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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문화예술

나윤선 - “소주나 막걸리와도 어울리는 음악, 바로 재즈”

by 내오랜꿈 2007.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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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나 막걸리와도 어울리는 음악, 바로 재즈” 
감미로운 목소리로 영혼을 울리는 재즈가수 나윤선
 

라인뉴스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동영상 편집 은지희 피디 eunpd@hani.co.kr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12-17 


» 낭만 흐르는 세밑 재즈의 향연-나윤선
“우연처럼 찾아온 재즈, 이제는 필연이라고 말해요.” 

‘재즈’ 하면 으레 소탈한 의상의 연주자가 넉넉한 웃음과 더불어 허스키한 중저음을 들려줄 것 같다. 그래서 재즈는 듣는 이에게 지나간 ‘옛사랑’의 추억을 끄집어내고, 눈가에 촉촉한 이슬이 맺히게 하는 힘을 가졌다고 한다. 

재즈가수 나윤선(38). 그는 이런 ‘상식’에서 한 발짝 비켜 서 있다. 몸집은 왜소하고, 목소리는 가늘다. 톤도 높다. 도통 재즈와 어울리지 목소리다. 그는 어떻게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재즈 보컬리스트가 되었을까? 나씨는 “재즈가 우연히 찾아왔다”고 말한다. 그는 프랑스 언론으로부터 “환희가 사라진 음악세계에 나타난 너무나 매력적인 목소리”라는 극찬을 받은 바 있다. 

그래서 그에겐 ‘한국보다 유럽에서 더 유명한’ 재즈보컬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는 올해 그런 ‘수식어’를 떼려고 작성한 듯하다. 어느 해보다 더 왕성하게 국내 활동을 펼쳤다. 올 4월 팝 음반 <메모리 레인(Memory Lane)>을 냈다. 11월부터는 대전·부천 등지의 문예회관을 도는 ‘팝 프로젝트 콘서트’를 성황리에 이어가고 있다. 이달 20~21일에는 세종M시어터(구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에서 ‘나윤선의 Another Christmas’ 콘서트를 한다. ‘천사 Paper Tiger’ ‘어린 물고기 Little Fish-Big World’ ‘그리고 별이 되다 Eternal Love’ 등 팝 프로젝트 앨범의 주요 곡들과 ‘Have Yourself A Merry Little in Love’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르눈 밤>으로 잘 알려진 ‘When I Fall in Love’ 영화 <러브 액추얼리> 삽입곡인 ‘Christmas is All Around’ 등 크리스마스를 풍성하게 해줄 음악들을 선사할 예정이다. 

콘서트를 앞두고 연습에 한창인 나윤선을 최근 홍대 인근에 위치한 녹음실에서 만났다. 

“재즈는 소주와 막걸리와 잘 어울리는 음악” 

“많은 이들이 재즈는 어렵고 고급스런 음악, 소수의 마니아층만 듣는 음악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아니에요. 서양음악이지만 정서적으로는 한국음악에 더 가깝죠. ‘있는 사람들의 음악’ ‘와인과 함께 듣는 음악’이라고들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소주나 막걸리 마시면서도 들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음악이 재즈죠.” 

나윤선에게 재즈는 ‘모든 것’이다. 모든 이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는, 그 무엇이어야 했다. 그래서 늘 같은 모습이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모습으로 새로움을 선사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그는 갖고 있다고 한다. ‘나윤선표 재즈’는 꾸준히 변화해야 하고, 새로워야 한다. 올해 낸 <메모리 레인>은 바로 그 노력의 결정체다. 조동익, 하림, 김정렬 같은 국내 포크 계열 작곡가들의 서정적인 곡들을, 처음으로 한국말로 녹음했다. 그의 목소리를 타고 흐르는 <세노야> 선율을 듣자면,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던 재즈가 귀에 착착 감겨온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어요. 재즈가 늘 무언가에서 벗어나 있는 음악이기도 하구요. 재즈와 팝의 결합은 다양한 음악을 하려는 제가 거쳐야 할 통과의례일 수밖에 없었죠. 재즈냐, 팝이냐. 대중성을 가미해 돈을 벌려고 한다거나 하는 비판도 있었어요. 하지만 전 우리나라의 주옥같은 곡들을 외국에 선보일 필요가 있다고 믿고 있어요.” 

