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날씨가 좋으면 별다른 일 없는 한 산행을 한다. 일요일 오전, 고흥 읍내와 연결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운암산을 다녀왔다. 작년에 이 산을 갔다가 코스를 잘못 잡아서 조금 헤매다가 팔영산으로 선회한 산이기도 하다.
운암산 등산은 고흥읍 쪽에서 운암산을 먼저 오른 후 깃대봉을 거쳐 포두면 서촌마을로 내려오는 게 일반적인 코스다. 우리는 서촌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깃대봉을 오른 후 운암산을 거쳐 송산 저수지 옆으로 내려오는, 원점회귀형 코스로 계획을 잡았다.
점심으로 김밥을 준비하고 해창만 간척지를 가로질러 서촌마을 주차장에 닿으니 10시가 가까워 온다. 주차장 한편으로 400살 먹은 느티나무가 주변을 덮고 있다. 마을길을 벗어나니 길옆으로 전지 잘 된 매실밭의 매화가 서서히 꽃망울을 터뜨리는 중이다. 서촌마을을 지난 들녘 너머에 깃대봉과 운암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제와는 달리 바람이 불어 약간 쌀쌀한 기운은 있지만 걷기에 참으로 좋은 날이다.
마을길을 벗어나 본격적인 산행길을 10여 분 올라 시야가 확 트인 곳에서 올라온 길을 돌아보니 주차한 곳에서 산행 시작점까지의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들판을 지나면서 보니 이 마을은 축사가 군데군데 눈에 띄는데, 소파동 때문인지 빈 축사가 많은 것 같다. 옆으로 눈을 돌리니 팔영산이 가까이 잡힌다. 팔영산 여덟 봉을 이렇게 선명하게 보기는 처음인 것 같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산행길 한 켠에 누군가 정성을 다해 쌓은 돌탑들도 보이고, 그 사이로 수줍은 듯 진달래가 피기 직전이고, 생강꽃도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중이다. 돌탑 무더기 한편에 붙여 놓은 프린트물을 들여다 보니 눈에 많이 익은 싯귀다.
좀 더 올라가서도 돌탑은 계속 만난다. 저 허술한 모양새를 하고서 지난 태풍 때 어떻게 견뎠는지 자못 궁금하다. 돌탑도 그렇고, 등산로 가장자리로 동백 묘목, 자생난을 심은 흔적으로 봐서 누군가 지속적으로 가꾼 흔적이 보인다.
죽순바위 오르기 직전에 만난 쉼터. 한 채는 공사중이고, 한 채는 아래쪽에 있는데, 샘물이 솟아 나고 있어서 목을 축일 수 있다. 아래쪽 쉼터에는 솥이 걸려 있고, 남자들 몇이서 솥에 불을 피우고 뭔가를 삶고 있었는데 산불이 민감한 때에 저리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정상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먹고 가라는 인사를 받았지만 정체를 궁금해 하며 우리들 갈길을 간다.
자연이 만든 분재 같은 소나무 뒤로 우뚝 솟은 죽순바위. 힘들게 올라왔으니 사방이 확 트인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역시 산행의 백미는 조망이 아닌가 싶다. 간척지인 해창만이 드넓게 펼쳐지고, 정중앙에 언젠가 포스팅 한 적 있는 오취마을도 보인다. 이렇게 보니 산이 들을 품어 어머니 품 같이 포근한 느낌이다.
죽순바위에서 깃대봉 정상까지는 금방이다. 여기도 탁 트인 시야를 자랑한다. 이정표 사이로 한 고개 넘어 운암산 정상이 완만하게 보인다.
여기가 487m 운암산 정상 표시석이 있는 곳이다. 쉬엄쉬엄 걸었더니 1시간 40분 정도 걸린 듯. 오르는 중간에 철 모르는 뱀이 햇볕을 쬐다 인기척에 놀라 수풀 속으로 사라진다. 초여름을 방불케 한 날씨에 뱀이 깨어날 시기를 착각했나 보다.
정상에서 잠시 휴식. 겨우내 막걸리를 천대했는데, 작은 물병에 담아온 것을 봄동전과 함께 먹으니 꿀맛이 따로 없다. 더불어 삶아온 계란도 요깃거리로 충분한지라 자투리 채소로 간단히 말은 김밥은 몇 개 집어 먹다 나중에 먹자며 다시 배낭 속으로 넣는다.
볏바위 능선길 따라 조심조심, 서북방면으로는 보성과 면한 득량만이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하산길에 차질이 생겼다. 주차한 곳을 가려면 송산 저수지 방면으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데, 아무리 살펴도 길이 안 보인다. 상세 지도를 보고 산행길을 잡아도 사람의 발길이 뜸한 코스는 길 같아 보이지 않아서 지나치기 마련이다. 하는 수 없이 길이 잘 닦인 수도암 쪽으로 하산을 서둘렀다.
진돗개 두 마리가 사람의 인적을 느끼고 가열차게 짖고 있다. 아주 아담한 절이다.
약수 한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만난 머위 꽃과 새순.
수도암에서 중흥마을로 방향을 잡아 임도를 걷지만 주차한 서촌마을까지 가는 길이 아득하기만 하다. 나중에 시간을 계산해 보니 수도암에서 서촌마을 주차장까지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임도를 따라 가다 만난 봄꽃. 생강인줄 알고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아니다. 제법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정체를 모르겠다.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중흥마을. 이 마을은 고흥으로 귀촌한 직후에 된장 만드는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이후부터는 서촌마을 방향으로 터덜터덜 걷기만 한다. 시간도 많이 지났을 뿐더러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짐작도 안 되어서 모든 풍경을 보는 둥 마는 둥 지나친다.
그래도 방향을 잡아 저수지와 들을 지나고 야산도 몇 개 넘으니, 아침에 지났던 산행 들머리가 나온다. 이제야 논둑에서 곰보배추 캐는 아주머니들께 인사를 건네는 여유가 생긴다. 수도암에서 12시 40분에 출발하여 서촌마을 느티나무 벤취에서 김밥까지 먹고 나니 세 시. 생각지도 못했던 5 시간의 긴 산행이 되어버린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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