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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Book

[근대문학의 종언] 논쟁 - 장정일의 아주 웃기는 원맨쇼

by 내오랜꿈 2007.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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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이 아래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논점의 옳고 그름은 논외로 한다. 도입부인 첫번째 문단만 검토한다. 

"일본계 미국인인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기세 좋게 선언한 ‘역사의 종언’이 농담이 되고부터, 한국인들은 어떠한 일본제(製) ‘종언’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면 과장이 될까? 일본 출신으로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활동했던 가라타니 고진의 최근작 <근대문학의 종언>을 둘러싼 우리나라 문학계의 냉소를 보면, 그런 점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문학의 종언은 일본의 상황이지, 한국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 - 장정일, 위의 글

[근대문학의 종언] 논쟁1 - 이젠 ‘그들만의 문학’…근대문학은 끝났다 - 조영일 

[근대문학의 종언] 논쟁3 - 종언 ‘위기’를 근대문학의 ‘기회’로 - 권성우 

위의 두 글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듯이 장정일은 인용한 문단처럼 완전한 엉터리 전제를 도입하면서 마치 훈계하는 듯한 논조로 시작한다. 이것은 한마디로 장정일의 국어독해능력이 '빵점'이거나 의도적인 '조작'이다. 그가 조금 아래의 문단에서 최원식 교수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한겨레>에 연재된 다른 두 사람 조영일, 권성우 씨의 글을 읽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조영일, 권성우 씨는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에 냉소를 보내지도, 일본의 상황이지 한국의 상황은 아니라고 무시한 적도 없다. 

"오히려, 가라타니의 지적은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정확히 한국문학을 겨냥하고 있는 셈이다. (--- 중략) 그것은 오늘날의 한국문학이 문학시스템에 맞게 ‘그들만의 문학’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사회·역사적 변화를 통해 다양화되기보다는 제도가 만들어놓은 ‘문학성’에 의해 획일화되어버린 것이다." - 조영일, 위의 글 

"오히려 가라타니의 명제는 지금 이 시대 한국문학에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채 적용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근대문학의 종언’은 문학 일반의 종언이 아니라, 체제와 시스템을 뒤흔드는 비판적 문학의 근본적 위기쯤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 중략) 역설적인 맥락에서 늘 자명성에 대한 회의를 강조하는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 명제는 실상 우리에게 스스로가 속하거나 편승하고 있는 문단시스템과 거대언론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고 있는가를 되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권성우, 위의 글 

조영일, 권성우 씨의 입장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 누구도 가라타니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냉소를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장정일은 두 사람의 글 어디에서 그러한 냉소를 읽은 것일까? 참으로 신통방통한 재주를 지닌 장정일이 아닐 수 없다. 

한 마디 더 하자면 장정일이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건 사회과학에서 상식에 속하는 내용이거나, 조영일 씨가 앞선 글에서 이미 언급했던 것들이다. 장정일의 같잖은 오만함은 한마디로 꼴불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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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할 수 없는 ‘문학 종언’ 경고 


<인터넷한겨레> 2007 11 09

» 〈근대문학의 종언〉
 
장정일의 책 속 이슈 / 〈근대문학의 종언〉
가라타니 고진 지음·조영일 옮김/도서출판b·2만원
 

일본계 미국인인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기세 좋게 선언한 ‘역사의 종언’이 농담이 되고부터, 한국인들은 어떠한 일본제(製) ‘종언’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면 과장이 될까? 일본 출신으로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활동했던 가라타니 고진의 최근작 <근대문학의 종언>을 둘러싼 우리나라 문학계의 냉소를 보면, 그런 점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문학의 종언은 일본의 상황이지, 한국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의 주장은 간명하다. 근대 이전의 세계는 다수의 제국에 의해 지배되었고, 그 제국의 범위는 몇 개의 언어 권역과 일치한다. 동아시아라면 한자, 유럽이라면 라틴어, 이슬람이라면 아라비아어라는 식이다. ‘문자언어’의 성격이 강했던 이 세계어들은 제국의 주변부에 사는 보통 사람들이 읽고 쓰기가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제국은 수많은 지역 국가로 분절되기 시작했고, 근대 국가란 다름 아닌 ‘언문일치’의 국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문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근대 국가 만들기에 기여한다. 

지은이에 의하면 근대문학이란 어느 장르도 아닌, 소설을 가리킨다. 소설은 신학이나 철학과 같은 이성 능력이 아닌 감성과 상상력을 통해 새로 생긴 시민계급에게 지적·도덕적 발견을 실어 나른다. 제국과 세계어라는 구심력에서 벗어나서만 비로소 쓰여지는 ‘언문일치’의 소설은 ‘공감’이라는 수단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하나로 묶고,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드는 기반이 된다. 예컨대 일제 시대의 젊은이로 하여금 계몽과 해방의 주먹을 부르쥐게 했던 것은 이광수의 <무정>이고, 심훈의 <상록수>였다. 

근대소설은 그 발생에서부터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 밖에서 종교가 추구하지 못하는 진실을 추구했고, 또 정치는 아니지만 정치의 영역 밖에서 정치가 억압하는 진실을 드러내 왔다. 대개 문학은 무력하고 무위이고 반정치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성공한 혁명이 곧바로 제도가 되어버리는 어느 정치혁명보다 더 혁명적이다. 그래서 장 폴 사르트르는 정치혁명이 보수화될 때 문학은 “영구혁명”을 계속한다고 했던 것이지만, 어느날 문학이 사회적 임무나 도덕적 과제를 벗어버린다면 그것도 ‘근대문학’일 수 있을까? 

» 장정일의 책 속 이슈
 
근대국가와 자본주의가 성취된 대부분의 서구 선진국에서 문학은 대중문화에 투항하거나, 과민한 자의식만을 표현한다. 거기서 작가와 평론가들은 대학과 출판계에 안주하거나 투신하여 스스로 제도가 됨으로써, 사회적 ‘공감’ 능력을 잃게 된다.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의 종언’이 한국에서도 감지된다면서 “1990년대에 만났던 한국의 문예비평가 모두가 문학에서 손을 떼었다”고 썼지만, 최원식의 말대로 “내가 알기론 김종철을 제외하고 문학을 떠난 비평가는 없다.”(<한겨레> 10월 27일치 19면). 하지만 그걸 책잡아 ‘종언’이 주는 문제의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오만이다. 근 15년 동안 한국 문학이나 문학평론가들은 <녹색평론>을 능가하는 어떤 사회적 의제도 만들지 못했다. 유일하게 문학계를 떠난 그만이 그럴 수 있었다는 사실은, 결국 무엇을 반증하는 것일까?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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