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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문화예술

트라우마, 기타큐슈사가 3부작

by 내오랜꿈 2010.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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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기타큐슈사가 3부작


 


트라우마 앞에서 어떤 이는 스스로 무너지고, 어떤 이는 타인을 무너뜨리며, 어떤 이는 이 두 가지 모두를 피하기 위해서 분투한다.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기타큐슈 사가> 3부작은 각각의 선택을 보여주지만, 당위나 성숙의 잣대를 들이대기보다는 각각의 복잡성과 절실함, 분투를 뜨겁게 감싸 안는다. 


하나/ @latinsamba

출처:<퍼슨웹>(http://www.personweb.com)



누군가에게 보내는 경의


 

아오야마 신지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그가 10년에 걸쳐 완성한 <기타큐슈 사가> 3부작(<헬프리스>(1996), <유레카>(2000), <새드 베케이션>(2008))은 각별하다. 각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자의 역사에서부터 사소한 습관까지 고스란히 지닌 채 다음 영화에 출연한다. 그러므로 마치 <토이 스토리>의 우디와 버즈를 15년 동안 알고 지낸 관객들이 그러하듯, 나에게는 연작 속 인물들이 친구처럼 가깝다.

 

<헬프리스>의 주인공 켄지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간병하며 살고 있는 청년이다. 그는 레스토랑에서 야쿠자 친구(야스오)가 맡겨놓은 동생(유리)과 함께 야스오를 기다리다가,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발적으로 레스토랑 주인 부부를 살인하려 하지만 미수에 그친다. 결국 야쿠자는 자살하고 켄지는 유리와 함께 고향인 큐슈를 떠난다.



<헬프리스> 예고편 


4년 뒤에 만들어진 <유레카>는 버스 총격에서 살아남은 버스 운전기사(사와이)와 남매(나오키, 코즈에)가 주인공이다. 사고 2년 뒤, 남매는 부모에게 버려지고 버스 운전기사는 외지를 떠돌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단둘이 살고 있는 남매를 찾아가 돌보고,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서 버스 여행을 떠난다.



<유레카> 예고편


연작의 마지막인 <새드 베케이션>은 각각 전작의 주인공이었던 켄지(<헬프리스>)와 코즈에(<유레카>)가 마미야 운송회사에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이다. 코즈에는 자신을 돌봐주던 버스 운전기사 사와이가 죽자 가출을 하고, 켄지는 우연히 운송회사 주인의 부인이 자신을 버린 친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복수를 위해 회사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배다른 동생을 죽이고 결국 감옥에 가게 된다. 



<새드 베케이션> 예고편


<기타큐슈 사가> 연작을 관통하는 것은 트라우마와 이를 극복하려는 개인의 부단한 노력이다. 각 인물들의 가장 힘겨웠던 순간을 지켜봤던 관객으로서는, 20대 때 살인미수를 저질렀던 켄지가 결국 살인자가 되자 허탈하고, 한편으로는 <너바나>의 "Never Mind" 티셔츠를 입고 다니던 소년이 정장 차림으로 연애를 하자 웃음이 나온다. 또한 실어증을 앓던 꼬마 숙녀 코즈에가 사람들과 더풀더풀 어울리자 대견하다. 관객도 영화의 인물들이 이렇게나 애틋한데, 이들을 10년 간 붙들고 있었던 감독은 오죽하겠나. 감독의 묵직한 시선이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사실 ‘9.11’과 이라크전 이후로 헐리우드에는 트라우마와 관련된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외부의 공격 앞에 무력한 희생자가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죽을힘을 다해 애쓰는 생존자 상(像)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아오야마 신지의 영화에는 바로 그 생존자들이 있다. 결국 이 연작의 핵심은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죽어버리거나, 타인을 죽이지 않고 10년을 버텨왔는가’이다. 그 속에는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환희가, 겨우 살만해졌다고 생각한 순간 뒤통수를 맞는 얼얼함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용서와 베풂이, 또한 그 베풂에 대한 부담감이, 정말이지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막막함이 다 들어있다.


그리하여 나는 올해의 마지막 달,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고통과 극복’의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극단적인 고통을 피해갈 수 있었던 행운을 가진 사람들에게 12월은 끝맺음의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달력은 의미가 없다. 시간의 축은 ‘그때 그 경험’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12월이 끝이 아니며, 1월도 시작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또 한 번’ 한 해를 잘 버텨온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경의이다.



