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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그들만의 문학’…근대문학은 끝났다
근대문학의 종언은 맞는가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0 19근대문학의 종언은 맞는가
우리시대 지식논쟁 1. 왜 맞는가 이번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근대문학’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한다. 일본의 비평가이자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1941~)은 2005년 출간된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 b)에서 근대문학 곧 소설이 네이션(국민국가)의 기반이 되었다고 했다. 이전까지 감성적 오락을 위한 단순한 읽을거리였던 소설은 18세기, “감성에 대한 학문인 미학이 등장하면서 지위상승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감성과 감정이 지적·도덕적 능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으면서 상상력의 중요성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이는 상상력에 기반한 문학이 공감의 공동체 곧 ‘상상의 공동체’인 네이션(국민국가)의 토대가 되었다는 분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가라타니는 영화와 텔레비전·비디오 등 시각매체의 등장으로 근대소설의 특징인 ‘리얼리즘’의 가치가 제거되면서 근대문학의 특별한 의미가 이젠 끝났다고 선언한다.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상징으로 그는 1990년대 자신이 만났던 한국의 문예비평가들이 모두 문학에서 손을 떼었음을 상기시켰다. 가라타니의 이런 해석에 우리 문단 안팎에서 다양한 견해가 쏟아지고 있다. 이번 주 가라타니의 견해를 적극 받아들이는 조영일씨 글에 이어 최원식 인하대 교수가 비판적 견해를, 권성우 숙명여대 교수가 제3의 시각을 보여준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들은 대부분 ‘해결에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부함에의 저항’에 의해 해소된다. 아무리 절실한 문제제기라 할지라도, 정작 그것을 낳은 현실 쪽에서 보면 왠지 조급하고 점잖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위기감’이란 항상 현실을 앞서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은 괜찮다”라는 현실감각은 종종 본질적인 것으로까지 격상되곤 한다. 현실원리란 이처럼 위기의식을 ‘진부한 것’으로 배제하고, 자기보존적인 상식들을 ‘새로운 것’으로 삼아 자가발전하는 현상 유지 시스템을 의미한다. 사실 이는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에도 해당된다. 너무나 많이 인구에 회자된 나머지, 이제 ‘종언’이라는 말만 나와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이가 대다수다. 그러나 그런 ‘질림(물림)’이 그저 ‘진부함에의 저항’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리어 그 테제가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해, 현실원리에 기대어 ‘손님’을 쫓아내는 푸닥거리를 한다고 해서 냉수가 생명수로 바뀔 리는 만무하다는 말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을 비판하기 위해 나선 무당들은 대략 세 부류이다. 1) ‘근대문학’이 쇠퇴하고 있다는 일반론에는 찬성하지만, 그렇다고 ‘문학’이 가진 본래적인 의미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근대문학 이후의 문학’에서 가능성을 찾자는 이들, 2) 한국문학은 제대로 된 근대문학조차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종언’이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이들, 3) ‘근대문학의 종언’은 남의 집 이야기이며 한국문학은 오히려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가라타니의 테제가 어떤 새로운 ‘주장’이라기보다는, 자명한 것 뒤에 숨겨져 있는 역사성을 환기시키는 ‘물음’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것은 받아들이거나 거부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로지 논리적·실증적 찬반을 통해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이는 그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또는 지나친 무관심)과 한 쌍을 이루고 있다. 모든 문제(질문)의 진실성은 그 문제 자체보다는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과민(잉여)’반응을 통해 나타난다고 할 때, ‘근대문학의 종언’이 강 건너 불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가라타니는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근대문학 이후에 포스트모던문학이 있다는 말도 아니고, 문학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말도 아니라고 전제한 후, 다만 문학(소설)이 근대에 들어서 부여받은 ‘특별한 중요성과 가치’가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곧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근대문학에 부여된 이와 같은 ‘중요성(가치)’이지 ‘종말론’이나 ‘묵시론’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애써 이를 ‘묵시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믿음(선택)’의 문제로 호도하는 것에 불과하다. 