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글이 되고 글이 삶이 되는 '노마드'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변방의 외부자 연암, 만주족 오랑캐가 통치하는 중화, 그리고 열하라는 낯선 공간. <열하일기>는 이 상이한 계열들이 접속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주름'이다."(75쪽)
우리 나라에서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치고 <열하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떠올리는 게 "연암이 중국의 열하를 여행하는 동안의 여행기" 정도일 것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열하일기>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명색 고전문학 연구가로 자처하는 지은이조차도 <열하일기>를 완독한 게 최근 2,3년 사이의 일이라고 한다. 전문 연구자가 이러할진대 보통 사람들에게 <열하일기>를 제대로 모른다고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어느 인터뷰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은이는 이것이 우리나라 '문사철'(문학,사학,철학)로 대변되는 인문학의 현주소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2003 푸른숲 |
고미숙의 책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그린비에서 내놓은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의 제1번이다. '고전을 다시 쓴다'는 명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흔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고전에 관한 주석서들, 본문을 인용하고 거기에 이런저런 해설을 덧붙인 책들과는 판이하다. 현재 3권의 '리-라이팅' 책들이 나와 있는데, 지금 여기의 사람들이 지금 여기의 코드로 고전이라는 텍스트에 새롭게 접근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기획물인 것이다.
지은이가 <열하일기>를 '다시 쓰는' 방식 역시 아주 독창적이다. 지은이는 연암의 <열하일기>를 해석하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철저하게 자신의 삶과 자신의 경험 속에서 <열하일기>를 읽고서 곧바로 텍스트를 해체시켜 버린다. 그리고는 자신의 사고틀 속에서 텍스트를 분석하고 복원하여 자기만의 '열하일기'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지은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글쓰기 방식과 연결되고 있다.
"<열하일기>는 여행기가 아니다. 여행이라는 장을 전혀 다른 배치로 바꾸고, 그 안에서 삶과 사유, 말과 행동이 종횡무진 흘러다니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흐름 속에서 글쓰기의 모든 경계들, 여행자와 이국적 풍경의 경계, 말과 사물의 경계는 여지없이 무너진다."(25쪽)
이 흐름 속에서 모든 경계는 사라진다. "삶과 지식의 경계가 사라져, 삶이 글이 되고 글이 삶이 되는 '노마드'(nomad)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연암에 대한 지은이의 평가이자 지은이 자신에 대한 다짐이다.
"연암은 흔히 떠올리듯, 원대한 뜻을 품었으나 제도권으로부터 축출당한 '불운한 천재'가 아니라, 체제의 내부로 끌어들이려는 국가장치로부터 끊임없이 '클리나멘'을 그으며 미끄러져 간 '유쾌한 분열자'였던 것." (이러한-인용자) "지배적 코드로부터의 탈주는 한편으론 고독한 결단이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늘 새로운 연대와 접속으로 가는 유쾌한 질주이기도 하다. 과거를 포기하고 체제 외부에서 살기로 작정했지만, 연암에게 '고독한 솔로'의 음울한 실루엣은 전혀 없다.
그는 세속적 소음이 끊어진 산정의 고고함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으로 부과된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서 온갖 목소리들이 웅성거리는 시정 속으로 들어갔다. 젊은 날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저잣거리의 풍문을 찾아 헤맸던 것처럼."(47~49쪽)
이 대목을 읽고 있노라면 연암의 모습만이 아니라 지은이의 모습도 '오버랩' 된다. 지은이 스스로 자신이 살아온 이력을 간략하게 압축하는 소개글에서 느낄 수 있는 모습들이 연암을 묘사하는 이 인용문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이다. 유쾌한 분열자 연암 박지원! 유쾌한 노마드 고미숙!
아는 사람들은 이미 느끼고 있겠지만 확실히 고미숙의 글쓰기는 많이 변했다. 비평가로 데뷔할 무렵의 글들(예컨대 <비평기계>의 글들)과 최근1,2년 사이에 보여주는 그의 글쓰기 방식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몇 번의 '인생역전'을 경험한 자의 깨우침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런지.
이 '깨우침'에 동참하는 일은 책의 제목처럼 '유쾌한' 경험이다. <열하일기>와 조우하게 되고 빠져들게 된 사연으로 시작해서 <열하일기>를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하는 몸풀기 격인 연암의 생애와 문체반정을 다루는 글로 이어지는 지은이의 글은 우선 읽기 쉽고 유머러스하다. <열하일기>의 웃음과 역설을 자기 것으로 체화한 자의 여유!
본격적으로 <열하일기>를 '다시쓰고' 있는 제3장부터 제5장까지의 지은이의 문체는 날아갈 듯 가볍고 경쾌하다. 마치 모짜르트의 소리들이 천상에라도 오른듯 가벼움의 극치를 달리듯이. 그러나 이 가볍고 유쾌한 문체는 결코 경박하지도 진지함을 잃지도 않는다.
탈주, 주름, 노마드 등 책을 펼쳐들고 목차만 훑어봐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지은이는 들뢰즈/가타리의 사유와 개념을 동원해 박지원과 <열하일기>를 다시 쓰고 있다. 지은이는 이 과정에서 연암을 중세적 사유를 뛰어넘으려는 '노마드'로 규정하면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그의 사유를 일관된 방법으로 추적해나간다. <열하일기>의 들뢰즈/가타리화?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들뢰즈-가타리는 하나의 분석틀일 뿐, 오히려 <열하일기>를 통해 들뢰즈-가타리를 '해석'하고 있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이른바 '메타 텍스트'.
전혀 연결될 것 같지 않은 동/서양 두 지식인의 사상, 18세기 조선 실학자의 행적과 현대 프랑스 철학자의 사유를 가로지르는 이런 작업은 결국 지은이가 들뢰즈를 사유해나가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에 따라서는 이러한 작업방식에 비판적 입장을 취할 수도 있으리라. <열하일기>를 너무나 일면적이고 편협하게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등과 같이. 그러나 이러한 지은이의 작업방식의 좋고 나쁨이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은 이 책의 의도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이러한 작업방식 자체가 수많은 <열하일기>를 다시 읽는 방식 가운데 하나를 제시해주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기에.
이는 책 말미에 보론으로 붙어 있는 "연암과 다산-중세 '외부'를 사유하는 두 가지 경로"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단순히 실학파의 거두 정도로 알고 있는 연암과 다산의 차이를 짚어가며,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연암/다산'의 사상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는 연암과 다산의 철학적 사유가 결코 실학파라는 '하나의 틀'로 묶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본다. 다산이 중세를 떠나 근대에 도달한 여행가였다면 연암은 중세에도 근대에도 머물지 않는, 시대와 공간을 떠도는 '노마드'(nomad)라는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 말이 의미하는 것에 동참하며 무릎을 칠만큼 명쾌한 '나눔'이다.
'그 무엇도 될 수 있었지만, 그 무엇도 아닌 존재', 연암 박지원. 지은이의 안내에 따라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너무나 즐거운 여행이다. 누구에게나 선뜻 동행을 권하고 싶을 만큼 즐거운 여행.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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