응결된 기억, 흐르는 일상

 

 

<유레카>는 버스 총격 사건으로 시작한다. 여름의 나른한 한낮, 코즈에가 내리기 위해 버스 벨을 누르는 장면은 갑자기 피 흘리는 손, 버스 밖으로 달려 나가다 총에 맞는 남자, 널브러진 시체들로 이어진다. 이렇듯 연결되지 않고 툭툭 끊어지는 편집 방식은 외상 기억의 파편화(fragmentation)를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외상 기억은 ‘서사적 기억(narrative memory)'이 아닌 강렬한 심상과 감각의 조각들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베트남 참전 군인은 전장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팔 속의 하얀 뼈, 피부 조각, 창자였을 것이 틀림없는 축축하고 누런 무엇, 엉겨 붙은 핏자국, 시체를 내던질 때 ‘레몬 나무’라는 데이브 젠슨의 목소리.” 이렇게 이상(異狀)의 형태로 저장된 기억은 낮에는 급작스러운 생각이나 심상, 플래시백으로, 밤에는 악몽으로 끊임없이 개인의 삶에 침투한다.


영화는 이렇게 부서진 외상 기억으로 시작하는데, 실제로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치료하는 데 기억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물론 트라우마란 이미 지나간 경험의 기억이 지속됨으로써 발생하는 괴로움이다. 외상 기억의 생생함과 집요함 앞에서 “다 지난 일일 뿐”이라며 재빨리 일상으로 복귀하라는 염려 또는 강요는 의미 없는 일이다. 


일상은 기억에 잠식되는데, 모든 것이 ‘그 사건’과 관련된다. 어두운 골목, 매미 소리, 키가 작은 인간, 눅진한 날씨, 축축한 풀잎 냄새, 후추 가루 등등. ‘바로 그 경험’을 하지 않은 모든 이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들이 곳곳에서 칼이 되어 돋아나 발목을 베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보이려 노력하는 발걸음을 휘청거리게 만든다.


따라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통을 최소화하려 한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가 말했던 ‘반복강박’을 통해 동일한 상황을 재연하여 통제감을 얻으려 할 수도 있고, 약물 중독에 빠져 사건 자체를 아예 잊어버리려 할 수도 있으며, 해리(dissociation)를 통해 의식 자체를 변경할 수도 있다. 


다양한 방법 중에서, 나오키와 코즈에 남매는 모든 감정의 억제를 선택한다. 그들은 고통 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기쁨과 욕망도 함께 억제한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둘만 사는 큰 집은 정적과 정지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러한 고요함이 평온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데, 오히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할 때 움직이지 않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온갖 힘을 다 쓰는 상황을 연상시킨다. 남매는 살짝만 발을 헛디뎌도 고통스러운 기억이 생생하게 출몰하고, 겨우 이뤄낸 평정이 다시금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 가만히 누워만 있다. 마치 둘은 기억과 함께 얼어있는 것만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에게 버스 총격 사건 당시 운전기사였던 사와이가 찾아온다. 그는 처음 남매의 집에 갔을 때, 한참 동안 정경을 응시한다. 곰팡이가 슨 접시, 썩은 음식물, 수북이 쌓인 쓰레기. 


언어가 발달하지 못한 아이들은 외상 사건을 소화하기 위하여 그 사건과 똑 닮은 놀이를 강박적으로 재현한다. 그들은 고통을 ‘언어로’ 설명하지 못하고 단지 ‘몸으로’ 드러낸다. 버려진 집과 말을 잃은 오누이, 썩어가는 쓰레기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자신들의 고통을 심상으로, 냄새로, 기류로 전달한다. 그리고 사와이는 단지 지켜봄으로써 이 모든 것을 아프게 이해한 듯 보인다. 


방문 첫날, 사와이는 집을 치우고 남매에게 밥을 해 먹인다. 병뚜껑을 못 따는 코즈에는 도와주지만 밥을 더 달라는 의미로 밥공기를 들이대는 나오키에게는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으로 밥통을 가리킨다. 식사를 마친 셋은 마루에 누워 말없이 텔레비전만 본다. 그러다 사와이가 잠이 들어 코를 골자, 코즈에가 그의 코를 비틀어버린다. 결국 새벽녘이 되어서야 고이 잠든 셋의 몸통 위로 텔레비전 빛이 명멸한다.


이 장면은 글로 설명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이들의 첫날은 매우 아름답게 묘사된다. 마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2005)가 그랬듯, 씬 하나하나가 일상의 재치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아무도 모른다>는 네 남매가 엄마에게 버려져 나름 자기네들끼리 살아가다가 결국 막내가 죽게 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감독은 이 비극적인 사건을 직접적으로 고발하는 방식이 아니라,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사건’ 아래 감춰진 ‘아무도 모르는’ 네 남매의 일상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방식을 취한다. <유레카> 역시 비슷하다. 


