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8.17 (금), 삽질의 하루
남편이 일본 여행을 확정했을 때 나는 썩 내키지 않는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하다가, 출발 하루 전에야 이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회사 다닐 때 출장으로 몇 번 해외에 나간 적은 있으나, 사비를 들인 첫 해외 여행지가 언어가 좀 되는 일본이고 두번째 방문이어서 조금은 푸근한 마음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동행한 7명 중 이번 여행을 주도한 'H'를 포함하여 4명이 현직 역사선생인지라 5박 6일 동안 간사이 지방의 문화유적지 투어 중심으로 짜여진 빡빡한 일정의 강행군이었지만 웬만큼 걷는 일에 자신하는 터여서 별다른 걱정이 없었는데, 기내에서 접한 일본의 폭염주의보, 섭씨 40.9도에 13명이 쓰러졌다는 뉴스는 다소 공포스러웠다.
간단한 기내식을 먹고 출입국 카드를 작성하고 비디오 좀 보니 금방 목적지다. 오사카 국제공항의 과밀화와 소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도심에서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간사이 공항은 바다를 매립하여 인공섬을 만든 다음 공항을 건설하였으므로 24시간 이착륙이 가능한 해상 공항인데, 상공에서 내려다 본 전경이 멋지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더운 열기가 온몸에 느껴졌고, 사람이 꽤 붐벼서 입국 심사와 짐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한 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부산에서 먼저 출발하여 우리 부부가 오기를 눈빠지게 기다리는 일행들과 반갑게 조우했다. 모두 남편의 20년지기 대학 후배들이다.
우리를 기다리는 자투리 시간에 'KANSAI THRU PASS' 2일권(3,800엔)은 일행들이 미리 사두었으므로, 여권과 교환증을 들고 허급지급 공항 내의 입국장 왼편에 있는 관광 안내소에 갔다. 다른 물가에 비해 교통비가 다소 부담스러운 일본에서 단기 여행자에게 유리한 'JR-WEST RAIL PASS'를 교환하면서 10년간 녹슬었던 일본어의 포문이 열렸다.
계획상으로는 간단히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교토의 유적지들을(니죠죠 - 히가시혼간지 - 니시혼간지 정도) 후다닥 둘러본 후, 야간놀이로 공중광장, 공중경로, 테즈카오 사무월드 등에서 열심히 놀다가 숙소에 드는 것이었는데, 첫날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 보다 소소한 곳에서 시간을 잡혀먹은 결과로 점심은 생략했는데도 JR 하루카를 타고 교토역에 도착하니, 훌쩍 3시를 넘고 있었다. 일본의 유적지들은 보통 네,다섯시면 문을 닫기 때문에 일단 우리가 묵을 호텔 앞에 있는 '니죠죠'만 들리기로 했다.
JR 하루카를 타고 교토역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구내 2층에 있는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려 지도와 버스 일일권(대인 500엔)을 구매하고 일행들이 기다리는 중앙 출구로 나오니, 당황스럽고 황망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것인 줄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가방에서 낯선 이름의 태그를 발견한 것이다. 외형과 크기가 유사하다지만 착각해도 유분수지, 덜렁거리는 성격이 집 나와서 여지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할 수 없이 간사이 공항까지 되돌아갈 수밖에. 김해공항에서 빠리바게뜨 텍으로 표시한 일행들의 센스에 감탄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1603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 이후 이에야스가 천황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정식으로 쇼군 칭호를 내리도록 하면서 쇼군의 교토 숙소로 지어져 에도 바쿠후의 시작을 알린 곳이이기도 하고, 1867년, 에도 바쿠후의 막을 내린 '대정봉환'-권력과 주권을 천황에게 반납-의 조서를 내린 장소이기도 한 <니죠죠>. 이 니죠죠를 무척 보고 싶어했던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에 혼자 가려니까, 일행들이 절대 안된다고 남편의 등을 떠밀었다. 바보짓도 정도껏 해야지, 어이하여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이것도 자유여행의 묘미라는 말과 일본에 체류할 5박6일 동안 남편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조건으로 된잔소리를 일단 피했다.^^
니죠성 사진은 이튿날 호텔에서 지하철 타러 가면서 찍은 것. 해자에 둘러 쌓인 성을 보고 있으니 너나 할 것 없이 별로 볼 게 없다는 말로 위로 했지만, 교토에 와서 니죠성을 못보고 간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냐는 남편의 아쉬운 한탄이 아니더라도 '도쿠가와 이에야스' 전집을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나 역시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아, 니죠죠의 아쉬움에 잠깐 삼천포로 빠졌는데, 일행들은 니죠죠를 둘러본 후 숙소 체크인을 하고, 7시쯤 다시 교토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JR 하루카에서 배가 고팠던 남편은 도시락을 깨끗이 비우고, 나는 두어 젓가락 뒤적거리다가 도저히 넘어가지 않아서 버렸다.
