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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여행

선운사에서

by 내오랜꿈 2009.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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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입구에서 장어구이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출발하여 서해안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는데, 무창포 인근에 이르자 주변은 온통 눈이 하얗게 쌓여 가지마다 눈꽃을 피우고 있고, 군산 주변은 안개와 흩날리는 눈발이 합쳐져 아주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평소보다 상당히 신경을 곤두세우며 운전하고 있는데, 옆에 탄  '여자'는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마구잽이로 눌러대고 있다. 하긴 이 사진들 자체가 전부 그 여자가 찍은 사진이긴 하지만.

아마도 송창식의 노래에 기원을 둔 이미지이거나,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란 시집에서 연유된 것이라 짐작되지만 한때는 막연하게 선운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후 기회가 닿아 주로 가을에 여러 번 이곳을 찾았지만 정작 내게 인상깊게 남아 있는 것은 실재보다 더 강하게 착색되어 그토록 호들갑을 떠는 동백꽃 보다는 마애불이나 도솔암까지 이르는 산책길(등산길?)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 더해 미당의 존재를 각인시킬 수밖에 없는  선운사는 나에게 그렇게 호감을 주는 곳으로만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매표소 입구 한켠에는 미당 서정주의 시비가 새겨져 있다. 자주 노벨문학상 후보로까지 언급될 만큼 미당 서정주의 시세계가 크고 깊은지에 대해서는 일단 접어두더라도 나는 친일 흔적이 너무나 역력한 그의 현실인식에 동의할 수 없는지라 그를 향한 시선이 고울 수가 없다.




휴일 같으면 주차장에 관광버스가 상시대기 중이고 주변 음식집에서 흘러나오는 뽕짝 소리로 요란할텐데, 평일의 겨울 풍경은 어디나 없이 을씨년스러울만치 교요하기만 하다.

 
입장권을 끊고 개울가 옆 복분자밭을 보고 있는데, 때 맞춰 들어선 수녀님들이 무리를 이루어 우리 앞을 지나간다. 역시, 천주교는 폐쇄성 짙은 기독교, 특히 개신교인들과는 뭐가 달라도 조금은 다르구나, 생각하며 그들의 뒤를 따라 선운사 경내로 들어선다.



절집에 온 수녀님들이 이채로운 풍경이었던지 보수된 돌계단을 요리조리 살피던 아저씨 두 분이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결국은 질문하고야 마는데, 한 수녀님이 놀이를 왔다고 간결하게 답한다. 이미 수녀들은 종교의 벽을 넘어서고 있는데, 일반 사람들이 스스로 그 벽에 갇혀 있다고 해야 하나? 물론 그 물음을 던진 아저씨가 개신교 신자라면 이해가 가긴 하지만....



 대웅보전 뒤편에 미당의 시 또는 '눈물 처럼 후두둑 진다..'는 송창식의 노래 등에서 아쉽고 애절하게 이미지화된 이 동백숲은 自生 북방 한계선에 있기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한다. 때맞쳐 후두둑 떨어지는 새빨간 꽃잎 앞에서 없던 詩心이 절로 생겨날런지는 장담 못하지만 지난 겨울의 이상 기온으로 살짝 망울지기는 했어도 활짝 개화하려면 한참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지난 1월 중순경에 들린 돌산 향일암 동백숲은 이미 개화를 시작하고 있었고 지금쯤은 제법 선홍빛의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인간에겐 무감한 1,2백 Km의 거리가 나무들에게는 자신의 생명줄처럼 소중한 지표인가 싶다.



인간의 손길과 시간의 숨결에 의해 다듬어진 돌들에 간혹 마음이 쓰인다.



너른 마당을 빈틈없이 부속 건물로 채워야만 불심이 깊어지는 것일까? 절집에 온 예로 천원짜리 한 장 넣고 대웅보전의 부처님께 삼배를 드리자마자 기와불사를 청하는 보살님. 달리 애절하게 빌어야할 소원도 없는 터에 무시하면 그뿐이지만 무신론자인 나는 절집을 찾을 때 마다 씁쓸한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또 뭣하러 그나마 애처롭게 남아 있는 마당에 건물을 올려야 한단 말인가...



이런 저런 생각들을 굴리며 선운사를 빠져 나오는데, 우편배달부가 길옆에서 무언가를 팔고 있는 할머니에게로 우편물을 전한다. 특별히 고정된 주소가 아니더라도 우편물을 전해줄 수 있는 정경이 나를 여유롭게 했고, 전해주는 저 하얀 봉투가 무슨 요금납부 고지서 아닌 반가운 소식이기를 빌어보며 선운사의 추억을 마감한다.
 
 


 

written date : 2007-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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