두 영화는 거대한 비극, 하지만 추상적인 비극 대신 끊임없이 흐르는 사소한 일상을 다룬다. 주디스 허먼은 트라우마 생존자들이 기적처럼 모든 기억을 잊고 완전히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는 점과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절대로 잊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한 매일 외상이 생각날 것이다. 매일 슬퍼할 것이다. 그러나 외상은 더 이상 인생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 


끝났다고 안도할 때, 얄궂게도 기억과 상처는 또다시 욱신거릴지도 모르지만 그윽한 밥 냄새, 친구와의 사소한 말다툼, 오늘따라 잘 먹은 화장 같은 일상은 자꾸만 생존자들을 과거가 아닌 현실로 불러들일 것이다.


이러한 치유가 고립된 환경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른다. 영화에는 그런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사와이가 벽을 ‘똑똑’ 치면 한참 뒤에 아이들이 벽을 ‘똑똑’ 치고,  ‘똑똑똑’ 치면 또 ‘똑똑똑’ 친다. 서로의 고통에 대해 노크하며 안부를 묻는 것도, 응답하는 것도 자신들 뿐이다. 아이들을 돌보게 된 그에게, 직장동료 여자는 자신도 고아였다고, 당신처럼 나를 보살펴 줄 누군가가 있기를 간절히 바랐었다고 고백한다. 


위의 내용은 영화의 전반부에 해당하는데, 나는 여기까지 보고 버려진 아이들에게 양부가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랑말랑한 일본 영화들이 대안 가족이 형성됨과 동시에 상처가 치유되고, 식탁에 둘러 앉아 뜨거운 국물을 홀짝이며 위로받는 ‘그 놈의’ 자궁 같은 저녁식사로 이야기를 끝내는 것과 달리, <유레카>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모든 것은 훨씬 더 복잡하다.



고통의 의미

 

 

사와이는 왜 돌아왔을까. 그는 2년 동안 자신을 기다리다가 결국 집을 나간 부인에게 간절히 묻는다. “한 사람이 오직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부인은 당신이라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대상이 내가 아니었을 뿐이라고 마음 아프게 웃으며 말한다. 그날 사와이는 집에 돌아와 오열한다. 그는 남매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기타큐슈 사가> 3부작에는 타인을 거두는 인물이 자주 등장하는데, <유레카>에서 켄지는 자살한 야쿠자의 동생인 유리를(그는 후속작에서 중국인 고아 아이까지 맡아 기른다), <유레카>에서 사와이는 남매를 돌보고, <새드 베케이션>에서 마미야 운송 회사는 소위 말하는 ‘루저’로 전 직원을 구성하여 그들을 살핀다. 직원들은 사장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말한다.


타인을 거두는, 이들의 행위는 다소 강박적인 구석이 있다.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홀리듯 이끌리고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마미야 운송 회사의 사장은 왜 떨거지들을 데려다 돌보냐는 켄지의 물음에 누군가를 돌볼 수밖에 없는 마음을 너도 알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그 마음을 죄책감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버스 총격 사건에서 사와이와 남매를 제외한 모든 승객은 총에 맞아 죽었고, 그는 모든 일에 사과를 하는 버릇이 생긴다. 사고가 난 당일 밤, 작은 등 하나 켜놓고 방에 오도카니 앉아 “내가 살아난 것이 잘못인가?”라고 되뇌는 그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


또 한편으로는 ‘의미’에 대한 간절함도 느껴진다. 외상 사건이 충격적인 이유는 사건 자체의 성격도 있지만, 그 불합리성에 있다. 한 번 더 주디스 하먼을 인용하자면, “트라우마를 겪으면 평범한 사람이라도 신학자, 철학자, 법학자가 된다. 그들은 묻는다. ‘왜?’ 정답은 인간의 이해 너머에 있다.” 


계획된 것도, 예상한 바도, 죄 지은 것도 없이 돌연 불행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점에서 트라우마는 죽음을 닮아 있다. 생존자들은 모두 죽다 살아났다. 왜 하필 내가 죽을 뻔 했냐는 질문은, 왜 내가 굳이 살아야 했느냐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사와이는 코즈에에게 말한다. “우리는 살아남았어.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세상의 의미, 안전하다는 감각, 정의에 대한 믿음이 모두 붕괴된 상황에서 나약한 개인은 각자 매달릴 의미를 발견해야만 한다. 그것은 종교일 수도, 헌신일 수도, 가끔은 재향군인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빈 얄롬이 지적했듯이, 우리가 가진 ‘실존적 갈등’ 중 하나는 실제로는 무의미한 세계에서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는 데서 온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의미 없이는 살 수 없으므로 모두 의미를 발견해야만 하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의미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발견’했다고 믿는 것이다.


