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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Culture

가벼움에 대하여

by 내오랜꿈 2009.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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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움이라는 말 때문에 진지하게 읽어본 글이지만 난 글쓴이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그는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언급하면서 쿤데라가 "‘존재’라는,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단어를 ‘가벼움’이라는 단어와 병치시킴으로써, 환호성을 참을 수 없을 만큼 통쾌한 관념의 도약을 자극했다."고 쓰고 있다. 

글쎄, 그가 과연 쿤데라가 존재를 가볍다고 한 이유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기나 한 것일까? 쿤데라가 가벼운 것이라고 했을 때 그 가벼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기나 한 것일까? 분명하게 말하지만 존재를 세상에서 가장 무겁게 본 것은 글쓴이 자신이지 쿤데라는 아닐 것이다(틀렸다 맞다의 문제가 아니라 '무게의 메타포'를 이해하는 방향이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 번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란 개별적인 인간의 삶과 꼭같이 가벼운 존재다. 그것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휘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이 문장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김형태라는 예술가의 쿤데라에 대한 몰이해, (쿤데라가 말하는) 가벼움에 대한 몰이해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쿤데라는 (글쓴이와는 달리) 전혀 다른 방향에서 출발한다. 쿤데라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이 존재의 근본적인 가벼움을 특징짓는다고 말한다. 존재가 무슨 역사와 대립되는 존재이기에 가볍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

"... 이념도, 신념도, 신앙도, 도덕과 윤리와 전통과 규범들도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촛불은 확실히 화염병보다 가볍다. 공산당보다는 붉은 악마가 가볍다. 클래식보다는 팝이 가볍고, 음반보다는 MP3 파일이 가볍다. 이국의 우표가 붙은 그림엽서보다 이메일이 훨씬 가볍고, 문자 메시지는 전화통화보다 한결 가볍다."

그런데 김형태는 위의 인용에서 보듯 존재의 가벼움을 역사의 무거움, 이데올로기의 무거움에 대비시키고 있다. 곧 그는 가벼움을 그 어떤 무거운 것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촛불은 화염병보다 가볍다, 공산당보다는 붉은 막마가 가볍다.'는 식으로. 그러나 쿤데라는 존재와 역사를, 존재와 이데올로기를 대립시킨 적도 없을 뿐더러 존재 뿐만이 아니라 역사 또한 너무나 가볍디 가벼운 존재라고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가벼움을 무거움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한 쿤데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가벼움이 가지는 긍정적 힘을 이해할 수도 없다. 가벼움은 무거움의 대립항으로서 생겨난 개념이 아니다. 역사를, 이데올로기를 무겁게만 바라보고 무겁게만 실천했던 우리들에게 그 무거움을 덜어줄 수 있는 개념으로 바라볼 때 가벼움은 그 값어치를 발할 수 있다. 사랑/개인/상상은 가벼운 개념으로, 정치/혁명/이념은 무거운 개념으로 이해하는 우리들에게 정치/혁명/이념 또한 가벼울 수 있다는 것으로, 가볍게 실천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때 가벼움의 아름다움은 빛을 발할 수 있다. 

이러한 가벼움은 흔히 우리가 오해하는 (그리고 글쓴이도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경박함과는 다른 것이다. 한 번밖에 못 사는 인생이기에 우리는 더더욱 진지하게 살아야 하듯이 쿤데라가 한 번 뿐인 우리의 존재이기에 가볍다는 표현을 했다면 그 가벼움에는 반드시 진지함이라는 요소를 수반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진지한 가벼움. 그래서 우리는 가벼움에 미학의 위치를 부여한다. 이른바 '가벼움의 미학'. 

그래서 나는 세상이 가벼워져도 글쓴이처럼 마음이 무거워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쿤데라는 사라져가는 걸 두려워하라고 한 적이 없다. 사라져가기에 진지하게 살아라고 한 적은 있어도.....

written date:2004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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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움에 대하여

글·그림 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www.thegim.com 
출처 : <씨네21> 제452호 


중력에 짓눌려져 땅 위에 붙박힌 우리 몸뚱이는 무게를 가진 존재이다. 반면에 상상력의 세계는 질량 0의 비물질의 세계로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삶 속에서 의식과 관념과 사상과 생각은 65kg 몸뚱이보다 더 무거웠다. 인류는 그렇게 무거운 몸뚱이에 그보다 더 무거운 관념을 쌓으며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를 거쳐, 다시 석유화학과 중공업과 글로벌 거대기업과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를 이루면서 자꾸만자꾸만 무거워졌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진 인류는 이제 다시 새로운 생존문명으로 가벼움의 테크놀로지-디지털 시대를 개척하고 있다. 

가벼움에 대하여, 밀란 쿤데라만큼 멋진 문장을 창조한 사람이 있을까.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제목만으로도 웬만한 장편소설 전문 이상의 생각의 동기를 제공한다. 그것은 ‘존재’라는,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단어를 ‘가벼움’이라는 단어와 병치시킴으로써, 환호성을 참을 수 없을 만큼 통쾌한 관념의 도약을 자극했다. 쿤데라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로 견디기 어려웠던 무거움들이 차례차례 일회용 종이컵이 되어 산뜻하게 날아올랐다가 미련없이 폐기처분된다. 육중했던 브리태니커백과사전도 더이상 발행되지 않지만 www.britannica.com 한줄로 요약되어 웹 브라우저의 즐겨찾기에 가뿐하게 등록되어 있다. 덩달아 이념도, 신념도, 신앙도, 도덕과 윤리와 전통과 규범들도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촛불은 확실히 화염병보다 가볍다. 공산당보다는 붉은 악마가 가볍다. 클래식보다는 팝이 가볍고, 음반보다는 MP3 파일이 가볍다. 이국의 우표가 붙은 그림엽서보다 이메일이 훨씬 가볍고, 문자 메시지는 전화통화보다 한결 가볍다. 질량 0의 디지털 시대. 관념은 몸뚱이보다 무거워질 수 있지만, 소프트웨어는 결코 하드웨어보다 무거워질 수 없다. 이념조차도 디지털 정보로 온라인 배포될 때는 클릭, 클릭, 다음페이지로 손쉽게 넘어가고, 복사, 등록, 삭제가 아무런 갈등없이 이루어지면서 구름처럼 가벼워진다. 세계는 급속도로 가벼워지고 있다. 이 가볍고(경輕) 얇은(박薄) 것이 날개인가 껍질인가. 몸뚱이는 여전히 꼼짝없이 무거운데 의식이 이렇게까지 가벼워지니 균형을 잃는다. 날아가는 것인지, 날려가는 것인지, 비상하는 것인지 추락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너무 가벼워서 사라져가는 것 같다. 그것이 두려워서인지, 세상이 가벼워질수록 마음이 무거워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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