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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문화예술

<의식 La Ceremonie>(끌로드 샤브롤)

by 내오랜꿈 2011.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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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私見]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


끌로드 샤브롤의 1995년도 영화 <의식>에 등장하는 멜린다. 어찌 보면 이 아가씨, 프랑스판 강남좌파다. 계급을 배반하는 언어와 계급에 복속된 육체의 이종교배를 보여주는 이 인물을 통해, 우리들의 오래된 딜레마에 대해 말한다. 바로 말과 몸의 괴리다. 


출처:<퍼슨웹> 2011. 09. 11

하나/@latinsamba



 
  ▲ 영화 포스터

여기 꼰대 하나 추가요


(본 리뷰에는 <의식 La Ceremonie>(끌로드 샤브롤, 1995)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1년 7월 16일, 광화문에서는 캐나다에서 시작된 <슬럿워크(SlutWalk)>*의 한국판인 <잡년행진>이 열렸다. 


<잡년행진>을 둘러싸고 개인적으로 심경이 복잡했다. 이유는 그간 페미니스트도, 운동권도 아니었던 애인이 행진 소식을 트위터에서 접하고는 준비 모임을 나가고 촬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스스로 예상했던 것보다 흔쾌히 응원하지 못했고 그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먹었다.  


부분적으로는 수많은 모순과 보수성에도 불구하고 나름 여성문제에 관심이 있다 생각해왔던 나는 결혼을 앞두고 시댁 문제에 골몰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애인이 잡년행진에 참가한다는 점에 대한, '아니 왜 내가 아니고 네가!'라는 질투심도 있었다. 결혼과 함께 급속하게 나만 세속의 중앙에 놓이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은 위장이다. 사실 나는 그저 애인이 ‘잡년들’을 촬영하는 게 싫었다. 행진에 ‘돌을 던질(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파고다 공원 꼰대들의 정신이, 내 속에도 있었다.  그러자 잡년행진의 표어 중 하나였던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우리 같은 잡년은 어디든 간다!”는 문장을 좋아했던, 그리고 스스로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해왔던 과거의 시간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의식은 조건의 변화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느새 가정지킴이 착한 여자로 전락해버린 신세.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쪽이 팔려 온갖 수사를 동원하여 애인 앞에서 ‘잡년 행진’을 옹호하였다. 하지만 애인은 이상하게도 모임에 갈 때마다 주저리주저리 양해를 구했고 나는 그럴수록 왠지 더 화가 났다. ‘진보적인 쿨녀 어필’ 실패는 쓰라렸다.


결국 문제는 말이 아니라 몸이었다. 애인이 눈치를 봤던 이유는 허울뿐인 말과 달리 내가 눈짓, 손짓, 발짓, 온몸으로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말과 달리 나의 몸은 이미 '레몬테라스'** 회원의 것이었다. 


 
  ▲ 영화의 한 장면

말과 몸의 괴리. 이 지독히도 흔하지만, 또한 매번 걸려 넘어지는 딜레마를 경험하면서 영화 <의식>의 멜린다가 떠올랐다. 그녀는 영화에서 핵심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말 따로 몸 따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부르주아 집안의 맏딸인 이 아가씨는 자신의 계급을 까는 발언과 생각을 가졌다 자부하나 이는 자신이 손해를 보지 않을 경우에만 해당한다. 


나는 그녀를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형 인간으로 부르련다. 그녀는 영화 내내 하녀의 평등을 말하다가 그 하녀가 자신을 위협하는 순간, 권력을 사용한다. 아니 이 아가씨야 평등하다며, 라고 누군가 따지면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말할 것 같다. 


“아이참,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지요!”라고. 



* 슬럿워크 

캐나다의 한 경찰관이 “여자들이 성폭행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면 매춘부(슬럿, Slut)처럼 옷을 입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고 한 발언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잡년행진이 열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비슷한데, 고려대 의대생 집단 성추행 사건과 현대차 하청 노동자 성희롱 사건이 그것이다. 특히 최근 고려대 성추행 가해자들은 ‘피해자의 행실이 문란했다, 아니다’와 같은 문항이 포함된 설문지를 학교에 배포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잡년행진은 성녀/창녀라는 가부장적인 이분법 구도를 탈피해, 사회에 창녀가 아님을 검증받기보다는 옷차림과 무관하게 모든 여성이 성적 자율권을 가질 수 있음을 주장한다.  