상상력 통해 ‘공감 공동체’ 형성한 근대문학의 역할·중요성 사라져 문단-출판계-대학-신문들 문학시스템 붕괴될라 ‘위기’ 눈감아 그럼 문학에 부여된 ‘중요성(가치)’이란 무엇일까? 가라타니는 그것을 ‘미학(감성론)’의 등장이나 ‘근대국가’의 성립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곧 저급한 것으로 취급되어온 감정이 지적·도덕적 능력(이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그것들을 연결시키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라는 사고가 생겨나는데(이전까지 ‘상상력’은 ‘공상’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만 갖고 있었다), 그러자 ‘공상적인 것=오락적인 것’으로만 취급받던 소설이 ‘공감’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하나로 만들어 ‘네이션’(국민)을 형성케 하는 매체로서 격상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런 중요성이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가라타니의 지적처럼 이상한(특수한) 쪽은 오히려 근대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반적인 것이 저발전의 증거로서 거부되고, 특수한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옹호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도착이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문단-출판계-대학-신문’이라는 문학시스템이 그와 같은 관념을 꾸준히 생산·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문학이 그와 같은 특별한 중요성을 상실했다는 것은 그에 기반을 두고 있는 문학시스템 역시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그 시스템에 의지하여 사는 이들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정이 이렇게 절박한데도 한 원로작가는 일본문학은 끝났을지 모르지만 한국문학은 그렇지 않다며 도리어 ‘태평천하’(또는 부흥기)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한국출판계는 일본문학의 공습으로 초토화되고 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현해탄을 건너온 유령들(이미 ‘종언’을 맞이한 문학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 형국이다. 따라서 굿이라도 한판 벌여 ‘문학쿼터제’ 정도는 얻어내야 하는지도 모른다(이제 창작지원금 정도로는 약발이 서질 않는다). 그러나 그 전에 ‘손님’들이 ‘주인’인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그럼 그 차이라는 게 양국의 문학인을 호명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창과 출신으로 넘쳐나는 한국문단 작가적 경험보다 제도적 문학성에 획일화 가라타니 ‘종언’ 증거와도 맞아떨어져 “오히려 중흥기” 주장은 안일한 태도 한국 소설가로는 박민규, 정이현, 천운영, 편혜영, 전성태, 하성란, 조경란, 강영숙, 윤성희, 이기호, 백가흠, 김종광, 백민석, 이신조, 김애란 등을 들 수 있겠고, 일본소설가로는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가네시로 가즈키, 오쿠다 히데오, 에쿠니 가오리, 미야베 미유키, 와타야 리사, 유미리, 가네하라 히토미, 야마다 에이미, 이시다 이라, 쓰지 히토나리, 다구치 란디, 교고쿠 나쓰히코, 히라노 게이치로, 기리노 나쓰오, 온다 리쿠 등을 입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 그룹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한국 쪽 구성원이 모두 문예창작과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반해, 일본 쪽은 단 한 명의 문예창작과 출신도 없다는 것이다. 실로 기묘한 결과다. 왜냐하면 가라타니가 ‘종언’의 증거로 든 예가 바로 일본에서 증가하고 있는 ‘문예창작과’이기 때문이다. 이제 문학이 작가적 경험이나 통찰이 아닌 창작코스에서 생산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가라타니의 우려와 달리 일본에서 문창과 출신이 성공한 케이스는 거의 없다. 문창과는커녕 국문과 출신조차도 매우 적으며, 하나같이 매우 다양한 경험의 소유자들이다. 따라서 가라타니의 지적은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정확히 한국문학을 겨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문학의 이런 특징은 비단 문학(창작)만의 일이 아니다. 비평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해서 거의 대부분이 국문과 출신으로 구성되고 있다. 그럼 이와 같은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늘날의 한국문학이 문학시스템에 맞게 ‘그들만의 문학’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사회·역사적 변화를 통해 다양화되기보다는 제도가 만들어놓은 ‘문학성’에 의해 획일화되어버린 것이다. 확실히 이런 완벽한 공간에서 ‘근대문학의 종언’은 그저 손님(마마)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손님은 오로지 무당의 눈에만 보인다고 할 때, 한국문학은 알게 모르게 이미 무병(巫病)을 앓은 셈이다. 그런 한국문학이 ‘손님’을 발견·추방시킴으로서 자신의 건강함을 증명하고자 하지만, 그때 발견되는 ‘손님’이란 자기 안에 살고 있는 ‘유령’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조영일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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