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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이란 공간에서의 원체험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기억으로 존재할 테지만, 30대 아니 4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극장이라는 공간 원체험의 공통분모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재개봉관의 추억 아닐까? 화려한 외관에 빵빵한 음향시스템을 갖춘 지금의 멀티플렉스와는 애시당초 거리가 멀었지만 '야자'를 빼먹고 눈치보며 기어들어가던 추억들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극장이란 공간의 원체험을 이야기하라면 단연코 "코아아트홀"이었다. 94년부터 99년까지 5년 동안 코아아트홀에서 개봉한 영화는 거의 빠짐없이 보았던 것 같다. 연인들의 아니면 여자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코아아트홀"의 상징인 붉은색 의자에 혼자 앉아 30대의 전반기를 보냈다.
이런 나에게 화양극장은 그저 버스 타고 지나가면서 보는, 커다랗게 걸려 있던 그림간판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하지만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유일무이한 존재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나에겐 그저 스쳐지나는 극장이었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저 화양극장은 '나의 코아아트홀'이었으리라.
아, 그러고보니 "코아아트홀"도 문을 내린 지 꽤 시간이 지난 것 같다. 역시,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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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더티 댄싱’ 떠나는 ‘단관 극장’ | |
서울 ‘드림시네마’ 고별 이벤트 | |
출처:<인터넷한겨레> 2007 10 28 | 글:김소민/구본준 기자 사진:김경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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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바뀌는 듯 조금씩 바뀌어가는 서울 서대문 네거리. 그 한 모퉁이에서 ‘화양극장’은 변치않은 풍경을 대표해 왔다. 지금 이름은 드림시네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화양극장으로 부르곤 한다. 그렇게 44년째. 화양극장은 대단한 극장은 결코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 버티다 보니 독특한 지위가 절로 생겼다. 다른 극장들이 헐리고, 멀티플렉스로 바뀌는 바람에 서울 시내 유일의 ‘단관 극장’이 된 것이다. 건물 재개발로 헐릴 극장 1억 들여 스크린·음향시설 교체 간판·푯값도 20년전 그대로…새달 23일부터 무기한 상영 최근 이 극장 김은주(35) 대표에게 뜻밖의 연락이 왔다. 극장 건물이 내년 재개발되기로 해 헐린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그 날’이 오자 김 대표는 결심을 했다. 기왕 운명이 정해진 것, 어느날 갑자기 헐리면서 기억속에서 사라지는 극장은 되지 말자고. 그래서 그는 가장 사랑하는 영화로 작별을 고하기로 했다. 1980년대 최고의 청춘영화 〈더티 댄싱〉을 다음달 23일부터 헐리는 그날까지 무기한 상영하기로 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이 아이디어를 위해 그는 ‘미친 짓’을 감행했다. 얼마 뒤 헐릴 극장인데도 〈더티 댄싱〉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의 점프 순간을 관객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 1억여원을 들여 스크린과 음향시설을 바꿨다. 극장 전체도 80년대로 되돌린다. 간판부터 옛날 그림간판으로 올린다. 화양극장 시절 최고 인기작인 〈영웅본색〉 등의 간판을 그렸던 김영준씨가 맡았다. 표값도 그때 그대로 3500원이다. 1980년대 홍콩영화의 추억이 담뿍 서려 있는 이 곳에서 패트릭 스웨이지와 제니퍼 그레이의 그시절 옛 춤 장면을 끝으로 서울의 극장 단관 시대도 막을 내린다. 