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를 블로그의 간판사진으로 내걸어 놓은 지도 꽤 오래된 것 같다. 그 「고사관수도」를 한 번 보시라. 살아오면서 저토록 무심히 한 곳을 응시해 본 적이 있었던가. 일상의 분주함을 버리고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 하는 삶, 이것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꾸는 '로망'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 생각없이 유유자적 할 수 있는 자연이란 어쩌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본 자연은 늘 누군가의 손길이 있어야만 인간에게 먹을 거리를 주고, 인간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는 것 같다. 내가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팀들의 주요 여행 목적이기도 했던 사과따기 체험을 하러 들른 사과밭을 돌아보면서 든 생각이다. 사람들은 가끔 너무 쉽게 전원생활을 이야기하고 시골생활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갖고 있는 자들의 허영심의 또다른 표현은 아닐까.
월요일 아침, 굽이굽이 휘어진 가파른 길을 올라 다다른 죽령. 텅빈 휴게소 주차장이 오늘이 휴일이 아님을 말해준다. 휴게소 식당문을 밀고 들어가니 주인 내외가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가운데는 일명 '빼치카'로 불리는, 커다란 드럼통을 세워 놓은 듯한 군대식 난로가 놓여 있다. 아직 한겨울은 아닌지라 타고 있는 장작불의 화력은 최대한 낮춰 놓은 것 같다.
▲ 소백산 등반 안내지도 중 '죽령-연화봉-희방사' 코스
서둘러 해장국과 산채비빔밥으로 배를 채운 뒤 물과 간식을 챙겨 오르기 시작한 산행길. 입구의 '죽령 탐방 지원센터' 직원이 주는 안내도를 받아들고 눈 앞에 펼쳐진 시멘트 포장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왜 이 멋대가리 없어보이는 죽령 코스를 택했을까. 이 코스는 흔히 소백산 종주 코스의 시발점이나 종착점으로 이용되는 곳이다. 종주가 목적이 아닌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풍기 쪽에서는 희방사 코스를, 단양 쪽에서는 천동 코스를 이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코스를 택했을까?
지난 여름에 읽은 책 가운데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란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책 전체의 서술을 겨울 소백산 산행에 비유해서 써나간다. 묘하게도 내가 책을 읽은 시점이 푹푹 찌는 한여름이었는데, 소백산 겨울 바람의 매서움을 유난히 강조하는 터라 인상 깊게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묘사하는 소백산을 간단히 인용해 보자.
"보통 소백산 하면 사람들은 능선에 아름답게 핀 화려한 철쭉꽃, 그리고 그 꽃을 부드럽게 애무하는 봄바람을 연상하곤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매력적인 소백산의 정경은 겨울이 되어야만 만날 수 있다.
내게 있어 소백산은 모든 것을 날려 버릴 것만 같은 강력한 바람으로 기억되는 산이다. ( … ) 단양과 영주를 동서로 가르는 능선 위에서 맞는 바람. ( … ) 소백산은 지형학적으로 볼 때 단양으로 이어지는 북쪽의 경사로는 완만하다. 이와 달리 남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며 풍기와 영주로 이어진다. 한편 동서 방향으로는 길게 능선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겨울의 소백산은 유난히 거칠고도 날카롭다. 저 멀리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바람들이 단양 쪽의 완만한 경사를 타고, 마치 깔때기에 물이 모이듯 함께 모여 예상치 못한 거대한 바람으로 불어닥치기 때문이다.
( … ) 나는 죽령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 방향으로 연화봉에 올라, 능선을 타고 소백산 정상인 비로봉(1440m)에 다다르는 길을 특히 좋아한다. 이 코스에서 나는 휘몰아치는 겨울바람과 그야말로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신주,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한겨울도 아닌데 그렇게 매서운 소백산의 칼바람을 기대한 건 물론 아니다. 그저 이 책을 읽은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는데다 아침을 해결할 수 있는 휴게소 식당이 있으니까 선택된 코스이리라. 하지만 아내한테는 아무런 말도 않고 다른 탐방센터와 달리 주차비를 안 받는 곳이라만 했다.
▲ 제2연화봉까지 이어진 시멘트길 / 철지난 억새
이 죽령에서 시작하는 코스는 제2연화봉에 있는 KT 중계탑까지 시멘트 포장길이다. 철 지난 억새들만 바람에 흩날릴 뿐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산행하는 맛이 안 나는 것 같다는 말을 아내와 주고받으며 오르기를 50여 분. 처음으로 전망이 조금 트여 풍기 쪽이 내려다보이는 쉼터가 나타난다. 어제 먹은 막걸리와 소주가 좀 과했는지 시작이 힘들다.
무릇 과해서 좋은 것이란 없는 법. 오늘 이 산행에서 어제의 과함을 비워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산행의 묘미를 산의 정상에 올랐다는 데서 찾는 것 같다. 그러나 산행의 진정한 즐거움은 우리의 마음을 철저하게 비우도록 하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비록 알면서도 이 비움을 자주 실행하지 못해 문제긴 하지만.
