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중 하루는 집에서 제일 가까운 산으로 갔다. 목표로 삼은 천등산은 고흥에서 팔영산, 거금도의 적대봉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처음 이사 와서 간 적이 있는데, 아내의 컨디션 난조로 중도에 내려온 산이기도 하다. 천등산에 오르는 여러 코스 중 우리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풍양면 송정리 송정마을에서 시작하여 딸각산을 거쳐가는 제일 긴 코스를 선택했다.
논을 메워 새로 조성한 송정마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마을길을 걷는다. 아직 봄바람이라고 하기에는 이르지만 설
연휴의 반짝 추위를 뒤로 하고 피부에 닿는 해풍의 감촉이 한결 부드럽고 포근하다. 최근에 등산로를 정비했는지 주차장도 생겼고, 이정표도 잘 되어 있어서 3년 전과는 달리 헤매지 않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섬을 모면한 고흥에서의 산행길은 어느 산이나 아름다운 다도해가 함께 한다. 가시나무재에서 가쁜 숨을 잠시 재우고 땀을 식힌다. 주변이 시원하게 트여서 발아래로는 풍남항, 송정마을과 천등마을의 풍경이 소박하게 다가온다. 시계가 흐려서 또렷하지는 않지만 남서쪽의 거금도 다리와 적대봉, 녹동과 아픈 역사의 오마도 간척지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한 시간 가량 걸려서 딸각산 정상에 올랐는데, 표지대가 지난 태풍에 뽑혔나보다. 딸각산의 유래는 바위산인 이 산을 오를 때 "딸각딸각" 소리가 난다고 '딸각산'이라 불렸던 것이 '달각산'으로 바뀌었고, 다시 한자 표기를 하려다 보니 '달 월(月)'자와 '뿔 각(角)'자를 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곳곳의 이정표가 통일되지 않고 여러 이름으로 안내를 하고 있다.
동북쪽에 병풍치듯 천등산 정상부 남벽이 통째로 보이고, 자동차 통행이 가능한 임도가 산 허리를 가로지르고 있다. 저 산복도로를 보니 예전에 천등산을 오른다고 했을 때 마을 아저씨께서 '차 타고 가면 되지 뭣하러 쎄빠지게 걸어가냐'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평생을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온 동네분들이 보기에는 우리의 산행이 시간이 남아돌아서 하는 '뻘짓' 쯤으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천등산의 봄은 철쭉으로 유명한데, 산 정상부에 철쭉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지금은 비록 한산하지만 축제 때가 되면 전국의 관광버스가 몰려드는 곳이다. 나뭇잎과 꽃으로 한껏 멋을 부린 보도블럭. 보기에 무궁화 같지만 철쭉공원이니까 철쭉을 표현한 것이리라.
철쭉공원에서 정상으로 오르고 있는데 뒤에서 '야호!' 하는 소리가 들린다. 정작 산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 부부인데, 임도를 걸을 때 지나가던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철쭉공원 데스크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며 온갖 폼은 다 잡고 있다.
'하늘로 오르는 산' 또는 '봉우리가 하늘에 닿을 듯한 산'이라 하여 천등산이라고 불린다 한다. 데크를 지나 능선길로 들어서니 정상이 완만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으로 가는 길 옆으로 고사목이 된 소나무가 이색적이다. 그러고 보니 정상부에는 큰 나무들이 거의 없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닌데 모진 바닷바람 탓일까?
오르락내리락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어렵지 않게 천등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석은 없지만 옛날에 봉화대로 쓰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도 태풍 피해를 입은 것 같다. 요즘 고흥에서 나름 유명한 산에 가면 저렇게 칼로리 계산을 해놓은 친절한 표지가 눈에 띈다.
전망 좋은 너럭바위(신선대라고도 함)에서 막걸리와 계란 등으로 잠시 허기를 채운다. 발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끔씩산책 삼아 들리는 금탑사가 보인다. 선덕여왕 때 창건된 천년고찰이라 하는데 지금은 비구니 절이다. 비자나무 숲으로 유명한데, 위에서 내려다 보니 3300여 그루가 자생한다고 하는 설명에 비해서 규모가 그리 커 보이지는 않는다.
반대편 하산길은 응달이라 얼음이 녹지 않아 미끄럽고 많이 가파르다. 아무 생각없이 걷기만 하다가 주차장이 있는 송정마을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이상 기후를 느꼈을 때는 이미 정상에서 한참 내려온 뒤다. 중간에 '사스목재'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했는데, 엉뚱하게 미인치재라는 곳까지 와 버렸다. 다시 방향을 틀어 사동마을 쪽으로 향한다. 아무래도 한참을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산을 다 내려오니 사동저수지 근처에 오두막이 한 채 있다. 평소 다니던 아스팔트길을 따라 주차장까지 가느냐, 아니면 임도를 따라 사스막재까지 다시 올라가느냐의 두 갈래 길. 잠깐 망설이다가 애초 계획한 코스도 확인할 겸 후자를 선택하여 몇 굽이를 오르기 시작한다.
30여 분을 더 걸어 파고라 쉼터가 있는 사스목재에 도착. 이 코스로 내려왔으면 고작 1.1km인데, 길 한 번 잘못 든덕분에 거의 8km를 더 걸어야 했다. 누군가가 세워 놓은 소나무 지팡이. 임시방편 치고는 아주 그럴 듯하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작은 무덤을 지나 5분 정도 걸으니 임도가 나온다. 왼쪽으로 헉헉대며 올랐던 딸각산이 너무 만만해 보인다.
사스목재에서 20분 정도 여유 있게 걸으니 천등마을이다. 겨울이지만 벼와 함께 이모작을 하는 마늘 농사로 온 들판이 푸르다. 집에 돌아와 지도를 찾아 산행길을 되짚어 본다. 빨간색은 계획상의 여정이고, 시행착오로 미인치까지 파란색의 여정이 보태져서 5시간의 긴 산행이 되어버렸다.
written by 느티 2013 0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