〈더티 댄싱〉의 추억 88년 〈더티 댄싱〉이 중앙극장에서 개봉해 50만 관객을 부르던 그 때, 극장 앞에선 종종 실랑이가 벌어졌다. 18살 이상 관람가였던 이 영화를 보려고 10대들은 어색한 화장을 하고 잠입을 시도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은주 대표도 중앙극장에서만 세 번 쫓겨났다. 그는 재개봉관인 신촌 ‘크리스탈 극장’(현 그래드시네마)에서 거사를 벌인다. 화장도 하고 대학생 언니까지 동행해 밤 9시 시간을 골랐다. 치밀한 준비 덕에 거사는 성공했고, 주인공의 점프 장면은 영원히 그의 뇌리에 깊게 남았다. 이후 이 영화는 그에게 끝없이 되풀이해 보는 ‘내 인생의 영화’가 되었다. 학교 영어 선생님을 괴롭혀 가며 삽입곡 가사를 모조리 번역하고 외웠다. 지금도 그의 인터넷 아이디는 모두 ‘더티 댄싱’이다. ‘제 2의 스카라’는 되지 않을래 마지막 영화 〈더티 댄싱〉을 상영하기 위해 김 대표는 극장 설비까지 고쳤다. 자막은 그가 직접 번역했다. 극장 내부도 80년대 느낌으로 꾸민다. 이를 위해 옛날 턴테이블과 〈페임〉 〈백야〉 등의 영화음악 레코드판 50장을 청계천을 뒤져 샀다. 그가 이렇게 열성적으로 화양극장-드림시네마의 고별 무대를 준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2005년 그가 1년 동안 운영했던 스카라극장은 그야말로 ‘전격적으로’ 헐려버렸다. 문화유산 등록예고를 통보 받은 건물주가 등록 전날 건물을 철거해 버린 것이다. 도둑 철거 직전 건물주의 부탁을 받고 그는 밤 11시에 짐을 챙겨 새벽 5시에 스카라극장을 나왔다. 지금 스카라극장 터는 주차장이다. 김 대표는 “너무 속이 상했다”며 “마지막 남은 단관마저 그렇게 없어지는 걸 볼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몰래 〈더티 댄싱〉을 봤던 사람들도 이번엔 떳떳하게 제대로 갖춘 음향과 화면으로 추억을 되살리기 바랍니다. 그리고 극장의 모습도 많이 찍어 기록으로 남겨줬으면 좋겠어요.” 서부지역 청춘들의 아지트 화양극장 64년 1월 1일 개관 당시 화양극장에는 가로 세로 10여미터짜리 무대가 있었다. 영화뿐만 아니라 하춘화쇼, 송창식쇼도 했다. 당시 서울에 개봉관은 열 곳뿐. 대한극장이 2천여석으로 가장 컸다. 700석 규모의 화양극장은 중간 크기의 재개봉관이었다. 개봉관에서 틀고 난 영화를 배급사가 사서 재개봉관에 나눠줬다. 좋은 영화를 받으려면 영업부장의 수완이 좋아야 했다. 근처 극장이 트는 영화는 다른 극장에선 못 틀었다. 안목도 중요했다. 개봉관에서 망한 영화도 재개봉에서 입소문을 타고 터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청량리에 있던 재개봉관 대왕극장은 장사가 잘되는 극장으로 꼽혀 좋은 영화들을 몰아가곤 했다. 86년, 화양극장은 개봉관으로 ‘승격’했다. 미아리 ‘대지극장’과 영등포 ‘명화극장’도 화양극장과 주인이 같았다. 홍콩영화 전문 수입사인 세진영화사와의 친분 덕분에 이 세 극장이 각각 자기 지역에서 홍콩영화를 독점으로 틀며 인기를 끌었다. 84년 〈예스마담〉, 87년 〈천녀유혼〉과 〈영웅본색〉, 88년 〈영웅본색2〉 등 굵직한 화제작이 세 극장에서 관객과 만났다. 하루 3천명을 넘으면 만원 사례로 치는데 〈영웅본색 2〉는 심야까지 7회가 모두 매진됐다. 기다려도 표를 못산 이들이 항의해 새벽 2시에 한번 더 심야 상영을 했다. 30여만명이 화양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천녀유혼〉 개봉 때는 장궈룽(장국영)과 왕쭈셴(왕조현)의 팬사인회가 열렸는데 영화관을 몇 바퀴 뺑뺑 돌아가며 긴 줄이 늘어섰다. 시사회 전용극장으로 변신-드림시네마 시기 드림시네마 앞에는 아직도 하베스트 전용관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홍콩 영화제작사 골든하베스트와는 상관 없는 것으로 이 영화관의 회원권 이름이다. 90년대 이후 홍콩영화가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이들 세 극장들도 기운다. 90년대 후반부터는 멀티플렉스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명화가 먼저 문을 닫았고 대지는 멀티플렉스로 바뀌었다. 98년, 화양극장은 이름을 드림시네마로 바꾸고 시사회 극장으로 탈바꿈했다. 낮에는 재개봉을 하고 밤에는 시사회를 했다. 시사회는 좌석의 80% 이상이 찼을 정도였다. 〈말아톤〉 〈왕의 남자〉 〈러브 액추얼리〉 시사회 때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이 한참 동안 영화관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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