주아들이 『종의 기원』을 못 읽게 만들고 재미없게 만들었다.(웃음)”
인간은 결코 유일하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이 세상의 비밀은 거룩한 기원에 있지 않다는 다윈의 메시지는 유폐되었다. 지난 150년간 부르주아들(혹은 근대인들)은 다윈의 생각을 근대적 메스로 끊임없이 수술하고 성형하였다. 우선 다윈의 과학 비판은 종교 비판으로 협소화시켰다. 자연선택은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으로 변형시켰고 생존투쟁과 상호의존은 생존경쟁으로 바꿔쳐 버렸다. 그리하여 다윈은 종교비판가이자 부르주아적 가치의 대변자로 타락했다. 우리가 아는 다윈이 탄생한 것이다.(pp.17~18)
과학개혁이 필요한 이유
박성관이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과학이다. 정확하게는 대중과 유리된 과학. 과거 『종의 기원』은 누구나 읽을 수 있었다. 과학자라고 읽거나 과학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고. 굳이 철학, 문학, 과학…… 이런 식으로 나눠서 습득하지 않았다. 이렇게 나뉜 것은 100년도 되지 않는단다.
“과학개혁이 필요하다. 소설이 재미없으면 소설가를 욕하면서 과학책이 재미없으면 왜 스스로를 욕하나.(웃음) 지금 과학이 왜 중요해졌느냐면 종말론 때문이다. 르네톰이 한 말이다. 20~21세기의 종말론은 다 과학에서 나왔다. 주류과학과 서구적 내러티브에 지배되고 있는 거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상식의 회복이고, 과학을 신주단지 모시듯 해서 이해시켜 달라고 하면, 그건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외우지 말고 토론해야 한다. 문학이나 철학은,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며 이견도 제시하는데, 과학은 왜 그러느냐고 묻지 않고,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불쾌감을 느낄 수 있고, 이야기가 정말 사실이냐고 물어야 한다. 철학이나 문학은 묻는데, 과학은 묻지 않고 이해시켜 달라고 한다. 그게 도그마다.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데, 진짜냐고 묻지 않고, 기독교인은 믿으려고 한다. 그게 도그마다.”
고로, 박성관 가라사대. “과학을 친구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까, 좀 똑똑한 친구. 설명해 달라고 해야 하고, 이해되게끔 책을 잘 쓰라고 말하고. 소설에 개연성이 없다고 말하듯, 과학에게도 그래야 한단다. “대중이 바뀌어야 과학이 바뀐다. 과학이 대중과 멀어지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채 안 됐다.”
『종의 기원』은 기독교에 대한 비판보다 과학자를 비판했다. 즉, 과학 비판서. 19세기만 해도 과학자들은 창조론자였다. 생물-무생물을 나누지 않았다. 그러니 생물학 따윈 없었다. 돌부터 모든 것이 연속성으로 이어질 뿐, 무생물이 없었다. “푸코의 『말과 사물』이 그래서 위대한 책이다. 나누지 않아야 앎을 구성할 수 있었다. 다윈은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1871)의 마지막 문장에서 이랬다. ‘인간은 자신의 몸에 흐르는 하등동물의 피를 흔적을 지울 수 없다.’”
다윈의 혁명은 아직 오지 않았다
150년 전에 당대의 세계와 모든 앎의 체계를 의문시했던 다윈은 사라져 버렸다. 나도 다윈처럼 내가 사는 세계와 앎의 체계에 의문을 품어 왔다. 그러던 차에 『종의 기원』을 만났고 거기서 다윈의 의문들과 불온성과 매력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새로운 과학을 가리키는 풍요로운 빛살이었다.(p.18)
다윈은 물리적 조건으로 설명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래서 혁명이었다. 하지만 다윈은 우리에게 온전히 오지 못했다. “혁명의 소식이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았다. 150년 간 목이 졸려 있다. 다윈은 창조론을 비판한 사람이라는 아이콘으로 만들어졌다. 다윈이 말한 것이 성선택이다. 다윈은 매력을 사고했다. 내가 그걸 무척 좋아하고 나의 주제이기도 한데, 진화는 매혹이다. 오해 마라. 자연과학자 얘기를 인문학적으로 매력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날씬한 여자를 선호한 것은 현대적인 현상이라는데, 아니다. 그래서 고전을 읽어야 한다. 고전을 보면 허리가 지금보다 더 심하게 가늘다.”
그러나 다윈은 알았을까? 자신의 이론이 미처 꽃을 피워 보기도 전에 핵심을 거세당하고 진화론이라는 결론만 덩그러니 남아 버릴 운명이었다는 것을. 그런데 운명이란 또 얼마나 기묘한 것인지, 그 흉한 모습이 완전 대박이었다. 기존의 과학에 대한 다윈의 비판은 잊혀지고 창조론과 맞짱 뜬 거인으로만 우뚝 서자 사람들은 더더욱 열광했다.(p.17)
다윈의 매혹이론에 따르면, 사슴뿔이 커진 것은 암컷이 뻑 갔기 때문이고, 곤충이 뻑 가서 아름다운 꽃이 생겨났다. 우리가 사슴뿔을 보고 뻑 가고, 꽃을 보고 뻑 가는 것은 우리도 동물이기 때문. “성선택이 뭐냐면 인간만이 특별하다는 근거가 없다는 거다. 언어, 도덕?사회, 예술 등이 인간과 동물을 차이라고 하고, (인간이 아닌) 동물에겐 사회가 없고, 우리만 법이 있다고 그러는데, 법이나 룰 없이 동물사회가 운영될 것 같나. 아니다. 걔네도 룰이 있다. 우리가 룰을 가진 이유는 걔네들과 동일한 이유다. 우리는 있는데, 얘들도 있을까, 가 아니다.”