그의 변신에 많은 이들이 ‘변심’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그의 실험은 일단 성공했다. ’재즈의 대중화’와 ’한국적 재즈’의 새로운 표준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응도 좋다. 그의 이번 음반은 극심한 음반불황 속에도 3만장 가까이 나갔다. 올해 엘지아트센터, 미국 링컨센터, 두산아트센터 개관 공연 등에서 팬들의 반응도 좋았다. 그의 얼굴에서 만족감이 묻어난 건 이런 이유일테다. 
“사실 한국적·대중적이라는 것, 장르를 구분 짓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을 수도 있어요. 제가 부른 <세노야>에 의외로 서양인들이 더 매료되고, 유럽 뮤지션들이 ‘음악이 너무 좋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음악이 달라졌다고 해서, 재즈라는 제 음악적 토대가 모두 사라지는 것도 아니구요.” 

 영혼을 울리는 감미로운 목소리 ‘재즈가수 나윤선’ 



회사 그만두고 뮤지컬 ‘지하철1호선’ 통해 음악과 만나 

그의 어릴적 꿈은 가수가 아니었다. 선생님이었다. 가수로 활동할 것이라고도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대학(건국대 불문과)을 졸업한 뒤 교사가 아닌 평범한 직장인의 길을 선택한 것은 ‘평범한’ 이로 살고자 하는 그의 작은 바람의 결과일 뿐이었다. “선생님이 맞지 않을 것 같아서”라는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직장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회사 홍보실에서 카피 쓰는 일이 어려워” 그만두기까지 고작 8개월이 전부다. 

회사를 그만두고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막막한 생활이 계속됐다. ‘백수’ 생활도 예상보다 길어졌다. 곁에 있던 한 친구가 이때 그를 부추겼다. ‘노래 잘하니 가수 한번 해보라고.’ “1년 가까이 백수생활을 했는데, 이때 제 친구가 ‘노래하라’고 조언했어요. 나이가 있으니, 클래식이 아닌 대중가요를 부르라는 것이었죠.” 

평소 라디오도 많이 들었고, 어린 시절 반에서 늘 꼽히는 노래 잘하는 아이였으니, 어쩌면 그에게 ‘음악’은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었을 터. 망설이는 그를 위해 이 친구가 대형사고(?)를 쳤다. 대학생시절 친구들과 장난삼아 만든 데모 테이프를 <지하철1호선> 제작자 김민기씨한테 보냈고, 김민기씨의 추천으로 1994년 <지하철1호선>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평범한 직장인 나윤선이 뮤지컬배우 나윤선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뮤지컬 배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그는 뮤지컬 배우에 머물지 않았다. 13년 전 그가 선 첫무대는 소극장이었고, 첫 작품인 <지하철1호선>에서 맡은 연변처녀 역이 주인공이었지만, 연기보다 노래의 비중이 높았다. 일인다역으로 무대를 누비는 설경구씨나 방은진씨를 볼 때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정명훈씨가 지휘하는 환경음악극 <오선월드> <번데기> 등 두 편의 뮤지컬에 더 출연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모두 연기력보다는 노래를 주로 부르는 역할이었어요. ‘뮤지컬 배우는 내가 갈 길이 아니구나’라는 생각만 더욱 확고해졌죠.” 

그가 본격 음악의 길을 가기 시작한 건 27살 때인 1995년이다. “그나마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음악을 찾아 프랑스 재즈학교(CIM)로 유학을 떠난다. 학교에서 재즈를 배우면서 샹송도 함께 배울 요량이었다. 

