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처럼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가 흘러나온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니 20여 년 전, 궂은 비 내리는 가을날. 누구는 뱃고동 울리는 선창가에 앉아 '낭만에 대하여' 노래하고, 누구는 내일이 오늘과 다르게 새로울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토로하는 중년의 난감함을 읊었던 게 생각난다. 나는 이 궂은 비 내리는 날, 무얼하고 있나 하는 생각과 함께...
10월에 들어와 비가 잦다. 비의 양이 그리 많진 않지만 가을날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하는 청명한 하늘과 상큼한 햇볕을 보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10월 초에는 며칠 이러다 말겠지 했는데, 중순 이후부터는 아예 햇볕 보는 것조차 힘든 날의 연속인 것. 급기야 월동용으로 파종한 잎채소들이 웃자랄까 걱정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 파종 7일째 월동채소 모습.
▲ 다채(비타민채).
▲ 겨울배추.
▲ 시금치.
이곳 날씨는 10월에도 고추를 비롯한 가지과 작물이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는데, 말리기가 어려워 고추와 가지를 작년보다 일찍 정리하고 그 자리에 월동용 잎채소들과 완두콩을 파종했다. 시금치, 유채, 다채(비타민채), 겨울배추 등. 기온도 적당히 높고 비도 자주 내려 모두 다 발아는 그 어느 해보다도 예쁘고 튼튼하게 된 편이다. 배추나 유채, 다채는 3~4일 만에 모두 발아했고, 시금치도 5~6일째부터 발아를 시작해 열흘 정도 만에 전부 싹이 났다. 파종기 기온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시금치는 발아가 완료되기까지 보통 2주 정도가 걸리는데 올해는 유난히 빠른 편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발아하기까지 보통 3주는 기본이고 늦으면 한 달 정도 걸리는 완두콩조차 이미 싹이 나 잎을 분화시키려 하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 파종 13일째 월동채소 모습.
▲ 파종 13일째 겨울배추 모습. 햇볕을 보지 못해 연약하게 자라 도복이 걱정되는 지경이다.
▲ 시금치 파종 13일째. 역시 가녀리게 자라고 있다.
▲ 가을 완두콩 파종 13일째. 파종 13일 만에 이렇게 싹이 다 올라온 건 처음이다.
▲ 파종 60일째 당근 모습. 땅속은 모르겠지만 잎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발아는 아주 빠르고 예쁘게 되었지만 햇볕을 보기 힘드니 싹들이 연약하기 그지없다. 이맘때는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이슬이 비오듯 맺히는 경우가 많아 물을 따로 주지 않아도 잎채소들이 자라는 데는 별다른 지장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비도 이삼 일에 한 번씩 내리는 꼴이고 설령 내리지 않는다 해도 햇볕 보기가 힘드니 연약한 싹들이 웃자라기 시작한 것 같아 보인다. 배추와 유채는 이미 도복이나 모잘록 증상을 걱정해야 할 지경이고 조그마한 바람에도 하늘거리는 시금치도 내가 생각했던 모습은 아니다. 또 완두콩의 경우 잎이 난 상태로 겨울을 나야 하기 때문에 로제트잎(요즘은 '앉은잎'으로 순화시켜 표현하기도 한다) 식물들처럼 최대한 땅에 엎드려 줄기를 굵고 튼튼하게 키워야 한다. 이렇게 커야 하는 완두콩인데 지금의 모습은 내가 보기에는 웃자랄 기미가 농후하다. 앞으로 날씨가 좋아지면야 다행이지만 이 상태로 열흘 이상 지속된다면 이 완두콩들은 겨울을 나는데 꽤나 고생해야 할 듯하다. 11월이 코앞인데 노지에 파종한 잎채소 도복을 걱정해야 한다니 내 농사 상식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온종일 궂은 비 부슬부슬 내리는 날, 잔뜩 흐린 하늘 한 번 쳐다보고 텃밭 한 번 쳐다보고 있노라니 나에겐 낭만은 물론이고 중년의 난감함을 느낄 여유조차 없는 것 같다. 나는 최백호에게도, 김훈에게도 감정이입할 수 없는 메마른 가을과 마주하고 있다. 텃밭에 돌아다니며 무, 배추 이랑을 휘젓고 다니는 두더지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나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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