**레몬테라스

결혼, 육아, 인테리어 등을 주제로 하는 회원의 대부분이 여성인 네이버의 까페로, 150만 회원을 자랑한다. 그곳에서 예신이(‘예비 신부의 줄임말’)이들은 적정 예단 가격이나 시어머니에 대처하는 방법 등의 정보를 얻는다. 



뇌관


 

멜린다 아가씨를 알아보기 전에, 일단 언어를 중심으로 <의식>이라는 영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비록 감독인 샤브롤은 부인했지만 책 <잔혹과 매혹>(레이철 에드워즈, 키스 리더, 2005)은 <의식>이 파팽 자매 살인사건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본다. 이 사건은 1933년 2월 프랑스에서 하녀인 크리스틴과 레아 파팽 자매가 맨손으로 주인 모녀의 눈알을 뽑은 뒤 망치, 부엌칼, 양철 물병 등으로 난자하여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매혹적인 이유는 살인의 잔혹성보다 살인 이후에 크리스틴이 한 발언 때문이다. 경찰이 발견했을 당시 그녀는 순순히 살인을 인정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여주인들의 피부를 갖고 싶었어요. 대신 그들이 우리 피부를 갖고요!” 


<잔혹과 매혹>을 인용하자면 “이 발언으로 사건은 계급적 복수 행위라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의식> 역시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복수로써 두 여인이 '주인들'을 살해한다는 점에서, 파팽 사건을 닮았다. 


간략하게 영화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집안일은 완벽하게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소피(상드린 보네르)는 를리에브르 가에 하녀로 고용된다. 그녀는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숨기고 있다. 그녀는 평소 를리에브르씨가 탐탁지 않게 여기던 우체국 직원인 잔느(이자벨 위페르)와 친해지게 되고, 잔느를 방에 초대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주인집과 갈등이 생긴다. 그 와중에 소피는 우연히 를리에브르씨의 딸 멜린다에게 문맹임을 들키고 이 사실은 가족 모두에게 알려지게 된다. 수치심을 느낀 소피는 잔느와 함께 거실에서 텔레비전으로 오페라를 시청하고 있던 일가족 모두를 총으로 쏴 죽인다.  


무엇보다 영화의 핵심은 소피가 문맹이라는데 있다. 샤브롤은 자신의 영화를 일컬어 "최후의 마르크스주의 영화"라고 부르며 계급갈등이 핵심 주제임을 강조했는데, 그는 계급 유지가 자본뿐 아니라 언어와 문화를 통해 어떻게 확대 재생산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소피가 가진 수치심의 근원이자 사회에서 배제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녀라는 직업도 여성이라는 젠더도 아닌, 언어다. 


특히 <의식>이 프랑스라는 제 1세계의 영화임을 고려할 때, 그녀의 문맹은 해당 국가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이민자들, 외국인 노동자들을 환기시킨다. 외국인 노동자의 '표식'은 피부색과 함께 "사장님 나빠요"식의 어눌한 말투다. 언어는 '그들'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뚜렷한 표식이며, 언어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고력이 없다고 여겨진다. 흔히 외국인을 때 묻지 않은 순진한 어린아이로 묘사하는데, 여기에는 언어에 서툰 그들에게는 복잡한 간교를 부릴만한 사고력이 부재하다고 전제가 숨겨져 있다.   


다시 돌아와서, 소피는 악착같이 글을 배움으로써 권력에 편승하기보다는 회피하는 편을 택한다. 그녀는 를리에브르 가에 처음 방문하여 집 곳곳을 구경하다 서재를 발견하고는 뚝, 멈춰버리며 결국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이후에도 다른 곳은 완벽하게 청소함에도 불구하고 서재의 책과 서류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이렇게 언어를 피해 다니던 그녀는, 결국 일가족을 몰살한 뒤 마지막으로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총으로 쏴버림으로써 권력의 수단인 언어 자체를 거부한다.


이에 비해 우체국 직원인 잔느는 권력을 탈취하고 싶어 한다. 그녀는 자주 자신의 작은 방과 그들의 저택을, 자신의 옷과 주인 여자의 드레스를, 자신의 계급과 그들의 계급을 바꾸고 싶어 미치겠어 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정작 훔치는 것은 부르주아 가정의 남자도(김기영이나 임상수의 <하녀>처럼), 돈도, 명예도, 드레스도 아닌 활자다. 그녀는 를리에브르 가의 우편물들을 함부로 뜯어 읽어보는 버릇을 가지고 있고, 처음 그 집을 방문했을 때도 책을 훔친다. 


