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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문화예술

<2011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 에릭 로메르

by 내오랜꿈 2011.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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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私見] 우리들의 이상한 소리



 

출처:<퍼슨웹> 2011. 02. 27

하나/ @latinsamba


매년 돌아오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는 영화인들이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를 직접 선정하고, 관객과의 대화도 나누는 <서울아트시네마>의 대표 프로그램이다. 올해 영화제의 주제는 '영화의 즐거움'이었다. 이번 <하나의 사견>은 영화제 기간 동안 가장 즐거웠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빛들의 집


이러한 종류의 놀라움이 있다. 나에게는 무겁고 의미 있는 무언가가, 갑자기 매우 시시해 보일 때의 놀라움.


가끔 나는 이러한 감정을 생뚱맞게도 영화관에서 경험한다. 스크린을 응시하다 문득, 영사기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허연 빛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다  생각한다. '고작 이 빛줄기란 말이지.' 


최대한 압축시켜보자면, 영화는 단지 어둠 속으로 몇 가닥 빛이 흘러드는 것뿐이다. 그 빛이 뭐이기에 사람을 이리 흔드나 생각하면 종종 어이도 없다.


하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 영화를 좋아하여 오히려 이력서 취미란에 '영화 감상'이라는 말을 박아 넣지 못하는 이들은 그 빛의 미혹을 안다. 좌석에 꽉 묶인 관객들 위를 '꼬마유령 캐스퍼'처럼 붕 뜬 채 돌아다니는 그 빛은, 매번 각기 다른 사연을 들려주며 우리를 홀린다.


그리고 그 '빛들의 집'이 영화관이다. 획일적인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의 경우, 개개의 영화관이 가지는 개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탈개성이 동일한 서비스를 보장한다. 왕십리 CGV든, 구로 CGV든 똑같다. 하지만 어떤 영화관은 뚜렷하게 추구하는 가치와 이를 위한 노고로 꽉 차 있어 그 공간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바로 상업적인 논리로는 배급할 수 없는 고전 및 예술 영화만을 상영하는 서울 유일의 비영리시네마테크전용관인 <서울아트시네마> 이야기다.


이번에는 2011년 2월 6일 일요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보았던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에릭 로메르, 1987)에 대해 써보았다. 사실 이 글의 주인은 극장도, 영화도, 요일도 아닌, 특정한 극장, 영화, 관객이 만나 우연히 만들어진 어떤 순간이다. 하지만 위의 한 요소라도 없거나 대체되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어떤 순간이다. 



기다림과 은총


아직은 쌀쌀한 2월 초, 일요일. 상영일정은 <녹색 광선>(에릭 로메르, 1986)을 본 뒤, 곧이어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을 볼 수 있도록 짜여있었다. 영화의 촬영 역시 전자를 찍은 직후, 즉흥적으로 후자를 만들었기에 촬영과 상영의 순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두 영화 모두, 로메르의 영화답게 '기다림 끝에 찾아오는 은총'의 순간을 담고 있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안타깝게도 광신적인 확신이 아니라 스스로 회의하면서, 그러면서도 다른 이들이 포기하라고 하면 신경질을 내며 기다린다. 이들은 낭만과 융통성 없음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기다림에 대해 <모드집에서의 하룻밤>(에릭 로메르, 1969)은 파스칼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A와 B라는 선택이 있을 때, B 선택의 확률이 아무리 낮을지라도 결국 B가 이루어지면 모든 것을 얻게 되고, A를 선택할 경우에는 자신이 존재할 수 없게 되므로 B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녹색 광선>에서 델핀느는 여름휴가 동안의 일시적이고 쾌락적인 관계가 아니라 좀 더 의미 있는 관계를 기다리지만 녹록치 않다. 그녀는 녹색이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점괘를 듣고, 도시에 산재해 있는 녹색들(길에 떨어진 녹색 카드, 녹색 옷, 녹색 전봇대, 녹색 자동차)에 의미와 암시를 부여하며 의심 속에서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해변에서 노인들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다. 그들은 쥘 베른의 소설 '녹색 광선'을 언급하며, 수평선 너머로 해가 넘어가는 찰나, 누군가와 함께 아주 잠깐 나타나는 녹색 광선을 보게 되면, 자신과 그 사람의 진정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그녀는 기다리던 남자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녹색광선을 본다. 영화의 마지막, 관객들은 화면에 아주 잠깐 등장하는 초록색을 발견하고는 탄성을 지른다.


이렇듯 관객들은 주인공이 간절히 기다려왔던 ‘은총의 순간’을 함께 목격하게 된다.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실제 극히 드문 확률을 지닌 ‘녹색 광선’이라는 기적이 눈앞에 형태를 갖추고 뚝 떨어져 ‘자, 보라!’ 했을 때의 충격, 그 이미지가 주는 충격은 매우 종교적인 느낌을 준다.


이러한 충격은 부분적으로 서사와 이미지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영화라는 매체만이 줄 수 있는 성질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기적을 맞닥뜨리기 직전까지 서사와 이미지는 끊임없이 충돌한다. '그런 사랑이 있다더라.' 또는 '녹색 광선이라는 게 있다더라.'와 같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기적의 서사는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기에 믿을 수 없다. 반면, 이러한 의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녹색 카드, 녹색 자동차, 녹색 기둥과 같은 이미지들이다. 델핀느가 혼란에 빠져 울면서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암시가 될 만한 ‘녹색들’을 발견하고 위안을 얻는 장면은 자주 반복된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미지의 잔상이 흐려질 때, 또 다시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의심과 암시, 서사와 이미지, 사고와 감각, 체험할 수 없는 것과 있는 것 사이의 긴장이 영화 저변에 흐르고 있다. 그리고 비단 <녹색 광선>뿐 아니라 많은 수의 로메르 영화가 마지막 순간에 그 긴장을 폭발시키며, 은총의 이미지를 눈앞에 딱 갖다 놓는다.