즉, 극단적인 경험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고통의 의미를 찾는 것이 불가피하지만, 의미는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고 내부에서 만들어냈기에 불안정하다. 겨우 붙잡고 있는 이 끈이 단지 합리화에 불과하다면, 이 괴로움이 무가치하다면 도대체 나에게 그 일은 왜 일어난 것일까. 의문과 의심은 시시각각 고개를 쳐들고 물끄러미 생존자의 눈을 응시한다. 그 응시를 피하기 위해 어떤 이는 광신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린다. 그 무너짐의 맨 끝은 어쩌면 자살 또는 살인일 것이다.



트라우마의 연쇄


 

아오야마 신지의 연작이 다른 트라우마 관련 영화들에 비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이유는, 실은 생존자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는지, 그로 인해 얼마나 고통 받는지 진지하게 대면하기 때문이다.


버스 총격 사건 남매 중 오빠인 나오키는 연쇄 살인범이 된다. 아까 언급했던 사와이에게 고아였음을 고백한 여직원도 그에게 살해당한다. 그리고 살인은 나오키를 사건의 처음으로, 버스 납치범 앞으로 되돌려 놓는다. 지극히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버스 납치범은 사와이에게 “다른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란 적 없어?”라고 묻더니, 그저 더는 안 되겠다며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남은 나오키는 여러 여자들을 칼로 찔러 죽인다.


고통은 돌고 돈다. 트라우마는 연쇄를 이루며 도미노처럼 인간들을 쓰러뜨린다. 아오야마 신지는 이 잔혹한 진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가족 폭력을 당해왔던 켄지의 엄마는 켄지와 아빠를 버리고, 이에 아빠는 정신병자가 되어 결국 자살하고, 아빠가 자살한 바로 그날 켄지는 살인미수를 저지르고(<헬프리스>), 10년 뒤 켄지는 엄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배다른 동생을 죽이고, 그 동생은 켄지가 보살피던 유리를 강간한다(<새드 베케이션>).


앞에서 서술했듯이 외상은 혼자서 치유할 수 없다. 인간에 의한 외상 뿐 아니라, 자연재해 역시 후속 대처나 사회적 지지에 따라 충격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음을 감안할 때, 기본적으로 외상 사건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 따라서 관계의 복원은 필수적이다. 영화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생활하던 나오키는 결국 살해당한 여성과 그녀의 가족들에게 트라우마를 입히게 된다.


개인 심리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고통이 방치되고 차가운 기념탑이나 던져주거나 성급한 용서만을 강요할 때, 고통을 당한 자들이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고통뿐이다. 아오야마 신지의 절친한 선배이기도 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절규>(2006)는 이를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 억울하게 죽은 여자 귀신과 눈이 마주친 자들은 그녀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고, 이에 다른 사람을 살해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귀신의 사려 깊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내가 죽었으니, 모두들 죽어 주세요.”


하지만 나오키와 켄지의 살인을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오키의 연쇄살인 행각을 알게 된 순간, 사와이는 나라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않은 줄 아느냐고 소리친다. 그렇다면 그가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했다 말하고, ‘용서’에 상대적으로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트라우마의 잔인한 무작위, 왜 네가 아니고 나였는지에 대한 억울함, 이미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손끝에서 빠져나가는 세상에 대한 신뢰와 의미. 이 불덩이를 심장에 안고 그래도 계속 살아가지 않는 한, 자발적인 선택이란 없다. 삶은 불덩이에 쫓기거나 이끌린다. 그리고 이 불덩이를 미지근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가치 있고, 여전히 선함이 남아있다는 신뢰는 혼자서 만들어낼 수 없다. 고통이 고통인 이유는 당사자 외의 모든 이가 한 치 걸러 두 치라는 데 있다. 이미 생존자들은 충분히 혼자였고,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고통 받았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은 사회가 아니라 생존자들에게 헌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광폭한 불덩이가 여전히 심장에 박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는 회사에서 결재 서류를 작성하고, 어떤 이는 조용히 양파를 까다 문득 창문을 올려다보고, 어떤 이는 얼음땡 놀이의 술래가 되어 힘껏 달리며, 어떤 이는 커피숍에서 친구의 칭얼거림을 두런두런 들어준다. 이들의 미미해 보이는 일상은 실은 엄청난 광휘를 담고 있다. 또 한해, 살아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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