어찌 보면 그녀야 말로 파팽 자매의 변주이다. “나는 여주인들의 피부를 갖고 싶었어요. 대신 그들이 우리 피부를 갖고요!”는, 샤브롤의 영화에서 "나는 주인들의 언어를 갖고 싶었어요. 대신 그들이 우리 언어를 갖고요!"로 변한다. 



흥미로운 점은 결국 잔느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일가족을 모두 죽인 뒤, 귀갓길에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재미있게도, 또는 너무 직접적이라 촌스럽게도 가해자는 가톨릭 신부이다. 잔느는 과거에 자신의 딸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은 적이 있으나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녀는 이 '판결'을 강조하며 법에 기대지만 결국 로고스, '아버지의 말씀'을 상징하는 신부에 의해 죽는다. 


이는 김기영의 <하녀>(1960)도 비슷하다. 여기서 하녀는 언어가 아닌 가부장의 자식을 잉태함으로써 부인의 자리를 꿰차고자 하는데, 즉 권력 자체를 거부하기보다는 자신으로 대체되기를 바란다. 마치 이 둘은 따뜻한 촛불과 호화로운 케이크에 둘러싸인 부르주아 가정을 창밖에서 바라만 보는 성냥팔이 소녀가 아니라, 창을 깨고 들어가 사람들을 끌어내리고는 그 자리에 앉아 게걸스럽게 케이크를 먹어 치울 것 같다. 하지만 결국 권력 자체를 전복시키지 못하고 단지 빼앗고 싶어하는 한계를 지닌 그녀들은, 상대방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하녀>에서는 아들을 죽인다). 


하지만 권력 한 뼘 노리지 않고 이와 무관하게 사는, 그래서 일견 복종적으로 보이는 소피는 살아남아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멀리서 경찰들을 바라보다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소피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잔느의 딸 살해가 실제로는 사고였던 것과 달리 이전에도 소피는 실제로 아버지를 살해했지만 발각된 적도, 법원의 판결을 받은 적도 없다. 


그녀는 끈덕지게 살아남아 이 집, 저 집 안에 뇌관처럼 잠복해 있다. 그녀는 외부의 충격에 반응할 뿐인 뇌관, 먼저 공격하는 법은 없으나 일단 공격받으면 끝끝내 물어 죽여 버리고 마는 맹독을 지닌 뱀과 같다. 잔느가 항상 상대가 자신을 착취하는지, 무시하는지에 촉수를 세우고 있는 것과 달리 소피는 오히려 착취에 둔감하고 기본적으로 순종적이지만 상대방이 역치를 넘겨버리는 순간 폭발해버리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부르주아의 위선을 반영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역치를 넘겨버리는 사람은 를리에브르가의 큰딸 멜린다다. 




말과 몸의 괴리


아이러니하게도 집안 식구들 중에 멜린다는 소피에게 가장 우호적인 또는 시혜적인 인물로 나온다. 그녀는 소피에게 자신의 아버지는 파시스트라며 그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지 말라고 충고하고, 스스로 차를 끊여먹는 등(!)의 배려를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문맹임을 발설함으로써 그녀 때문에 일가족이 몰살된다. 멜린다는 지식권력을 가진 부르주아 여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인물이다. 소피의 해고 소식에 잔느는 이렇게 묻는다. 


"해고? 나쁜 놈들 그럴 줄 알았어. 멜린다도 (일조했어)?"


소피는 수긍하고, 멜린다가 그렇게도 친절한 아가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잔느는 전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이는 그녀들이 멜린다가 구사하는 친절의 언어, 공평의 언어 기저에 놓인 뿌리 깊은 위선을 꿰뚫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멜린다는 지적이고 비판적인 학생으로, 특히 언어에 예민한데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모델 출신인 엄마가 새로운 '하녀'가 마음에 든다고 하자 '하녀'라는 용어를 비판하며 '가정부'나 '관리인'과 같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다른 용어로 대체하여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를리에브르씨는 하녀를 하녀라 부르지 못하는 상황에 불만을 표하는데 그는 천박하기는 하나 적어도 솔직하다. 그는 매는 부르나 살인을 부르지는 않는 정도의 흔한 꼰대이다. 


