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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문화예술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by 내오랜꿈 2007.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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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시름 잊게 해준 세계인의 ‘성탄절 18번’
[세상을 바꾼 노래] ⑩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1942년)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2월 20일 



WHITE CHRISTMAS - Bing Crosby


»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1942년)

2차 세계대전이 미국에 끼친 여파는 물리적이라기보다 문화적인 것이었다. 진주만이 피폭당하기는 했지만 본토는 안전했고, 전시동원체제가 발동했지만 국내경제는 (다른 참전국들에 비해 월등히)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가장 잘 반영한 문화영역은 음악이었다. 스포츠 이벤트 등의 주요행사에 앞서 국가를 연주하는 일이 관례가 되었고, 이른바 유사국가 혹은 유사군가 형식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노래들이 대거 발표되었다. 어빙 벌린의 <갓 블레스 아메리카>는 가장 대표적인 곡이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기간을 통틀어 가장 큰 사랑을 받은 곡은 로맨틱한 발라드였다. 어빙 벌린이 만든 또 다른 노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그것이다. 얼핏 의외의 반응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마저도 전쟁 여파라는 동전의 다른 쪽 면이었다. 한데서 온기를 찾는 것은 본능이기 때문이다. 노래의 탄생배경부터가 그랬다. 벌린은 이 노래를 아리조나의 따뜻한 겨울 휴양지에서 작곡했다. “눈 쌓인 성탄절을 꿈꾸는” 서남부지역 사람들의, 비현실적이지만 낭만적인 상상에서 영감을 떠올린 것이다. 전장 군인들의 향수와 그들을 떠나 보낸 가족들의 애수가 크리스마스라는 상징적 접점에서 현실도피의 위안을 찾은 것도 당연하다. 

어빙 벌린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완성한 직후, “사상 최고의 노래를 썼다”고 자신했다. 그의 단언은, 적어도 상업적인 측면에서는,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거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 빙 크로스비다. 당대 최고의 엔터테이너였던 그는 이 곡을 크리스마스 캐롤의 신고전이자 (<버라이어티>의 표현에 따르면) 모든 음악분야를 통틀어 “가장 값비싼” 노래로 만들었다. 크로스비 버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엘튼 존의 <캔들 인 더 윈드 1997>을 따돌리고,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로 등재된 2008년판 ‘기네스북’의 기록은 그 증거인 셈이다. 

실제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누구보다 빙 크로스비(1903~1977)의 노래였다. 그는 1941년 크리스마스에 이 곡을 초연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 <홀리데이 인>(1942) 사운드트랙에서 처음 음반을 녹음했던 장본인이다.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히트차트 1위에 올랐고 이후 1945년과 1946년에도 차트 정상을 거듭 정복하며 크로스비의 인기를 정점에서 떠받쳤다. 한 가수가 같은 노래로 세 번이나 차트 1위에 오른, 역사상 유일한 경우다. 마치 운명과도 같은 관계였다. 크로스비가 참전 군인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군인들의 사기진작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당시 <빌보드>가 집계한 인기투표 결과에 따르면, 그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페리 코모를 비롯한 다른 스타들의 득표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표를 얻었다.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에는 사람들이 성탄절에 소원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가 당대의 인기 여가수(였으며 조지 클루니의 이모인) 로즈마리 클루니와 함께 주연한 동명영화(1954)는 그런 바람이 사람들을 변화시킨다고 얘기하는 동화다. 꿈을 꾸기에 너무 팍팍한 현실은 없다. 현실이 너무 팍팍하기에 꿈을 꾸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의 존재 이유는 어쩌면 그런 것인지 모른다.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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