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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Book

<미셸 푸코> - 광기와 성의 철학자, 그 고통과 투쟁의 삶

by 내오랜꿈 2007.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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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성의 철학자, 그 고통과 투쟁의 삶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광인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 미셸 푸코
ⓒ2003 차재업

'푸코'라는 이름은 참 다층적으로 다가오는 이름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라는 소설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라마 크리슈나'와 같은 요가 명상가로서의 '샤를 드 푸코'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는 철학자로서의, 사회운동가로서의 푸코는 보지 못하고, <성의 역사>의 푸코만 떼어내 윤리적 인문학자로서의 푸코만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뿐만 아니라 철학자, 정치학자로서의 푸코를 영유하는 방식도 사람들에 따라 너무나 편차가 심하다. 어떤 이는 그에게서 무정부주의자를 발견하고, 어떤 이는 위장된 마르크스주의자를 발견하며, 또 다른 이는 노골적인 반(反)마르크스주의자를 찾아내기도 한다.

실제로 사르트르는 푸코의 <말과 사물>을 "부르주아지가 마르크스에 대항해 세울 수 있는 마지막 장벽"이라고 혹평했다. 물론 이것은 <말과 사물>에 대한 사르트르의 몰이해에 근거한 비난에 불과한 것이긴 하지만. 또 사르트르와는 다른 차원에서 데리다와 그 유명한 '푸코-데리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지적 논쟁의 차원에서뿐만이 아니라 푸코는 드골주의의 선전자이자이자 동시에 교활한 신자유주의자라는, 푸코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비판을 받기도 했다.

 
▲ 1975년 9월 22일, 11명의 반체제 인사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스페인 정부에 항의하기위해 마드리드로 갔던 푸코와 지식인들이 스페인 정부로부터 추방당한후 루아시 공항에 내려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2003 차재업

이런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다가온 그의 죽음(1984년)은 보수 부르조아 언론이 보기에는 또 하나의 정치적 가십거리로 이용하기 딱 좋았던 재료이기도 했다. 당시 세상에 막 알려지기 시작한 '에이즈'라는 병명을 두고서 말이다. 분명 우리는 학자로서의 푸코를 기억해야 하겠지만, 그는 평생을 '마이너리티'를 위한 저항의 현장서 보낸 실천가이기도 하다. 곧 푸코는 명시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해 어떤 정치적, 이념적 깃발도 내세우지 않았지만, 정치적 반대자, 노동자, 죄수, 이민자, 동성애자(그 자신도 동성애자였다) 등 사회적 소수자들이 핍박 받는 곳에 늘 저항적 태도로 일관했던 '투사'였던 것이다..

'저기 푸코가 있다.'

기자 출신의 저자 디디에 에리봉은 이런 푸코의 삶을 치밀한 자료를 토대로 역동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실제로 에리봉은 푸코가 죽기 5년 전부터 푸코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그의 삶을 기록해왔던 터이기도 했다). "저기 푸코가 있다."는 말로 압축할 수 있을 만큼 푸코는 68년 5월 혁명 이후 84년 에이즈로 사망하기까지 '언제나' 거리에 있었다. 스페인, 폴란드는 물론 브라질이나 이란 등지를 무시로 드나들면서 이민자 운동, 감옥정보그룹, 사형제도 폐지, 동성애 권리 투쟁 등 그 자신이 필생의 과제로 연구하던 근대권력의 폭력성에 맞서 온몸으로 싸웠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말과 사물>을 펴낸 뒤 맑시즘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사르트르와 실천의 현장에서 모든 종류의 반파시즘 투쟁을 함께 하는 장면은 차라리 감동으로 다가온다. 논쟁은 논쟁이고 실천은 실천이었던 것이다. 8~90년대 대한민국의 소위 운동권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감동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 1972년 11월 27일, 이민자를 지지하는 데모를 벌이는 푸코(마이크를 든 사람).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사르트르다.
ⓒ2003 차재업

현대 유럽 지성사를 좌지우지 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던 천재철학자 푸코와 이민자, 죄수, 동성애자 등의 온갖 이질적 존재들과 함께 거리의 바리케이드 위에 서 있는 투사 푸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이런 푸코의 이론적, 실천적 이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광기의 역사>에서 <감시와 처벌>에 이르는 동안 푸코가 파헤치고 있는 '근대'라는, 우리가 흔히들 '합리성'이니 '이성'이니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서구 근대사회의 폭력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작동하는 주류사회의 통제 메카니즘