▲ 비워냄으로써 홀가분한 마른 가지에 피어난 서리 눈꽃/죽령 너머 영남(嶺南)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기념촬영 한 컷
귤과 함께 커피 한 잔을 하고 나니 어느 정도 전날의 숙취가 풀리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다. 어제 내가 걸었던 길이 기억 속의 익숙한 풍경을 찾아가는 것이었다면, 오늘의 이 길은 전혀 낯설고 새로운 길이다. 해발 1,000M 고지를 넘어서니 밤새 능선 위에 내린 서리가 얼어붙어 눈꽃처럼 피어나 환상적인 실루엣을 연출한다. 역시나 낯설고 새로운 길은 직접 걸어봐야만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되새겨 준다.
▲ 해발이 높아질수록 서리가 얼어 피어난 눈꽃의 장관이 점점 더 짙어진다.
▲ 소백산에서는 보기 드문 어린 소나무에 피어난 눈꽃. 좌:일반 촬영 / 우:접사 촬영
▲ 겹겹으로 아득한 산주름이 그대로 풍경이 되는 단양과 제천 방면 정경. 이렇게 그림 같은 산봉우리들이 또 있을까.
▲ 두번째 휴식 지점인 제2연화봉(1,357m)에서 바라본 천문대, 그 뒤의 꼭지점이 바로 연화봉인데, '서리꽃'이 동쪽 경사면과 서쪽 경사면을 확연히 구분되게 갈라놓는 장관을 연출한다.
▲ 제2연화봉과 천문대 사잇길 / 이정표처럼 우뚝 솟은 천문대. 천문대 너머가 연화봉 정상
▲ 휴대폰으로 찍은 눈꽃 사진을 어제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날리느라 잠시 지체한 사이 먼저 연화봉에 도착한 아내가 마음대로 셔터를 누르고 있다. 왼편 멀리 보이는 것이 KT 제2연화봉 송신탑, 오른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소백산 천문대.
▲ 영주 방면. 확실히 단양 제천 방향의 능선과는 달리 가파르게 하강한다.
▲ 산객들이 대여한 시집과 엽서,편지를 수거하는 유명한 소백산 우편함 / 3시간의 등반후 먹는 사과와 오이맛은 어떨까?
연화봉 정상에 앉아 바라보는 소백산은 망망대해 그 자체다. 단양 방면으로 보이는 올망졸망한 산봉우리는 구름 속으로 이어져 끝이 안 보인다. 반면에 영주 방변으로는 급격하게 하강곡선을 그리며 주저앉는다. "저 멀리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바람들이 단양 쪽의 완만한 경사를 타고, 마치 깔때기에 물이 모이듯 함께 모여 예상치 못한 거대한 바람으로 불어닥"친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올 겨울이나 내년 5월에 다시 한 번 오자는 말을 주고 받으며 하산길을 재촉한다. 처음 올라올 때는 다시 죽령으로 내려갈 계획이었지만 밋밋한 그 길을 다시 가기에는 영 맛이 나지 않을 것 같아 희방사 코스로 하산길을 정했다.
▲ 하산길의 '희방사 코스'는 급경사라서 돌계단 한가운데 설치한 긴 철파이프를 잡고 내려오는 길이다. 희방사에서 연화봉으로 오르는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가 점점 한숨 소리로 변하고 있다.
▲ 맑고 쩌렁쩌렁한 희방사 풍경소리.
▲ 가뭄으로 수량은 적지만 멋진 희방폭포.
문제는 희방사에서 죽령 휴게소 주차장에 세워둔 차까지 어떻게 갈 것인가 하는 것. 걸어가거나 차를 타거나 일단 내려가서 결정하기로 했다. 아내에게 '니 미모로 히치하이킹 하기에는 좀 딸리지?', 라며 한 마디 하니까, '걱정을 붙들어 매라'는 실없는 말들이 오고 간다. 직벽에 가까운 길을 내려와 들른 희방사. 산사는 고요한데 풍경소리만 요란하다.
희방폭포를 지나 '희방 탐방센터'에 도착, 직원에게 죽령까지 거리가 얼마냐고 물으니 5Km라고 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죽령이 영주와 단양의 경계이기 때문에 완행버스가 다니지 않는단다. 게다가 역시나 히치하이킹 하기에는 딸리는 미모를 간직한 여자와 같이 있으니 걸어갈 수밖에. 터벅터벅 굽이굽이 휘어진 산모롱이를 돌아가며 죽령으로 오르는 길. 오늘이 아니면 언제 걸어서 올라가보랴 싶어 없는 힘을 짜내어 오르는데, 우리처럼 올라가는 사람은 없어도 내려오는 사람은 더러 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 걸으니 죽령 주막이다. 주막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을 동동주가 더없이 반갑기만 하다.
▲ 5시간의 산행 뒤에 터벅터벅 걷는 죽령길. 왜 아니 힘들겠는가.
▲ 죽령주막에서의 뿌듯한 뒷풀이, 주막 내부 사진은 카메라 밧데리가 떨어져 휴대폰으로 찍었다
written date:2007-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