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私見] 우아한 배제
▲ 영화 포스터 |
<네이키드>(1993)에 이어 두 번째로 마이크 리 감독의 영화를 소개하게 되었다. 신작 <세상의 모든 계절(Another year)>(2010)은 관대하다면 관대하고 약다면 약은, 한마디로 평범한 노부부와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해의 사건과 이를 다루는 각자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출처:<퍼슨웹> 2011. 04. 03
하나/ @latinsamba
(*이 글에는 <세상의 모든 계절>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안온한 삶의 잔인함
토목지질학자인 톰과 심리상담사인 제리는 런던에 사는 노부부이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비껴간 듯 보이는 그들의 집은, 따뜻한 식사와 위안을 필요로 하는 친구들로 분주하다. 드나드는 인물로는 이혼 후 병원에서 비서로 일하며 외롭게 살고 있는 메리, 삶에서 의미와 기쁨을 찾지 못하고 폭식으로 고도비만이 되어버린 켄 등이 있다.
특히, 인근에 사는 메리가 자주 방문하는데 그녀는 조카뻘인 톰과 제리의 아들, 조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노골적으로 유혹하지는 않지만 늘 조이의 방문을 기다리고, 그에게 술 한 잔 하자며 집요하게 조르는 정도의 주책은 공공연히 드러낸다.
그러던 어느 날, 조이가 여자 친구 케이티를 집에 데려오고 이에 실망한 메리는 그녀에게 무례하게 군다. 이 사건으로 인해 메리는 톰과 제리 가족들과 사이가 멀어지고, 한동안 그들의 집을 방문하지 못한다.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초반부터 실버타운 광고에나 등장할 법한, 비현실적으로 행복한 노부부를 보여준다. 그들의 일상이 어찌나 균열 없이 완벽하던지 나는 내심 오래 묵혀뒀던 불행이 한꺼번에 밀려와, 그 결핍 없는 삶이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가령 아내가 의욕적으로 상담일을 하는 장면을 보면 이제 곧 그녀가 해고당하리라 예상했고, 두 사람이 함께 저녁을 요리하는 장면을 보면 이제 곧 남편이 불륜 사실을 고백하리라 예상했고, 남편과 아들이 운전이 미숙한 메리의 차를 타고 나가는 장면을 보면 이제 곧 모두 교통사고로 즉사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불길한 예상은 부분적으로 막장 드라마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근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연 재해 때문이기도 하다. 일상의 평온함이 공고해 보이면 보일수록, 조만간 깨지고야 말 것이라는 불안감이 무의식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탓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계절>은 9.11 이후, 안정된 중산층(또는 그 이상)의 급작스러운 붕괴를 다루었던 다양한 매체들과 시선을 달리한다. 마이크 리는 안온한 삶이 불가항력의 재난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기 이전을, 그들이 보였던 우아한 배제와 잔인함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영화를 지배하는 폭력은 스펙터클한 재난과 고통이 아니라, 아주 섬세하고 포착하기 어려우며 이내 사라지고 마는 배우들의 표정으로 표현된다. 또한 그 폭력의 흔적 역시 '당한 자'의 순간적으로 당황하거나 슬퍼지는 얼굴로 나타난다.
마지막 화면을 가득 채우는 메리의 상처받은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참 저 표정을 많이 봤었지'하는 생각과 함께, 내가 건넸던 상처를 고스란히 비추던 몇몇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아주 짧았지만 분명히 보기는 봤었던, 하지만 아주 짧아 사과도 없이 대충 얼버무릴 수 있었던 내 우아한 잔인함이 남긴 얼굴들, 그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들이 집에 오는 내내 내 뒤통수를 잡아 당겼더랬다.
• 배제의 방식
특이하게도 행복한 삶을 사는 두 여자, 제리와 케이티는 심리학과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있다. 둘을 두고 톰은 "타인을 돌보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이에 대해 제리는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서!"라고 답한다. 하지만 이들의 '심리학적인' 태도에는 묘하게 타인을 배제하는 구석이 있다.
처음으로 제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그녀는, 불면증을 호소하지만 실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늙은 여자를 상담한다. 호전적으로 가족관계 따위 묻지도 말고 그저 잠 오는 약이나 처방해달라는 내담자에게, 제리가 묻는다.
"요즘 얼마나 행복해요? 1에서부터 10까지라고 한다면, 몇 점인가요?"
여자는 인상을 쓰며 "1"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제리가 말하길,
"'1'이라.... 그렇다면 앞으로 좋아질 여지가 많네요. 그쵸?"
초반에 등장하는 이 짧은 대화는 최근 심리학의 중요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수치화'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우울증 환자가 인지치료를 받는다 치자. 그는 매 회기마다 자신의 우울을 수치화하고, 이러한 점수들로 이루어진 그래프의 변화를 확인하여 자신의 호전 여부를 파악한다. 마치 간수치 확인하듯, BDI(Beck Depression Inventory: 인지치료의 창시자인 아론 백이 개발한 우울척도)가 30점에서 15점으로 내려가면 우울감이 감소했다고 본다. 위에서 제리가 행복지수를 묻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단순히 표현의 촌스러움 또는 유치함(마치 가수 <2PM>이 상대에 대한 호감을 <10점 만점에 10점>이라고 표현할 때 느낄 법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감정, 동기, 성격, 태도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계량적 진술로 전환한다는 것은,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사물로 여긴다는 의미이다. 즉, 정의할 수 없는, 실은 존재 자체도 알 수 없는 '감정'은 리커트 척도(likert scale) 위에 고정됨으로써 '1점: 전혀 아님', '5점: 매우 동의함'과 같은 '양'을 부여받고, 감소시키거나 조절해야할 대상이 된다.