이때 이어지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탄성이다. 허약한 서사가 멈추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다만 볼 뿐이다. 경험할 뿐이다. 그 순간, 마치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을 믿지 못하던 성 토마스가 예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봤을 때 느꼈을 법한 고요와 확신이 심장에 꽉 찬다.



blue hour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에서는 '체험'의 중요성이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어진다. 시골 소녀 레네트는 우연히 만난 도시 소녀 미라벨에게 'blue hour'를 경험하게 해준다며 자신의 시골집에서 하룻밤만 자고 가라고 청한다. 'blue hour'는 밤새들은 잠들고 낮새들은 깨어나기 직전, 딱 1분 동안 생기는 완벽한 정적을 의미한다. 둘은 완벽한 정적을 경험하기 위하여 새벽부터 들판으로 나가지만, 하필 그 1분 동안 트랙터가 지나가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속상해진 레네트가 울음을 터뜨리자 미라벨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녀를 위로한다.


"완벽한 정적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인상적이었어. 나도 잘 이해할 수 있어."


그러자 레네트는 다들 쉽게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빨간 딸기가 초록 딸기보다 맛있다는 사실은 맛을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거라며 화를 낸다. 결국 미라벨은 하루 더 머물기로 한다. 그리고 다음 날, 흰 잠옷을 입는 두 소녀는 'blue hour'를 경험하고는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기뻐한다.


당시 관객들도 두 소녀와 함께 'blue hour', 즉 완벽한 정적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밤새들의 지저귐이 서서히 잦아들다가 어느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1분 뒤 낮새들의 경쾌한 지저귐이 극장 가득 차오를 것이다! 어둠 속에 잠긴 사람들의 뒤통수만 봐도 이들이 그 1분을 위해 얼마나 집중해서 귀를 열고 있는지, 자신의 신체에서 유발될 수 있는 모든 소리를 꾹 눌러 담기 위해 얼마나 조심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날의 모든 관객들은 'blue hour'를 경험하지 못했다. 두 소녀는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기쁨을 나누고 있었으나, 우리는 또 한 번 울어버렸던 미라벨이 되어야했다. 그것은 모두 '사춤' 때문이었다.


일명 '사춤'. 서울아트시네마에 자주 가는 관객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춤'은, 영화관 바로 위층에 위치한 극장의 뮤지컬 <사랑한다면 춤을 춰라>의 약자이다. 영화 상영 중에도 위층에서는 '사춤'을 공연하기 때문에 쿵쿵거리는 리듬과 흥겨운 멜로디가 천장에서 새어 나오고, 사실상 영화 관람에 방해가 되므로 이는 독자적인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주장할 때 실질적인 예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날따라 로메르가 선사한 완벽한 정적 덕분에 관객들은 오히려 영화 음향으로 덮을 수 없게 된 '붐치기 붐치기 붐붐붐'을 더욱 강렬하게 경험해야했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2011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기간 중 가장 즐거웠던 때였다.


'blue hour'를 방해받아 짜증나는 마음도, 동시에 결정적인 순간에 '사춤'의 음향이 내려오시리라는 예상이, 비록 부정적인 예상일 망정 적중하자 주책없이 신나버리는 마음도, 사실 이제는 '사춤'에 익숙해져 별로 동하지 않는 마음도, 그 외의 오만가지 마음도 객석을 가득 메운 이들과 함께 느끼고 있다는 점이 나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했다. '우리는 이상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공유가 '완벽한 정적'보다 중요한 체험이었다.

 

에릭 로메르 영화의 중심에는 항상 관계가 있었다. 돌이켜 보면, '녹색 광선'이 특별한 이유는 자연의 기현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뿐 아니라 함께 보는 이의 진심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시골에서 자주 ‘blue hour'를 경험해봤던 레네트가 트랙터 때문에 첫 번째 ’blue hour'를 놓치고 울어버린 이유는, 그 완벽한 고요함을 미라벨과 ‘함께’ 나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동굴에서의 교감


나는 근본적으로 영화가 어두운 곳에서 밝을 곳을 보는 형태이기에 좋아했다. 영화관 속 어둠에 잠겨 희미해진 사람들을 둘러볼 때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몸들을 심리적 외부에 가져다 놓을 수 있다는 점에 안도했고, 화면 속 인간들과는 인사를 할 필요가 없어 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방구석에서 책을 읽는 것보다 영화가 더 좋았던 까닭은, 서로를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근접함이 당시의 나에게는 최적의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사춘기와 내향성의 상호작용은 영화관을 숨어들기 좋은 동굴로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을 보면서, 그런 동굴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점이 올해 ‘친구들 영화제’에서 느꼈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고백 좀 해야겠다. 낙원상가 꼭대기 층에 위치한 <서울아트시네마>는 팔리지 않아 보기 힘든 고전 영화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동굴에서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공간이다. 나 같은 평범한 직장인에게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쯤은 자본 축적이라는 목적에서 빗겨나 있는 무언가를 누릴 사치가, 또한 그 사치를 누리기 위해 일요일 아침부터 낮잠을 포기하고 유령들처럼 동굴로 기어드는 사람들의 얼굴이 필요하다.


바로 그 존재 이유와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빛들의 집, <서울아트시네마>는 자주 위태로워진다. 부디, 오래 살아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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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아트시네마의 옥상 :시네마테크 홍보 UCC 최우수상, <서울아트시네마의 옥상>(정금형, 2010)


<서울아트시네마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기>

- 송승민 사무국장 인터뷰 

- 김성욱 프로그래머 ‘공세방어: 시네마테크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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