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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습/세상

"좋은 부모 나쁜 부모" - 정치는 일상이다

by 내오랜꿈 2014.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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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비평이론가인 롤랑 바르트가 1963년 극작가 라신에 대한 연구서(『라신에 대하여』)에서 기존의 전통적 비평(실증적 비평 또는 전기적 비평이라 불리는) 방법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비평을 선보이자 프랑스 문학계는 한바탕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특히 소르본 대학의 교수였던 피카르가 『새로운 비평이냐 새로운 사기냐』라는 자극적 제목으로 바르트를 비판함으로써 논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이 논쟁의 한가운데서 발표된 『저자의 죽음』(1967)이라는 에세이에서 바르트는 현대 비평의 패러다임을 바꾸게 되는 계기를 가져온 이른바 '저자의 죽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바르트 이전의 문예비평은 모두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핵심이었다. 어떤 작품을 쓸 때 저자의 사상이 어떠했는지, 주변 환경은 어떠했는지, 저자에게 영향을 끼친 스승이나 부모가 있는지, 심지어 부모의 직업은 무엇이며 저자가 연인이나 주변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은 어떠했는지 같은 신변잡기적 사실 등을 찾아내어 작품과 결부시켜 해석하는 게 문예비평의 주된 영역이었다. 1960대 초까지 지배적이던 이러한 실증적, 전기적 비평방식을 비판한 바르트의 비평이론을 수사학적으로 표현하면 이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텍스트는 텍스트고 사람은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텍스트가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그 텍스트의 주인은 이제 저자가 아니기에 저자와 완전히 분리하여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표현을 빌자면 '저자가 죽는 지점에서 글이 시작된다.' 이렇게 저자가 죽으면서 탄생하는 것은 독자다. 따라서 텍스트는 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만들어내는 것이 된다. 문학작품의 위대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듯한 바르트의 이러한 신비평 이론에 대해 프랑스 문학계의 저항이 얼마나 드세었을지는 안 봐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오죽했으면 '사기'라는 표현이 전면에 등장하기까지 했을까? 그러나 논쟁의 격렬함에 비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세는 바르트의 신비평 쪽으로 돌아서게 된다. 문학계 뿐만이 아니라 구조주의나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의 글이나 작품 속에서 신비평은 이미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 예컨대 르네 마그리트를 다룬 푸코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1968) 같은 에세이는 단순히 작품에 대한 미학적 평가를 넘어 하나의 철학적 사유를 제시하는 새로운 문학작품으로 인정받게 된다. 반 고흐를 다룬 데리다의 『회화 속의 진리』나 프란시스 베이컨(그 유명한 「절규」의 작가다)을 다룬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도 대상(=작품)에서 독립하여 그 자체가 문학작품이 된 예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비평계에서 더 이상 저자의 이력 등을 근거로 작품을 비평하는 사람은 사라지게 된다.



왜 갑자기 바르트냐고? 몇 개의 SNS 사이트에 '좋은 부모 나쁜 부모'(http://www.podbbang.com/ziksir/view/1148)라는 제목의 짤막한 시사만화를 링크했다. 다양한 생각들을 가진 집단인지라 반응이 하나로 통일된 건 아니지만 대체로 보면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나쁜 부모였던 거 같아서 반성한다'는 내용, 다른 하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 교육 시스템의 문제를 언급하는 내용이다. 사실 이 만화는 조금만 생각있는 사람이라면 요즈음의 세태, 예컨대 아파트 경비원의 자살로 촉발된, '사회적 약자'를 경원시하는 대한민국의 사회풍조를 고발하는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만화의 모두에 "본 만화에 등장하는 환경미화원은 우리 사회에서 차별받는 육체노동자 계급을 상징하는 배경으로" 차용한다는 걸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기까지 하다.


따라서 이 만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직업이나 배움에 따라 사회적 차별이 없는 세상이어야 한다(또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핵심 골자다. 아파트 경비원이라고 강아지한테 먹이 던져주듯 무시하는 인간들이나 환경미화원이라는 직업이라고 해서 나쁘고 안 좋은 것이라고 인식하는 사람, 세태에 대한 풍자인 것이다. 이게 작가의 의도이든 아니든 이 작품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댓글을 달며 논의를 진행한다.



그런데 의외의 집단이나 사람들도 존재한다. 이 작품을 보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거나 부모가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게 뭐가 나쁘냐는 식으로 반응하거나 둘 다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또는 만화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표현방식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언급을 하기도 한다. 이외에 '제일 어려운 일이다',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등의 반응도 모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선택의 기준은 '환경미화원(=차별받는 사회적 약자 그룹)은 안 좋은 것'이라는 전제(비록 자신이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 하든)를 깔고 있다. 다시 말해서 '주어진 텍스트'는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 텍스트를 읽는 '독자'는 사회적 약자는 안 좋은 것이고 자식한테는 환경미화원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교육할 수(도) 있다거나 그렇게 교육한다고 그게 '나쁜 부모'라고 이야기 할 수 없지 않느냐는 대답을 하고 있는 셈이다.


바르트 식으로 표현하면 텍스트의 의미를 저자가 아니라 독자가 독해를 통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주 독창적이거나 특별한 의미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특히나 텍스트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을 때는. 그럼에도 아주 독창적이거나 특별한 해석을 하는 경우는 대부분 한 가지 경우라고 보아야 한다. 독자가 그 텍스트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이렇게 세 컷짜리 만화에도 개입하는 우리의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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