조금 더 확장시켜보면 비단 감정뿐 아니라, 심리학은 관계까지도 '다룰 수 있는' 구체적인 단위로 전환시킨다. 노골적인 예를 들자면, 작년에 번역 출간된 스테판 폴터의 책 <어머니는 누구인가(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의 삶에 미치는 영향)>의 원제는 <THE MOTHER FACTOR>, 즉 어머니 요인이다. '어머니 요인으로 인해 생긴 문제들', '어머니 요인이 어떻게 적용 되는가'와 같은 목차들을 보면, 마치 진공청소기 매뉴얼의 '고장 시 이것부터 확인해보세요!' 챕터를 읽고 있는 기분이다.
이와 같이 감정이나 관계는 구체적인 단위로 전환되어 통제 가능해지고('자존감을 증가 시키십시오'는 불가능하지만 '로젠버그 자존감 척도의 점수를 증가 시키십시오'는 가능하다), 이는 통제를 하는 자, 즉 주체의 강조와 연결된다. 자발적 주체는 계란 한 개를 한 판으로 불리듯 행복을 1점에서 10점으로 올릴 수 있고, 정신병리의 원인인 '아버지 요인'과 '어머니 요인'을 제거하여 자신의 신경증을 감소시킬 수 있게 되었다.
주체의 강조는 양면적이다. 한편으로는 개인이 무의식이나 계급의 무력한 희생자가 아님을 선포하며 힘을 부여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불행을 개인 선택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스스로 변화할 수 있고 나아질 수 있는데, 퇴보하거나 정체해있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다. 그리고 제리의 치료관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 삶의 조건
제리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존재이지, 무의식이나 계급처럼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힘에 의해서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를 보여주는 장면은 자주 나온다. 그녀는 알코올 중독자가 또다시 술을 마시는 점에 대해 이야기하며 "모든 것은 자신에게 달려있는데 말이지!"라고 한다거나, 사과하러 온 메리에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해"라며 단호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그녀가 무엇보다 '자아'를 중시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아의 기능은, 본질적으로 외부 현실과 개인의 본능적인 욕구 사이의 타협이다. 즉, 사회에 적절히 적응하고 기능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구, 충동, 감정을 조절하고, 타인의 입장과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기준에 비춰볼 때, 메리를 포함한 '심리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은 자아강도(ego strength)가 낮고 '역기능적인'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위의 개념에 부분적으로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리가 가진 '주체의 선택과 책임'이라는 신념에 격렬하게 불쾌했다. 그녀의 신념에는 삶의 '조건'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메리는 사실상 자신이 느끼는 고통의 원인을 조건 혹은 외부 환경에 기인한다고 본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그녀는 조이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삶이 너에게는 친절하니?"
메리에게 주어는 자신이 아니라 삶이다. 즉, 심리적 고통에 스스로가 기여한 부분을, 이것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인정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가령 그녀가 심리학이나 정신의학 관련 기관을 방문하여 면담을 받는다면, 아마 '병식(질병에 대한 인식)' 또는 심리적 통찰이 부족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병식의 수준(level of insight)을 꼼꼼하게 체크하기 위한 다양한 질문을 받은 뒤, '병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도움을 요청하나 동시에 부인함' 또는 '병은 인식하나 외부요인으로 돌림' 또는 '병을 내부요인으로 돌리나, 자신 속에 있는 알 수 없는 것 때문이라고 여김' 중 어느 한 범주에 속하게 될 수도 있다.
병식의 수준은, 궁극적으로 외부 귀인에서 내부 귀인으로 향하는 것을 더 상위의 수준으로 설정하고 있다. 하지만 더 높은 통찰을 강조할수록 오히려 외부 조건에 대한 고려는 사라진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문제는 너 자신인데 자꾸 밖이라고 하느냐, 또는 문제가 밖이라 한들 네가 바꿀 수 있는 게 없으니 네 생각을 바꾸는 게 효율적이지 않겠느냐'는 강요이다.
따라서 '병식의 부재'는 이 강요에 대한 저항을 품고 있다. 제리와 불면증 여자의 상담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제리는 '행복점수가 바닥이라 우울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개선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식의 말은 한다. 사실상 이러한 치료적 개입은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꿔볼 것을 우회적으로 제안한 것이다. 즉, '컵에 물이 반 컵밖에 없는 게 아니라 반 컵이나 있는 것이다'의 다른 버전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의 전환'에 대해 여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자 제리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럼, 불면증에서 벗어나는 것 말고, 당신의 삶이 행복해지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여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다른 삶."
그렇다, 다른 삶.
다른 생각 말고, 다른 삶.
불면증 여자는 제리가 불행을 설명하면서 삶의 조건을 간과하고 있음을 알려주지만, 그녀는 듣지 않는다. 이 글을 쓰면서 줄곧 신경 쓰였던 소식이 하나 있다. 한국과학기술원, 카이스트가 최근 재학생들의 잇따른 자살과 관련하여 모든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심리검사를 실시하고 정서가 불안정한 학생들에 대해 별도의 상담을 실시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소식이었다.
과연 심리검사를 통해 산출될 수치로 인간의 마음을 전부 설명할 수 있을까, 또한 '항상 일등만을 해오던 명문대 학생들이 경험하는 상대적인 열등감과 자존감 저하, 이로 인한 우울감'이 적절한 해석이라 한들 이것이 본질적인 원인일까, 모든 죽음과 불행이 마치 마음의 문제라는 듯이 구는 이 사회가 은폐하고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자꾸만 내부를 보라고 가리킬 때, 우리의 아픈 내부를 만들어낸 외부는 사라진다. 이 외부, 삶의 조건이 사라질 때 우리의 고통은 고아가 된다. 우리의 고통은 애비, 애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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