“음악에 관해 아는 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용감하게 유학을 감행할 수 있었어요. 처음엔 샹송에 관심이 더 많아 2년 정도 공부를 따로 했는데, 샹송은 배우면 배울수록 감수성과 정서에 대한 이질감만 커졌어요. 반면 재즈는 사랑 얘기를 다뤄서인지 감정적으로 교감이 느껴졌죠.” 그가 ‘재즈 가수’로 방향을 선회한 이유는 이처럼 단순했다. 

재즈를 향한 길은 쉽지 않았다. 목소리가 고민이었다. “미성이고, 톤이 높아 흑인들의 스윙감이 안 생길 것 같았어요. 허스키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담배를 하루 5갑 피워야 하느냐, 소리를 질러야 하느냐’고 선생님께 여쭤봤죠. 선생님은 네가 가진 목소리로 얼마든지 재즈를 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셨어요. 저처럼 가녀린 목소리로 노래하는 유럽 쪽 재즈 보컬도 들려주셔서 자신감을 얻게 됐죠.”

그는 프랑스 재즈학교(CIM) 외에 컨서버터리, 폴리포니학교 등 세 곳의 학교를 더 다니며 음악에 대한 깊이를 더했다. 늦바람이 난 셈이다. 친구들과 ‘나윤선퀸텟’이라는 밴드를 만들어 틈틈이 공연도 펼쳤다. 조금씩 입소문이 퍼졌고, <르몽드> 같은 유력 신문에 소개됐다. 유수의 재즈 콩쿠르에서 수상도 여러 차례 했다. 

“늘 노래를 불렀지만 ‘가수 나윤선’ 상상도 못해” 

“사실 전 교과서적인 인간이에요. 프랑스에서 정식 가수로 나섰지만 무대 앞에 서는 게 편하지는 않았어요. 제가 주목받을 수 있었던 건 아마 자그마한 체구의 동양여자가 부르는 재즈가 독특하게 보여서 그러지 않았을까요? 저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제 목소리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는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부모님의 후원도 포함된다. 그의 아버지는 나영수 한양대 음대 교수이고, 어머니는 뮤지컬 1세대인 성악가 김미정씨다. 음악가 가정의 부모는 딸의 뒤늦은 도전을 진심으로 격려했다. 

나씨는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고 있다. 또래 친구들 대부분은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로 살고 있다. 반면 현재 그에게 있어서는 재즈가 ‘애인’이자 ‘남편’이자 ‘자녀’다. 음악을 배우고, 무대에 서고 싶은 욕심 때문에 당분간 결혼도 접었다. “재즈는 ‘새로운 것을 찾는 자유로운 여행’이에요. 그래서 좋아요. 어릴 때부터 전 하지 말라고 하거나, 할 수 없을 것 같은 것이라면 지레 포기하곤 했는데, 재즈를 하면서 ‘해도 되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은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어요. 만약 목소리 때문에 재즈를 포기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겠죠.” 

무대에 선 그의 모습은 그래서, 그 누구보다 정열적이고 힘이 넘친다. 수줍은 소녀 같은 평소의 그의 모습을 무대에서만큼은 찾아볼 수 없다. “왜 이렇게 인상을 쓰고 노래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그것이 바로 ‘나윤선표 재즈’의 매력이다. 그가 뿌리는 마법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 앞으로의 바람을 물었다. “할 수 있을 때까지 무대에 서는 것”이라고 했다. 예순이 훨씬 넘어서도 30대 최고 전성기 때의 목소리와 색깔을 간직한 영국 재즈가수 노마 윈스턴처럼. “이변이 없는 한 노래는 꾸준히 할 겁니다. 10년, 20년 뒤에도 할 수 있으면 노래를 계속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제 목소리에 만족하지 않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그래도 다시 노래를 하고 싶습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한국 무대에도 더 자주 서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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