반면 이 똑똑하고 야무진 아가씨가 오히려 살인을 부른다. 멜린다는 소피에게 잡지의 퀴즈를 읽어달라고 했다가 그녀의 문맹을 눈치 채고는, "당신, 독서 장애자군요"라고 말한다. 소피는 '독서 장애'라는 용어를 몰라서 반문하고 이에 멜린다는 사과하며 "그러니까 당신은 글을 읽지 못하는... 그런 사람인가요?"라고 질문을 수정한다. 그리고는 단박에 자신들에게 말하지 그랬냐며 아버지에게 부탁해 텔레비전에 나온 문맹자를 치료하는 파리의 의사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하겠노라 말한다. 



이때 멜린다의 눈빛은 자신의 선의에 대한 감사를 기다리는 듯 기대에 차 있다. 하지만 소피는 굳은 얼굴로 문맹을 발설하면, (아버지가 모르는) 너의 임신 사실을 발설하겠다 협박하고 나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라고 못 박는다. 결국 멜린다는 아버지에게 협박 사실을 알리고 소피는 해고당한다. 해고 통보는 일방적이고 고압적인데, 이렇게 멜린다는 자신이 파시스트라 비난했던 아버지의 말 뒤로 숨는다. 그녀의 비판과 저항은 틀, 자신이 속해있는 계급이라는 틀을 넘어서지 못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들로 점철된 그녀의 말은 이다지도 허약하다. 그녀가 말로는 뭐라고 떠들든, 오히려 그녀의 계급성,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은 말이 아닌 아주 사소한 몸짓이며 소피와 잔느 역시 이 몸의 신호에 반응한다.


멜린다의 무의식적인 몸짓과 관련하여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잔느는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되어 도로에서 오도 가도 못해 난감해하던 차에 우연히 멜린다를 만난다. 멜린다는 기계에 관심이 많다며 자동차 보넷을 열고 수리를 하는데 그 모습은 흡사 육체노동자처럼 보인다. 그녀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잔느는 생뚱맞게 자신은 기계가 아닌 시에 관심이 있다며 나중에 시집을 낼지도 모른다는 허세를 부린다.



마침내 차를 다 고친 멜린다가 시동을 걸어보라고 했을 때, 잔느역을 맡은 이자벨 위페르는 상당히 미묘한 순간을 연기해낸다. 그녀는 감사를 표한 뒤 부리나케 차문을 여는 게 아니라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차 주변을 배회하다 마지못해 앞좌석에 앉는다. 그 느린 움직임은 멜린다와 자신의 역할이 전도되었다는 쾌감을 오랫동안 누리려는 듯 보인다. 멜린다는 손에 묻은 검은 기름을 문지르며 불쾌한 표정으로 그 움직임을 바라본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멜린다는 다시금 전도된 역할을 바로잡는, 둘의 계급차를 명확히 짚고 넘어가는 몸짓을 보인다. 멜린다는 잔느에게 손수건을 부탁하여 손에 묻은 기름을 닦고는 차창 너머 잔느의 얼굴 언저리에 손수건을 던진다. 그러자 이번에는 잔느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진다. 하지만 악의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 공평하고 친절한 아가씨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작별의 인사를 나누며 가뿐히 자리를 뜬다. 그 순진무구에는 어딘지 모르게 잔혹한 구석이 있다. 



이 말과 몸의 괴리를 보면서 생각한다. 욕을 먹을지 모르겠으나, 가끔은 ‘용어 투쟁’의 무의미함을 느낀다. 그간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저희 나라를 우리 나라로, 미세스를 미즈로, 시다를 미용 보조 스텝으로, 폐경을 완경으로, 매춘을 성매매로, 또 성매매를 성노동으로 바꿔 부르며 살아왔다.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표현들이 일종의 금기, 무지함의 증거처럼 느껴져서 부단히 익히려 노력해왔다. 하지만 몸을 따라가지 못하는 말의 허약함을 경험할 때면, 용어 변경을 통해 얻은 것은 의식화가 아니라 지적인 세련미가 아닐까 자문하게 된다. 


글의 말미까지 와서 한참을 고민한다. 어쨌든 나는 몸에 아로새겨진 계급성과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무언가를 제시하며 글을 닫고 싶다. 하지만 그마저도 ‘하는 말’에 불과하리라. 지금은 다만, 말이 내 속을 빠져나가 허공으로 휘발되는 것과 달리 이 몸뚱이는, 자주 무시하곤 하는 저 꼰대들의 규범과 관습으로 꽉 차있음을 느낀다.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형 인간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무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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