박성관은 좀 더 예를 든다. 도덕관념? 약자에 대한 돌봄? 저축? 예술? 천만에. 그것은 인간이라는 동물만 가진 것, 아니다. 다른 동물에서도 이런 예는 얼마든지 발견된다. 예를 들어, 보노보(피그미침팬지)는 약자를 돌보고 프렌치키스를 나눈다. “미래를 생각해서 저축하라는데, 그건 부르주아에게만 좋은 거다. 우리가 저축한 돈은 자본가들이 쓴다. 그래서 저축하라는 거다. 있지도 않은 개미와 베짱이 얘기까지 하면서. 다윈은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에서 예술(이 인간에게만 있다는 것)을 깨려고 한다.”
다윈은 자연계 암컷과 수컷의 모양새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기록했다. 일일이 수컷이 아름다운지, 암컷이 아름다운지, 적어보니 9대1 수준으로 수컷이 아름다운 것이 많았단다. 왜 이런 것까지 했냐고? 이 세계에 생물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야 한다는 것. 그러니 책이 지루할 만도 했지만, 박성관은 이를 악물고 두 번을 읽었단다.
당대의 학자들은 매력과 실용을 나눌 수 없다며 다윈을 비판했다. 그렇다면 다윈은 매력에 빠지는 매혹의 순간을 어떻게 얘기했을까. 얼이 빠지거나 혼이 빠지는 것. 그것을 매혹의 순간으로 규정했다. 알고 있던 것과 달리 그 순간에 내가 바뀌는 그런 어떤 순간.
“선택이라는 말이 신학 용어라서 쓰기도 했지만, 암컷이 수컷을 보고 ‘아~’ 하는 순간, 즉 매혹의 순간이 있다. 기존의 심미안이 해체되면서 새로이 구성되는 순간이다. 강력하게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면 선택이 반복되겠지. 다윈은 이런 말을 했다. ‘미적인 표준이 수백, 수천 세대에 동일하게 적용돼서 2차 성징이 결정된다.’ 미적인 표준으로 일관되게 활동하는 것을 예술이라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우리는 예술을 인간만 한다고 말할 수 없다. 다윈은 인간이 공작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그릴 수 있냐고 되묻는다. 다른 과학자들은 매력이 과학적인 설명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윈을 비판했다. 생존에 도움이 되고 물리적 조건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 거다.”
다윈과 『종의 기원』이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
다시 말하지만, 다윈은 물리적 조건에 의존한 과학을 깨고자 했다. 또한 관계를 사유했다. 생물과 생물의 관계를 처음으로 사유한 사람이다. 모든 생물은 여러 마리이며, 다 다르다는 것. 털끝만한 차이가 생사를 가르며, 인간만 예술 한다는 것에 대한 비판. 다윈은 그렇게 함의가 풍부한 이야기를 끌어냈다. 『종의 기원』은 여전히 현대 생물학(자)과 대립하고 있다. 박성관이 『종의 기원』을 리라이팅한 것은, 『종의 기원』이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적인 근거를 들어’ 다윈의 진화론에 반대했다. 그래서 다윈은 13년 뒤인 1872년에 『종의 기원』 6판을 내면서 아예 한 장(章)을 새로 끼워 넣어 과학자들의 비판에 일일이 답해야 했다. 바로 이 상황, 당대의 창조론자와 과학자들의 이론을 다윈이 모두 비판해야만 했던 이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다윈 혁명’을 이해할 수 없다.(p.14)
우리는 ‘자연선택’을 제대로 알고 있었을까. 우리가 알고 있던 다윈과 『종의 기원』은 제대로일까. 박성관은, 부르주아들과 과학자들이 덧씌운 포장으로 우리는 왜곡된 다윈을 만났다. 창조론을 깬 아이콘으로만 박제될 다윈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직, 다윈이 본 세계의 근사함, 돈 엄청 들인 여행으로도 알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맛보지 못했다.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이 지났으면 어떠랴. 제대로 알았던 적도, 읽은 적도 없다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다윈과 만나는 것은 근사하고 멋진 신세계를 펼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혹시 아나. 그것이 당신의 세계를 전복시키거나 뒤흔들 혁명적인 모멘텀이 될지. 다윈과 연애를 계속 할 것이라는 박성관의 이야기가 기대되는 이유다.
『코스모스』의 저자이자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 가라사대. “인류는 우주 한 구석에 박힌 미물이었으나 이제 스스로를 인식할 줄 아는 존재로 이만큼 성장했다.” 그 말은, 인류는 이제야 똥오줌 가릴 줄 알게 됐다는 뜻일 텐데, 150년 전의 혁명적 사고를 제대로 독해하지 못하거나 부러 오독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아직 ‘미물’ 딱지를 떼기는 글렀다. 만물의 영장? 개뿔. 만물의 영장이 설쳐서 이 모양 이 꼴이라니. 어허, 통재라. 뭐, 그렇다고 좌절은 말고. 만물의 영장이 아닌 미물임을 인정한다면, 이 정도까지 온 게 어딘데. 다윈이 나왔듯, 당신도 다윈이 될 수 있다, 『종의 기원』이 있었듯, 『미물의 기원』도 어쩌면 기대해봄직. 그렇게 된다면, 가장 보통의 누군가는 당신과 생일이 같음에 괜한 우쭐함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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