비오듯 주루룩 육수를 흘리며 물어물어 간사이 국제공항의 아시아나 항공 사무실에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내가 잘못 가져온 짐을 화물로 붙였다. 외국 나온 첫날부터 짐을 잃어버려 황당했을 주인에게 전화상으로 실수를 사죄하고, 애물단지 내 가방을 찾았다. 그 사이 남편은 자동판매기에서 아사히 맥주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한모금 얻어 먹었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 왔다 갔다해서 어느새 친숙해져버린 간사이 공항 JR 타는 곳
▲ 짐을 찾아 다시 하루카를 타고 교토 가는 길에 배롱나무 군락이 인상적이어서 셔터를 눌렀는데, 빠른 속도에 제대로 안 잡혔음.
어쨌거나 말이 쉽지 교토에서 간사이국제공항까지 다시 갔다 오는 일은 만만찮다. 다행히도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간사이 공항에서 교토까지(1시간 15분 정도 소요) 빨리 갈 수 있는 'JR-West Kansai Area Pass' 일일이용권을 사둔 잇점이 십분 발휘된 순간이다. 하루 동안 JR을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이 패스를 사지 않았으면 교통비가 얼마나 나왔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럴 때 "뽕을 뽑았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하겠다.
다시 JR 교토역에 도착, 일행들을 기다리며 천년고도의 관문인 驛舍의 초현대식 건물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예전에 내가 교토에 왔을 때는 없었던 건물인데, 1997년에 헤이안 수도 1200주년 기념사업으로 1997년에 오픈했다 한다. 역 주변의 백화점, 호텔, 빌딩들 때문에 언뜻 보면 대도시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이 거대한 역사를 두고 찬반양론이 분분했다지만 모던한 외관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교토역 내의 극장존에 만화 '아톰'으로 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테즈카 오사무'의 스튜디오가 있고, 캐릭터숍인 '데즈카 오사무 와루도'가 있다. 어렸을 때 친근한 케릭터라 들리고 싶었는데, 개장이 저녁 7시까지라 아쉬웠다. 위용을 자랑하며 층층이 양쪽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트와 실내 사진을 몇 컷 찍었는데 모두 시꺼멓게 나와서 아랫쪽을 보고 찍은 이것이 그나마 볼만하다.
9층 레스토랑은 너무 비싸서 못가고, 10층의 소바가에서 줄을 선 끝에 일본 라면을 먹었는데, 뼈를 우려낸 느끼한 국물에, 짠 맛이 강해서 크게 실망했다. 일본 음식이 대체로 담백하고 싱거울 것이라는 선입견을 확 뒤집는 맛이었다. 대신 차디찬 얼음냉수를 몇 통이나 비운 것으로 위로 삼고 스카이 라운지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교토 야경을 즐겼다.
교토역 중앙 출구 맞은편에 있는 <교토 타워>는 바다가 없는 교토를 지키는 등대를 형상화시킨 것이라 한다. 철판을 용접하여 세운 덕분에 지난 고배 대지진 때 심한 흔들림 속에서도 잘 견뎌주었단다. 교토역사를 빠져 나와 물어 물어 100엔샵을 찾아 갔으나 또다시 폐문. 하는 수 없이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와 안주거리를 사서 버스로 숙소인 '고쿠사이 호텔'로 돌아갔다.
하루 일정이 끝나면 3인실에 모여, 새벽 1시나 2시까지 각종 일본 생맥주를 돌려 마시며 뒤풀이를 가졌다. 더운 날씨 탓도 있었지만 점심이나 저녁을 먹을 때 곁들일 만큼 모두들 일본 맥주를 좋아했다. 하루 종일 걷고, 아침 6시반에 어김없이 기상하여 아침을 꼬박꼬박 챙겨먹으며, 누구 한 사람 불평하지 않고 즐겁게 다녔으니, 최고의 길동무들이다.
☞ 잠깐, 이틀밤을 묵었던 교토 고쿠사이호텔(京都ホテル) 소개
▲ 니죠죠(二 城) 바로 앞에 있는 이 호텔은 옛 후쿠이(福井)방주의 저택이 있었던 유서 깊은 곳에 세워졌다.
▲ 아름다운 일본정원에 고니가 노니는 그림같은 풍경을 만끽하며, 일식과 양식이 적절히 조화된, 뷔페식의 맛있는 아침 식사가 가능하다. 평소 아침은 토마토 쥬스 한잔이 전부인데, 하루 종일 많이 걸어야하는 부담감에 체력안배를 위해 꾸역꾸역 잘 먹어두기로 했다.
▲ 2인실 2개와 3인실 1개를 사용했는데, 사진의 방 구조는 2인실이다. 다소 좁다고 생각되어지나 일반 비지니스 호텔과 비교하면 거짓말 좀 보태서 운동장 수준.
▲ 마실 것이 갖춰진 공간 맞은 편에 세면대가 있고 그 왼편 문을 열면 비데가 설치된 욕실이 있다.
written by 느티 2007 0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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