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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Book

〈정치적인 것의 귀환〉 - 경제의 노예들이여, 정치로 돌아오라

by 내오랜꿈 2007.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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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클라우/무페 논쟁'으로 유명한 샹탈 무페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비판하고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받아들여 자신들(논쟁을 하면서도 라클라우와 무페는 지속적인 공동작업을 수행한다)의 '급진적 민주주의' 기획을 도출해낸다. 

그들은 '사회'(구성체)를 그 요소들, 예컨대 자본, 이데올로기, 노동, 실천 등의 요소들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접합과정'으로 이해하고 마르크스주의에 내재하는 본질주의적 토대결정론을 비판한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라클라우와 무페는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에서 다루는 계급투쟁이 실제로는 다양한 사회적 대립를 구성하는 하나의 층위일 뿐이며, '사회'(구성체)에는 다양한 투쟁들이 경합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한 사회의 변화/변혁이란 항상 '가능성의 (새로운) 장'이란 의미에서 열려 있으며, 그 열린 공간을 누가 어떻게 장악하느냐 하는 것 또한 항상 가능성의 장으로 열려 있다고 파악한다. 이러한 열린 가능성의 장에 새로운 접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헤게모니 투쟁'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 여기서 그람시 헤게모니 개념의 전략적 의미가 도출된다. 

이러한 이들의 이론적 정식화는 공저인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번역은 김성기, 김해식 등에 의해 <사회변혁과 헤게모니>(1990, 터)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다. 당시의 시대분위기와 맞물려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책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 역시 당시 어떤 '갇힌 공간'에서 한창 그람시를 새롭게 읽고 있었기에 흥미롭게 보았던 책 가운데 하나였다.

아래는 <한겨레신문>에 실린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 대한 서평이다. 그런데 솔직한 느낌으로는 너무 늦게 찾아온 손님 같다. 앞에서 언급한 <헤게모니와 사회전략>의 연장선 상에서 읽혀지고 다루어졌어야 할 책인데 말이다. 어쨌거나 <헤게모니와 사회전략>이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을 너머 새로운 급진적 민주주의 전략을 모색하는 것이라면, 이 책 <정치적인 것의 귀환>은 마르크스주의 정치학과 완전히 단절된 시각을 보여준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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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노예들이여, 정치로 돌아오라 

고명섭 기자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2 07 


» 경제의 노예들이여, 정치로 돌아오라
 
〈정치적인 것의 귀환〉
샹탈 무페 지음·이보경 옮김/후마니타스·1만5000원
 

1988~93년 정치철학자 무페가 쓴 논문 9편 엮어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 ‘평등’간 긴장관계 강조
정치 활성화로 갈등해결 없으면 민주주의도 위기
 

선거를 두고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이 꽃의 신선도를 결정하는 것은 유권자다. 유권자의 열정과 참여의 강도에 따라 꽃은 아름답게 피기도 하고 추하게 시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선거는 정치의 특수한 국면일 뿐이다. 정치의 건강성이 궁극적으로 선거의 건강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시 정치다. 민주주의는 정치를 통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벨기에 출신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의 저작 <정치적인 것의 귀환>은 이 정치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논구한 책이다. 

이 책에 엮인 논문 아홉 편은 모두 1988년부터 1993년 사이에 집필된 것들이다. 그 시기는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차례로 붕괴하고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체제로 세계가 일극화하던 때였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테제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영원한 승리’를 선포했다. 그러나 무페가 보기에 이런 팡파르는 성급한 것일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기도 하다.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내적 모순을 안고 있어서, ‘영원한 승리’를 자동적으로 보장해주지 않는다. 무페는 정치의 생리를 근본적으로 다시 따져볼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여기에 실린 아홉 편의 논문은 각각 따로 쓴 것이지만, 하나의 주제를 일관성 있게 파고듦으로써 전체로 보아 통일성을 구현하고 있다. 책의 제목에 나와 있는 대로 무페의 관심은 정치를 발생시키는 조건으로서 ‘정치적인 것’에 집중돼 있다. 여기서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라는 개념은 독일의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1888~1985)에게서 직접 따온 것이다.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정치적인 것’의 성격과 영역을 심도 있게 탐구한 바 있다. 무페는 자신의 이론적 동선 안에서 존 롤스, 마이클 왈저, 찰스 테일러, 켄틴 스키너, 로널드 드워킨 같은 수많은 철학자들의 주장과 마주치지만, 결정적으로 대결하는 상대는 슈미트다. 특히 슈미트가 제출한 ‘정치적인 것’의 개념과 집요한 싸움을 벌인다. 

알려진 대로 슈미트는 나치에 가담했던 이른바 ‘보수반동적’ 철학자다. 그는 서구 근대가 창출한 ‘자유주의 이념’을 거부했고, 그런 거부의 논리적 연장선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야멸차게 부정했다. 그가 자신의 논리를 세우는 데서 핵심적 거점으로 삼았던 것이 바로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이다. 슈미트는 갈등과 적대야말로 인간 삶의 항구적 조건이라고 보았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윤리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필연적으로 적대의 관계가 창출된다는 것이 슈미트의 핵심 주장이다. 의견과 이해의 차이가 ‘그들’과 ‘우리’를 나누고, ‘적’과 ‘친구’를 가른다. ‘적’이 설정되면 거기에 대항해 ‘친구’가 만들어지고, ‘그들’이 규정되면 그 대립항으로 ‘우리’가 형성된다. 이런 특정한 적대 관계가 ‘정치적인 것’의 내용을 이룬다고 슈미트는 말한다. 적대와 갈등이 있는 곳에 ‘정치적인 것’이 있을 수밖에 없고, ‘정치적인 것’은 언제나 적대와 갈등을 내적 본질로 삼는다는 것이다. 

