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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Book

<마르크스의 유령들>

by 내오랜꿈 2007.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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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유령들
<자크 데리다 저 | EJB(이제이북스) | 2007년 09월


너무나 '유명한' 책이 제대로 번역되어 나왔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인가 뭣인가가 나와서 시끄러울 때가 벌써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나 싶을 정도로 아득한 옛날 같다. 그 즈음의 난 20대 말의 어수선함과 혼란스러움으로 인생의 방향을 놓고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였기에, 후쿠야마식의 이데올로기 종언, 역사의 종언이라는 '선언'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책이라는 사실만으로 시선을 끌었던 책이었다. 현실에서 현재진행형이던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내겐 전혀 실천적인 철학자로 보이지 않았던 데리다가 정면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유효성을 이야기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러했다.

하지만 그때 내게 데리다는 너무 어려웠다. 알뛰세, 푸코, 들뢰즈의 책들은 그 이해의 완전함은 떠나서라도 읽혀지는데 데리다 만큼은 이상하게도 읽혀지지가 않았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일차적으로는 나의 선입견, 현실의 실천에서 거리를 둔 철학이라는 나의 선입견이 원인이었을 게다.

또 하나는 데리다를 가장 처음 접했던 게 솔 출판사에서 나온 입장총서 시리즈의 하나로 데리다와의 대담을 엮은 <입장들>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의 호감으로 그후 몇몇 데리다 해설서를 읽게 되었는데, 그게 오히려 데리다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다. 김형효씨의 데리다 해설서는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는 말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고, <데리다와 푸꼬,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나 <극단의 예언자들: 니체.하이데거.푸코.데리다> 등에서 다루는 데리다도 내게는 그렇게 와닿지 않았었다(그나마 <극단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어렴풋이나마 데리다를 조금 이해할 수는 있었던 것 같다).

그 이후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걸 알면서도 읽을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나중에 번역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지만). 그 이후 발리바르나, 들뢰즈를 통해 데리다의 긍정적 평가를 접하게 되면서 언젠가는 다시 데리다를 읽어야지 하면서도 지금까지 미뤄져오고 있는 것. 

이번엔 미뤘던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제대로 한번 데리다를 읽어봐야겠다. 번역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로 신뢰를 받고 있는 책이기에.  아래 인용하는 글은 <한겨레>의 고명섭 기자가 쓴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서평인데 옮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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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란 틀로 위기의 마르크스 재해석
해체주의 철학 거두 데리다 후기 대표작
“마르크스주의 종언은 집단주술” 비판
체제모순 넘어서는 ‘메시아적 유령’ 역설
 
 
출처 : <인터넷한겨레>2007/10/05
 고명섭 기자 
 


» 마르크스의 유령들
<마르크스의 유령들>자크 데리다 지음·진태원 옮김/이제이북스·1만9천원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자크 데리다(1930~2004·사진)가 췌장암으로 사망하기 10여 년 전에 출간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데리다는 1960년대 이래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80권이 넘는 저서를 펴냈고, 수백 편의 논문을 썼다. 프랑스 철학자들 중에 데리다만큼 왕성한 필력을 자랑한 사람도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게 많은 글을 썼지만, 그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밝히는 데는 극도로 인색했다. 침묵에 가까운 이런 정치적 태도 때문에 좌파 전통이 강한 프랑스 지식계에서 그의 사상은 줄곧 의심의 대상이 됐다. 1970년대 이래 미국에서 그의 ‘해체주의’가 유행하면서, 의심은 더욱 커졌다. 도대체 ‘해체’를 통해 뭘 하자는 건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말하자면, 이런 의심을 걷어내는 데 결정적 전기가 된 책이다. 이 책을 전후로 하여 죽는 순간까지, 그는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정치적·실천적 발언을 쏟아냈다. 이 시기를 데리다의 ‘후기’라고 한다면,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이 후기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그 대표성에는 화제성도 포함된다. 데리다의 저작 가운데 이 책만큼 널리 화제가 된 책도 없다. 프랑스에서 이 책의 내용을 각색해 연극으로 공연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책은 10여 년 전에 한국어로 번역된 바 있으나, 데리다의 복잡한 논리와 어려운 용어들을 제대로 옮겨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에서 유학 중인 진태원(리옹 고등사범학교 박사 후 연구원)씨가 꼼꼼한 작업 끝에 이 책을 새롭게 번역했다. 풍부한 옮긴이 주석이 달린 이 번역본은 데리다의 어지러운 생각의 흐름을 비교적 선명하게 따라잡을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책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유령’에 관한 책이다. 좀더 부연하면, 카를 마르크스(1818~1883)의 주위를 떠도는 유령에 관한 책이다. 유령이라는 모호한 존재는 근대 철학을 포함한 근대 학문에서는 금기 혹은 축출의 대상이었다. 명료성을 추구해야 하는 과학의 영역에서 유령이 들어앉을 곳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 철학서는 예외적인 책이다. 옮긴이의 감탄 섞인 표현은 이 예외성을 잘 보여준다. “데리다 이전에 과연 누가 유령을 주제로 하여 마르크스에 관한 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 자크 데리다
이 책이 세간의 화제가 된 것은 출간 시기와도 관련이 있다. 1993년이면, 마르크스가 제시한 이념을 따라 건설한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직후였다. 여기저기서 마르크스주의의 파산 선고가 잇따랐다. 데리다가 이 책에서 특별히 지목하고 있는 것이 미국의 역사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이다. 1992년 출간된 후쿠야마의 책은 철학적 저작치고는 전례없는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마르크스주의를 관에 집어넣어 뚜껑에 못을 박듯, 이 책은 자본주의 체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최종적·궁극적 승리를 선언했다. 역사가 이 시점에서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고 득의양양하게 단언했다.

이 책이 왜 그토록 열광적으로 팔려나갔을까? 데리다는 그 열광이 일종의 ‘푸닥거리’ 행위라고 이야기한다.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몰아내 영원히 매장해 버리려는 집단적 주술행위가 이 책에 쏟아진 열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가 보기에, 그런 열광이야말로 이 현존 체제의 취약함·허술함을 역으로 증명하는 일일 뿐이다. 푸닥거리는 이 체제가 실업·빈곤·증오·전쟁을 안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 체제임을 부인하려는 안간힘일 뿐이다. 그렇게 선언한다고 해서 유령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데리다가 더 공들여 해부하는 것은 ‘마르크스 안에 있는 유령’이다. 마르크스에게 유령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 번째 유령은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 첫 줄에서 불러들인 그 유령이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이때의 유령은 유럽의 지배자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유령이며, 곧 도래해 현실이 될 유령이다. 

다른 한 유령은 마르크스가 축출하려고 애썼던 유령이다. 〈독일 이데올로기〉나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유령적 존재들을 언급하는데, 물신숭배의 대상이 된 화폐나 상품이 그런 존재들이다. 마르크스는 이 유령적 존재들을 몰아낼 때 참다운 자유의 세계가 열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데리다가 보기에 마르크스의 이런 생각은 순진하다. 유령은 사라지지 않는다. 데리다는 〈공산당 선언〉에서 등장한 유령이야말로 유령다운 유령이라고 본다. 그런 유령은 체제의 모순 위에서 출몰하며 체제 너머를 환기시킨다. 유령은 일종의 메시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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