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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Book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 근대적 시간, 근대적 공간을 넘어서

by 내오랜꿈 2007.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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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우리의 행동과 말, 사고를 제약하고, 그 흐름을 적당한 단위로 절단하여 채취하는 '시간-기계'다. 학교에나 작업장에나, 또 많은 경우에는 공부하는 아이들의 방에도 어김없이 달라붙어 있는 시간표는 매시간, 혹은 이미 주어진 분량의 시간마다 우리의 할 일을 정해준다. 시간표-기계. (초판 '서문' 중에서)



▲ 그림 1-14 채플린, <모던타임즈>, 1936   채플린은 나사를 돌리는 동작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가면서 점점 미쳐가는 신체를 통해서 이를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적절하게 보여준다. 더 나아가 그는 컨베이어 벨트 위의 나사를 따라 거대한 기계적 신체 안으로 끌려들어감으로써 기계의 움직임에 사로잡힌 인간의 신체를 극적으로 가시화한다. (69쪽)



시계를 타이틀백으로 시작하는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즈>는 제목 그 자체가 뜻하는 것처럼 근대적 시간성에 대한 예리한 묘사와 풍자를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채플린은 화장실에 드나들 때나 경찰에 쫓겨 공장에 들어올 때나 시간체크기 누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부인의 가슴에 달린 단추를 보고 너트로 오인해 쫓아가는, 정신병적인 상황에서도 잊지 못하고 시간체크기를 누르는 동작을 보여줌으로써, 근대적 시간성이 이미 (사람들의) 무의식의 내면 깊숙히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진경의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은 근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근대인들의 삶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조건으로 작용하는 근대적인 시간, 근대적인 공간에 대한 연구서다. 1997년에 나왔던 같은 책을 초판 이후의 연구 성과를 추가하고 기존의 글에 첨삭을 가해서 나온 개정증보판이다. 


초판과 비교해보면 우선 본문 중 4개의 글을 새로 추가했고 많은 도판과 주석도 추가했다. 결론에 해당하는 글도 따로이 독립된 장으로 새로 썼다. 그 결과 초판의 두 배에 이르는 분량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초판이 주던 딱딱하고 전문적인 연구서의 성격에서 어느 정도는 대중적인 교양서(?)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번 <들뢰즈와 문학-기계>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언급한 적이 있듯이 지은이는 들뢰즈/가타리의 이론적 틀을 빌려, 시간과 공간을 하나의 기계로 파악한다. 하지만 이는 사회적, 역사적으로 달라지는 기계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시간-기계' 와 '공간-기계'를 다룬다. 근대적인 시간·공간 개념의 탄생, 나아가 근대인들의 삶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조건으로서 근대적인 시간-기계와 공간-기계의 탄생에 대해 100여 개가 넘는 도판들을 삽입하고 주석을 달아 시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끔 유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집이나 학교, 공장 등 근대의 사회적 장에서 우리를 일상적으로 근대인으로 생산하는 '배치'를 탐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식하든 못하든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어떤 식으로든 이러한 근대적 시간-기계와 공간-기계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고, 이 지긋지긋한 근대적 삶을 넘어서는 것조차 이러한 근대적 시간-기계와 공간-기계를 극복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원시사회의 삶이나 중세사회를 언급할 것도 없이 농촌생활이 주를 이루던 우리의 부모님 세대의 시간 개념은 어떤 것이었을까? 해 뜨면 일어나 논밭을 갈고 해지면 들어와 잠을 자던,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살았을 것이다. 그들이 시계를 보며 9시까지 논에 나가고 6시까지 집에 들어오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13세기 말 발명되었다는 시계는 16세기경에 이르러 폭넓게 보급되는데, 시계를 통해 비로소 시간은 등질적인 어떤 양으로서 측정되고 분할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근대적 시간은 근대적 노동의 탄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 


