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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산 · 트레킹

발포항 트레킹 - 관찰자의 시선이 투과되어 나타나는 풍경

by 내오랜꿈 2014.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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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면 가끔씩 우리 집은 실랑이가 벌어진다. '산에 가자'는 나와 '가기 싫다'는 아내 사이에. 올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별 이견 없이 한 주는 산에, 한 주는 진주의 밭으로 가는 생활이 '루틴화'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 3월 중순경, 아내의 간단한 외과수술을 위한 입원 이후 이 '루틴한' 일상이 깨지게 된다. 수술에 따른 원기회복이라는 구실로. 처음 3개월 정도는 뭐,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당위를 누가 거부할 수 있으랴. 하지만 '당위'도 지나치면 '핑계'가 된다. 퇴원한 지 4개월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내가 보기엔 이미 '지나치게 회복된' 몸을 하고 있는데도 산에 가자는 내 말을 거부하기 일쑤다. 이러니 실랑이가 일어날 수밖에.




휴일 아침에도 산에 가자는 나의 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아내에게 수정 제안해서 이루어진 게 발포항 트레킹이다. 집에서 발포항까지는 왕복으로 약 15Km 정도. 주변 풍경 감상하며 천천히 걸어도 네 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집을 나서자마자 길가에 핀 봉숭아가 여름의 끝자락을 힘겹게 붙잡고 있다. 언제였던가, 내 손톱 끝에 봉숭아물 들이던 때가. 시간은 늘 추억을 앞질러 지나가버린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어느 시간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벌이었을 들녘에 노오란 물결이 번지고 있다. 허수아비 대신 바람에 나부끼는 반짝이 종이인형이 애처롭다. 요즘 참새가 설마 저 종이 나부랑이에 속을 리 만무할테니 말이다. 첨단 디지털 프로그램에 입력되어 들판에 울리는 요란한 총포 소리에도 아랑곳 않는 참새 아니던가. 인간과 자연의 싸움은 언제나 인간이 지게 되어 있다. 잠시나마 이긴 듯 보이는 그 시간 동안에도 자연은 인간이 일으킨 변화에 적응하고 있으니까. 자연은 인간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공존해야 할 대상이 아니겠는가. 자연은 인간에게 있어 '오래된 미래'일 뿐이다.




푸르런 들판을 벗어나 발포항으로 가는 길옆, 모과와 호박이 익어가는 어느 농가의 담벼락이 눈길을 끈다. 흔하디 흔한 호박 하나라도 때에 따라서는 이런 손길이 가야 한다. 농산물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의 입장이 되어 보면 내 입에 들어가는 먹거리들이 단순히 돈과 교환되는 상품만은 아님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하긴 요즘은 농산물 생산자가 자신이 생산하는 먹거리들을 '돈'과 교환되는 '상품'으로 보는 경향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더 많은 돈을 위해서는 상품에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생산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먹거리에 대한 올바른 소비자 의식을 운운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한 시간여를 걷고 나니 발포항으로 들어가는 갈래길이 나온다. 이 방향으로 올 경우는 주로 발포해수욕장 쪽으로 갔었기에 발포항은 걸어서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발포해수욕장의 탁 트인 전망과 모래사장의 유혹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5년을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건 다시 생각해봐도 조금 의외다. 우리 집 주변에서 걸어서 5시간 정도의 거리는 안 가본 곳이 거의 없는데 말이다.




한 시간 반 정도 걸어서 도착한 발포항. 보건소도 있고 해양경찰 파출소도 있으니 분명 제법 큰 동네다. 하지만 내 눈에는 화려한 옛 영화를 간직한 채 이미 쇠락할대로 쇠락한, 한적한 포구일 뿐이다. 이 발포항에는 아직도 발포만호성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발포만호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참 전에 이순신 장군이 이곳 만호로 부임하여 18개월 동안 근무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 옛날 전라좌수영 관할의 5개 만호 가운데 3개가 고흥에 있었다. 녹도만호, 발포만호, 사도만호. 이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고흥군의 인구는 1968년에 28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지금 인구수 29만 명으로 전남 제일의 도시인 여수 인구가 당시에 26만 명이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2014년 4월 30일 기준, 고흥군의 인구는 7만 명 수준. 65세 이상 노령인구비율이 40%가 넘는 전남 유일의 행정구역. 앞으로 더 줄어들 일만 남은 셈이다. 


자연 그대로의 풍경은 없다. 어떤 형태로든 관찰자의 시선이 투과되어 있기 마련이다. 한적한 일요일 오전, 발포항의 풍경은 보는 이에 따라 고요하고 한갓진 모습일 수도 있고, 쇠락하고 궁벽한 모습일 수도 있다. 




이것저것 감상하느라 4시간 가까이 거닐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침에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 세 가지나 눈에 띈다. 9월이 코앞인데 마구 피어나는 치자꽃과 붉은 빛깔로 익어가는 초피 열매, 그리고 김장무 파종밭을 밟아서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삼순이. 치자꽃과 초피 열매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못 본 것이니 나의 불찰이지만 우리가 집을 비운 그 짧은 시간 동안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하는 무를 밟아 엉망으로 만든 삼순이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저 순진한 얼굴에 속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눔의 시키, 너 오늘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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