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살아가는 모습/생각

알파고, 인터넷 대국에서 60연승

by 내오랜꿈 2017. 1. 5.
728x90
반응형


12월 말, 알파고가 타이젬에서 대국하는 걸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마기스테르(Magister)'라는 아이디로 국내 랭킹 1위 박정환 구단과 벌이는 대국이었다. 이때까지는 '마기스테르'가 알파고일 것이라는 추측만 하던 때다. 타이젬 사이트에서 국내외 최고 프로기사들을 상대로 20연승 이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이 지구상에 존재하기 힘들 테니까.


인터넷 바둑 사이트는 고수들의 대국에 유저들이 승부 예측을 하면서 사이버 머니로 배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박정환 구단의 타이젬 아이디는 '수지(Xiuzhi)'라고 알려져 있다. '수지'가 대국할 때면 당연히 이 배팅시스템에서 대부분 승률 기대치가 높게 나온다. 거의 대부분의 대국에서 70% 이상의 기대치를 보였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 '마기스테르'와의 대국에서는 '수지'의 승률 기대치가 20% 이하로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만큼 연승 행진을 이어가는 마기스테르의 화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바둑사이트에서 프로 수준의 고수들 간의 대국은 정식 시합이 아닐 경우 거의 대부분 제한시간이 10초, 20초인 초속기 바둑이다. 한 수 놓는데 10초, 20초 안에 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차없이 시간패다. '마기스테르', 곧 알파고는 20초 초읽기로 이루어진 인터넷 대국에서 거의 모든 수를 7~8초 만에 두면서 조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이겨갔다. 아무리 뛰어난 일류 기사라 하더라도 같은 프로들과의 초속기 바둑에서 70% 이상의 승률을 유지하기란 무척 힘들다. 세계 랭킹 1,2위를 다투는 커제나 박정환도 승률이 80%가 안 된다. 그런데 승률 100%라니...


이 알파고가 타이젬에서 40연승을 한 다음 중국의 인터넷 바둑사이트인 한큐바둑(폭스고)에서도 '마스터(Master)'라는 아이디로 '20연승을 거뒀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국하기 전 아주 쇼킹한 '선전포고'를 했다.


"나는 1월 2일에서 3일, 이틀 동안 20판의 대국을 하겠다. 대국신청을 하면 수락 여부는 내가 결정한다. 나를 처음 이기는 자에게10만 위안(1,700만원)을 주겠다."


바둑 사이트에서 이런 공지를 개별적으로 띄운다는 게 황당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이를 보고 달려든 커제, 박정환, 이야마유타, 김지석, 박영훈, 퉈자시, 구리 등 한중일 바둑 고수들이 '마스터'에게 20연패를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한중 양대 바둑사이트에서 도합 60연승을 한 것이다. 여기에는 박정환의 5연패, 커제의 3연패도 들어 있다.


구글 딥마인드는 지금까지 알파고와 알파고가 둔 바둑 3판을 공개했다. 두 판은 5초 바둑, 한 판은 60초 바둑이다. 알파고끼리의 연습바둑에서는 거의 대부분 한 수에 5초를 세팅한다고 한다. 하루에 백 판 넘게 둘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모두가 데이터 축적으로 이어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쉬지 않고 학습하고 있는 셈이다. 이 세 판을 모두 복기해 보았는데, 5초로 세팅된 바둑의 초반은 지금까지 프로기사들이 두던 정석이나 초반 운영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60초 바둑으로 세팅된 바둑의 초반 운영은 내가 보고 알고 있던 형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바둑의 진리라고 알고 있던 정석이나 모양 등은 알파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알파고의 자전해설도 곁들여져 있는데, 어떤 참고도는 초반인데도 50여 수 앞을 보고 취사선택을 하고 있었다. 수없는 갈래길이 있는 초반 운영에서 60초 안에 50여 수를 내다보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불가능의 영역을 개척한 알파고. 거의 바둑의 신이 등장한 셈이다. 조만간 인간이 알파고에게 몇 점 접히고 두는 풍경이 벌어질 것 같다.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인간의 사고 영역을 한순간에 초월해 버리는 과학의 무자비함에 한없는 허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학의 목적과 인간의 목적이 같을 수는 없지 않을까? 다윈의 진화론을 종, 개체 단위에서 유전자 단위로 전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되는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는 <무지개를 풀며>에서 이렇게 말한다.


"(과학이나 우주의 궁극적 운명 같은 것들보다) 우리의 삶은 보다 더 가깝고, 보다 따뜻한 온갖 인간적 야망과 지각이 지배한다.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게 만드는 따스함을 과학이 빼앗아 간다고 비난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러니 너무 슬퍼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 1월 4일, 알파고가 한중 인터넷 사이트에서 50연승을 한 다음 구글 딥마인드 CEO 데미스 하사비스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남긴 말. 알파고의 프로토타입으로 인터넷 사이트에서 테스트를 했다는 걸 밝히고 있다.


알파고가 60연승을 하고 사라진 다음 날, 구글 딥마인드 CEO인 데미스 하사비스는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우리는 그동안 알파고를 개선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리고 지난 며칠 동안 비공식 온라인 대국을 통해 새로운 프로토타입 버전을 적용한 알파고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작동하는지 점검했다. Tygem과 FoxGo 바둑 서버에서 Magister(P) 및 Master(P)와 대국한 플레이어와 이를 즐기면서 지켜봐 준 모든 이에게 감사드린다. 우리는 놀라운 결과와 함께 새로운 버전의 알파고가 보여준 혁신적이고 성공적인 플레이에서 우리와 바둑계가 배울 수 있는 것에 흥분했다.


(…) 이제 우리의 비공식 테스트는 끝났다. 우리는 올해 열릴 공식 대국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한다. 여러 바둑협회 및 전문가들과 공동 연구를 통해 서로의 깨달음을 교류하면서 바둑의 심오한 세계를 깊숙이 탐험하고 싶다. 곧 보다 더 자세한 소식을 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하사미스가 트위터 말미에 밝힌 것처럼 오는 2월이나 3월, 알파고가 세계 1인자로 인정받고 있는 중국의 커제 9단과 승부를 벌인다는 이야기가 기정사실처럼 굳어져 있다. 지금으로서는 이 승부의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일 거 같고, 오히려 구글이 굳이 대결을 제의하는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더 이상 알파고를 향한 인간들의 의심의 눈초리를 버리게 만들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구글에게 닫혀 있는 중국시장 개척용인지가.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