무페는 슈미트의 이런 과격한 주장이 ‘자유주의’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해부해 보여준다고 본다. 자유주의자들은 의견들의 충돌은 합의를 통해 마침내 조화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아무리 생각이 달라도 의견의 일치에 이를 수 있는 보편적 토대를 모두 공유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요컨대, ‘적대 없는 자유주의’가 가능하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무페는 이런 자유주의적 가정보다는 슈미트의 생각이 훨씬 더 삶의 실제 모습에 가깝다고 말한다. 정치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려면, 이런 자유주의적 가정을 일단 기각해야 한다. 

» 〈정치적인 것의 귀환〉
그렇다고 해서 무페가 자유주의를 마냥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에서 강조하는 ‘자유’, 특히 정치적 차원의 ‘자유’는 아무리 그것이 불완전하고 부실하다고 해도 폐기할 수 없는 본질적 가치다. 따라서 자유주의를 한 축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거부해서도 안 된다. 다만 여기서 무페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우익 선동가들이 말하는 그런 반공체제가 아니라 ‘자유’와 ‘민주’의 본질적 가치가 동시에 충족되는 체제, 경제적 평등이라는 사회주의의 가치를 포함하는 체제다. 

그러나 문제는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내적 필연성에 따라 결합된 이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다름·차이를 전적으로 긍정하는 이념이다. 반면에 ‘민주주의’는 1인1표제에서 드러나듯, 인민의 동질성·동일성을, 다시 말해 평등을 내용으로 하는 이념이다. 무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19세기 서구에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우연적으로 결합돼 ‘자유민주주의’를 성립시켰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평등은 언제나 긴장관계에 있다. 무페의 강조점은 이 ‘긴장’에 찍혀 있다. 이 긴장이야말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본질을 규정한다.” “다원적 민주주의는 화해할 수 없는 원칙들의 모순적 조합이다.” 이 결합은 쉽게 깨질 수 있다. “민주주의는 항상 허약한 정복이며, 따라서 심화시켜야 하는 만큼이나 방어도 중요하다.” 다원적 자유민주주의를 보장해주는 안전장치는 따로 없다는 말이다. 동시에 이런 긴장이야말로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다. 문제는 이 긴장이 깨져 둘 사이의 결합이 붕괴했을 때 벌어진다. 바로 그 붕괴의 순간에 근본주의나 전체주의가 도래할 수 있고, 경제권력이나 시장권력이 정치를 무력화해 버릴 수 있다. 

자유와 평등 사이의 이런 긴장,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이런 긴장이 슈미트가 말하는 ‘적대’로 드러나지 않고 건강한 대결로 귀결하려면, 의회와 정당이라는 민주주의의 절차적 공간이 활성화해야 한다고 무페는 강조한다. 그 공간에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자유와 민주의 가치가 실험되고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다시 ‘정치’다. 이 책의 한국어판을 기획한 후마니타스의 박상훈 대표(정치학 박사)는 “‘정치의 과잉’이 문제라고 외치면서 ‘정치논리 배제’ ‘경제논리 우선’을 역설하는 작금의 지배적 담론이 정치의 피폐화를 낳았다”고 말한다. 문제는 ‘정치 과잉’이 아니라 ‘정치 과소’다. 정치를 통해 갈등과 적대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 과정을 생략해버린 채, 정치 바깥으로 뛰쳐나가 ‘경제’만 붙드는 것은 민주주의 위기의 징후라는 것이다. 정치적 대립전선이 사라지면 자유도 민주도 동시에 사라질 수 있다고 무페는 말한다. 정치적 대결의 활성화는 단순히 정치를 살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를 살리는 일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접점을 찾다 

» 샹탈 무페. 사진 후마니타스 제공.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 샹탈 무페는? 

샹탈 무페는 1990년 한국어로 번역된 바 있는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한국어판 제목 ‘사회변혁과 헤게모니’)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정치철학자다. 그의 지적 동업자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써 1985년에 출간한 이 책에서 무페는 자신의 새로운 민주주의 전략을 처음 제출했다. 그 전까지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자신의 이론을 구상했던 무페는 이 책을 통해서 마르크스주의와 사실상 결별했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이론가라는 호칭은 이때 붙여졌다. 그의 새 민주주의 전략은 ‘급진적이고 다원주의적인 민주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무페와 라클라우는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그람시의 헤게모니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이 다양한 사회적 대립를 구성하는 하나의 층위일 뿐이며, 사회에는 다양한 투쟁들이 경합하고 있음을 포착했다. 이 경합하는 투쟁들을 일시적이고 불안정하지만 공동전선으로 모을 수 있는데, 그 공동전선을 구성하는 담론적 힘이 헤게모니다. 

이 책에 이어 나온 것이 <정치적인 것의 귀환>인데, 여기서 무페는 민주주의의 갈등적이고 투쟁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 그 불확정적인 긴장 속에서 경제적 평등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민주사회주의’ 혹은 ‘자유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 새 기획은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일한 주체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와는 완전히 다르며, 또 자유주의 이념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기존 좌파의 반자유주의적 기획과도 다르다. 무페는 자유를 절대화하는 전통의 자유주의와도 거리를 두고 사적 소유를 옹호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도 절연한다는 전제 위에서 개인의 자유와 인격의 자율을 인정하면서 평등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을 민주주의의 목표로 제시한다. 이 책에 이어 무페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더욱 숙고해 <카를 슈미트의 도전>(1999) <민주주의의 역설>(2000)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2005) 같은 책으로 펴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후마니타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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