▲ 1971년 르몽드지 기사. "미셸 푸코가 경찰에 항의하다"라는 제목.
ⓒ2003 차재업

푸코에 따르면,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근대 이성의 성립과정은 눈물겨울 정도의 폭력이 수반되어 있다. 단적으로 예를 들어, <감시와 처벌>의 분석에 따르면 17세기 파리 시민 100명당 1명 꼴로 정신병원이라는 거대한 집단 수용소에 감금되어 길들여지는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이들이 감금되어진 이유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에 포섭되어지길 거부하는 '부랑자'라는 것이었다. 곧 경작할 농토를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과정'을 거쳐 빼앗긴 중세의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집시처럼 부랑자가 되고 이것은 근대 부르조아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려 먹을 노동력 부족의 근본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을 잡아들여 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 곧, 떠돌지 말고 가족을 이루어 노동력 재생산의 구조를 이루고 먹고 살 만큼이라도 주는 대로 받고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해야 한다는 그 '잘난' 도덕으로 길들여지는 과정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합리성'이니, '이성'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은 이렇듯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 이후에 확립된 사회통제 메커니즘에 다름 아닌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시대가 변하면 새로운 도덕, 새로운 메카니즘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렇게 변할 수 밖에 없는 도덕이라는, 윤리라는 이름 뒤에 숨어있는 사회적 위선이라는, 사회적 업압(장치)들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주류 사회의 '사회통제 메커니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범위하고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감옥이나 군대, 경찰 등 눈에 보이는 억압기제의 문제보다는 사회적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기검열'이라는 세뇌교육의 집요함 같은 것.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기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존재. 곧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과 규칙에 길들여짐으로써 생성되는 무의식적 자기 검열.

▲ 1978년 1월, 베를린의 한 집회에서.
ⓒ2003 차재업

마치 기계장치처럼 무의식적으로 각인되어 신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이런 통제 메커니즘을 푸코는 '생체권력'이라고 부른다(미셀 푸코, <성의 역사1:앎의 의지>). 이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개개인의 의지와 사고를 규칙과 규율에 따르게 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주체' 내지는 '인간'으로 만들어지게 되고, 이렇게 '생산된' 주체들은 마치 자기 자신이 가장 합리적이고 평균적인 사고를 하는 존재들로 인식되어지게 된다고 한다.

하여 이 범위를 벗어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자로 간주되어 '아웃사이더'로 낙인 찍히고, 이들 아웃사이더들은 주류사회에서 배척되고, 심하면 감금되어 인간으로 '갱생'하는 처벌을 받기도 한다. 적어도 이 '아웃사이더'의 존재는 우리 사회와 체제를 위협하는 가장 암적인 존재로 낙인 찍히게 되는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근대사회의 모습, 곧 몇 백년 전의 역사자료에서 보여지는 것을 질료로 삼아 눈 앞의 현실문제에 연결하는 천재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푸코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했을 때 그가 왜 '감옥반대운동'이나 '동성애자 권리 운동' 등 당시 주류 좌파세력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아웃사이더적 실천들에 깊숙히 개입했던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1983년 자기 서재에서.
ⓒ2003 차재업


어쨌던 푸코의 세계는 온갖 해석을 허용하되 어떤 하나의 해석적 틀도 거부하는 '천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푸코에 대한 하나의 해석은 엄밀히 말해 '푸코의 세계'가 아니라 '푸코들의 세계'다. 예컨대 들뢰즈의 푸코 해설서가 통용되는 방식인 <들뢰즈의 푸코>처럼(지난 번에 소개한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역시 이와 같은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디디에 에리봉의 푸코 전기 <미셸푸코>는 이러한 투사로서의 푸코, 콜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로서의 '예술작품' 같은 푸코의 삶이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의 삶이나 철학과는 달리 결코 무겁지만은 않은 필체로 또 하나의 푸코(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한 번쯤 빠져들어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그런 세계이다.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上 下), 박정자 역, 시각과언어(1995)

위 사진들은 이 책의 역자이기도 한 상명대학교 불어교육과 박정자 교수의 홈페이지(http://deer.sangmyung.ac.kr/~cjpark/)에서 양해를 구하고 인용한 것들입니다. 박 교수의 홈페이지에는 본문에서 언급한 '푸코-데리다' 논쟁 등 푸코와 사르트르에 관해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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