리카도를 거쳐 마르크스에 의해 체계화된 근대적 노동 개념의 핵심은, 그것이 무엇을 생산하는 어떤 노동이냐, 곧 노동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이냐에 상관없이 추상적인 양으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농사를 짓는 일이나 공장에서 나사를 조이는 일이나 고기를 잡는 일이나 모두가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노동이란 것이다. 이때 이 추상적인 노동의 크기를 재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이러한 근대적 시간과 근대적 노동의 결합은 테일러주의에서 보이듯이 초 이하의 세분된 단위로 노동자의 활동을 통제하려는 메커니즘의 축을 이루면서 근대인의 삶과 행동을 제약하기 시작한다. 이제 시간은 상인들의 계약에서 공장의 규율로, 마침내는 기차의 선로를 따라 민중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와서 손목시계를 통해 우리의 신체에 직접 부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근대적 시간-기계는 우리의 신념이나 의지보다 먼저 작동하는 신체적 습속이 되어버린 것이고, 우리 신체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듯 분·초와 같은 미소한 단위시간으로 분할할 수 있는 근대의 추상적 시간에 익숙한 사람들과, 우리의 부모님 세대처럼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살던 근대 이전의 사람들 혹은 여전히 그러한 소농민들의 경우에 대해 우리는 동일한 방식의 행위를 기대하기 어렵다. 해뜨면 일어나 밭을 갈고 해지면 자는 그들로서는, 밤새 일을 해야하는 근대적 노동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며, 자연의 리듬을 벗어난 반복적인 단순노동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모던타임즈>에서 시계를 부수는 채플린의 행동은 근대적 시간성에 대한, 아니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근대적 삶의 양식과 통제방식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시간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변화되는 것이며, 사회적 변화가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고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인 것이다. 곧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달라질 수 있으며, 정확히는 사람들의 집합적인 삶의 변화를 통해서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가 <느림>에서 '한가로움'과 '여유로움'을 대비시키는 것도 정확히 이런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일한 행동의 양상이 이전에는 한가로움으로 간주되고 종종 멋과 미덕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면, 시계의 초침 안으로 삶이 끌려들어간 지금 그것은 결코 멋이나 미덕이 될 수 없는 빈둥거림이 된 것이다. 이러한 양상의 변화는 분명히 시간의 변화로 요약되는 사회적 삶의 변화와 긴밀히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 행동하며, 그 형식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 속으로 던져진다.


▲ 그림 1-16 달리, <기억의 고집>, 1931년   달리는 다른 방식으로 시계적 시간, 근대적 시간의 외부를 사유하려고 했다. 치즈처럼 부드러운 시계, 아니면 그림에서처럼 축 늘어지고 휘어진 시계를 통해서 시간의 비균질성과 '부드러움', 혹은 '휘어짐'을 가시화하는 것이었다. (73쪽)


그렇다면 지은이의 이러한 작업이 가지는 실천적 함의는 무엇일까? 단순히 시간은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요소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지은이는 항상 우리 사회의 변혁, 진보를 생각한다. 


그 변혁이란 게 단순히 국가권력을 대체하고 사회적 관계만 바꾸면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제 그것만으로 사회변혁을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세기 현실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삶의 양식, 삶의 관계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단순한 국가권력의 대체는 언제든 다시금 그런 국가권력을 재건할 수 있는 것이기에….


결국 이런 시간-기계와 공간-기계를 바꾸지 못한다면, 다른 종류의 배치로 변환시키지 못한다면, 근대적 삶을 넘어선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적 생활양식, 근대적 관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근대적 시간-기계와 공간-기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은이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그가 왜 근대적 시간, 근대적 주거공간 연구에 천착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고 할 수 있다.


"'혁명', 그것은 단지 국가권력을 해체하고 새로운 것을 대체하는 것만으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새로운 공간에서 활보하고,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들이 동일한 것을 재건할 수 있을 것임은 너무도 분명하지 않을까?" (이진경,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7편의 영화>, p31)


하지만 그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미 '기계'로서 선험성으로서 우리의 신체를 사로잡고 있으며, 우리의 삶을 사로잡고 있는, 저 불변의 확고한 힘을 갖고 있는 시간-기계와 공간-기계를 대체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지은이가 '진보'라는 개념을 시간의 구조 속에서 파악하며 전개하는 5장이 그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이것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는 사람들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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