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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Book

『심연을 탐사하는 고래의 눈』

by 내오랜꿈 2007.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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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태, 『심연을 탐사하는 고래의 눈』

 

『천의 고원』을 정리하다 감기라는 복병과 인터넷 사이트의 글쓰기에 개입하면서 한 주일을 쉬었다. 그래서 여유 시간에 흔들리는 머리에도 들어올 수 있게끔 가볍게 읽는다는 기분으로 잡게 된 책이 정선태의 『심연을 탐사하는 고래의 눈 :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과 그 외부』라는 책이다. 주말에 산행을 하는 바람에 마무리하지 못하고 오늘까지 연장하게 되었는데, 마지막 부분에 따로 독후감을 쓸 필요도 없을 만큼 간결하고 함축적인 지은이의 명쾌한 정리가 눈에 들어왔다. 

역사적 삶에 대한 해석은 해석 주체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지금까지 기록된 역사가 진실이라고 단언하는 데에는 많은 유보조항이 따라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을 도외시한 채 새로운 담론을 구성하기란 요원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어떠한 담론 구성이든 역사나 전통의 무게, 그 중압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한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라 일컬을 수 있는 사람들의 경우, 전통과 어떻게 대결하느냐는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다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전통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황무지에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심정으로 자기 사상을 구축한 사람이든, 전통을 유일한 진리라고 간주하고 이를 벗어난 사유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사람이든, 그리고 전통과 현실 사이에서 충혈된 눈으로 고투(苦鬪)를 감행한 사람이든 모두 전통의 압력을 무화(無化)할 수는 없었다.

역사나 전통은 선택적으로 기억되거나 망각된다. 또는 왜곡되거나 과장된다. 역사뿐만이 아니다. 인간 삶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일을 생명으로 하는 인문학이라면 어떤 분야든 이러한 전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전통이나 역사는 창조되고 날조되는 것이라는 말은 이미 상식에 속한다. 날조라는 말이 지닌 부정적인 뉘앙스에 미혹될 필요는 없다. 한국의 민족주의 사상가들이 단군신화를 재구성한 것이든 근대 일본의 지식인들이 천황제를 재구성한 것이든 모두 '날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덜 거북스러운 표현을 사용하자면 모든 인문학은 끊임없는 재발견과 재구성의 연속선상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모든 인문학은 '진리는 하나'라는 지극히 폭력적인 명제에 대항하는 것을 그 생명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진리'를 내파(內破), 그 허구성을 폭로하고 새로운 진리의 생성을 모색함으로써 인문학은 그 생명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297~298쪽) 

살아간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삶이란 얼마나 단조롭고 지겨운 것인가. 굳이 채
플린의 <모던타임즈>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컨베이어 벨트에서 이동하는’ 시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는 것일까, 지금 여기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나의 삶을 구성할 수는 없는 것일까. 

에드워드 홀의 『생명의 춤』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 키체족(마야문명을 구성하는 부족의 하나-인용자)에게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작곡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일과 유사하다. 적절하게 보낸 하루는 하나의 예술작품일 수 있고, 적절한 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하루는 재앙일 수 있다.” 

그러나 홀에 따르면 이러한 키체족의 삶은 서구의 눈으로, 근대적 합리성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차이를 분간해낼 수 없다고 한다. 살아간다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생은 자동적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묻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이 또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를 ‘책읽기’에 비유하면 어떤 추론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이디에선가 신채호는 자신의 글쓰기를 일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손이 발이 되며 대가리를 도끼 삼아 쓰는 글”이라고. 또 니체는 자신의 모든 책들이 “망치가 되고 다이너마이트”로 사용되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이것은 표현이 좀 그렇지만 우리의 ‘대가리’가 이성과 합리성의 도구가 아닌, 도끼가 되고 망치가 되어 우리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과 온몸으로 맞서는 무기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리라. 

평생 골방에 앉아 빈집을 지키는 은둔자의 글쓰기가 아닌, 끝없는 행동과 실천의 길 위에서 쓰는 글. 우리의 손가락이 컴퓨터 자판의 시녀가 아니라 공사판 노동자의 발바닥이 되어 날마다 세상의 흙먼지를 묻히는 살아있는 언어의 창조자가 되는 글쓰기.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를 제대로 알기 위해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한국의 개화 사상기는 물론 일본, 중국이라는 동아시아의 이 시기 사상 전반으로 되돌아가 악전고투하고 있는 지은이와 일군의 동료들에게 그야말로 존경과 찬사를 보내면서 이들의 노고를 아주 가볍게 착취해버리는 나 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글읽기와 글쓰기는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하는가를 새삼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두고 한국의 근대성이 어쩌고 이의 극복을 위한 것이라는 식의 틀에 박힌 출판사 보도자료를 옮기고 있는 저널리즘 비평이 그만큼 역겨워 보인다. 


1부 근대계몽기 서사문학의 스펙트럼 
1장 근대계몽기 문학적 서사담론의 정치적 리얼리즘 
2장 국민정신 형성의 정치적 상상력 
3장 국수의 발견과 윤리적 미의식 : 신채호를 통해 본 문학적 미의식의 기원 
4장 신소설에 비친 타자상과 자아상 : 『혈의루』를 중심으로 

2부 나쓰메 소세키 ·루쉰 ·입센이즘 
1장 나쓰메 소세키, 문명의 빛과 위대한 어둠 : 초기 3부작을 중심으로 
2장 루쉰, 절망의 심연을 탐사하는 충혈된 고래의 눈 
3정 입센주의의 번역과 동아시아의 근대성(1) : 후스와 루쉰의 경우 
4장 입센주의의 번역과 동아시아의 근대성(2) : 채만식의 『인형의 집을 나와서』 

3부 번역과 그 주변 
1장 민족담론과 탈식민주의 
2장 종교의 번역과 문명론 : 『독립신문』의 경우 
3장 한국 근대문학사의 서장을 고구하는 실증적 시선의 힘 
4장 일본에서의 한국문학 연구 
5장 번역과 다시쓰기 : 동아시아 담론 구성을 위한 노트 

부록 
근대미술의 제문제 : 오카쿠라 텐신 

 

written date:200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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