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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노자 & 장자

<장자>라는 텍스트에 대하여 - 2

by 내오랜꿈 2014.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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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텍스트 바깥은 없다?

사례1: 보르헤스의 소설 <픽션들>을 보면 존재하지 않는 저자를 만들어 인용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잡지를 인용하고, 어떤 저자의 쓰여지지 않은 책을 인용하는 등의 ‘허구(픽션)’를 만들어낸다(아마도 소설책 읽으면서 이미 읽었던 페이지를 두세 번 반복해서 다시 읽었던 유일한 책이 보르헤스 전집이 아닐까 싶다). ‘저자라는 관념’ 또는 ‘저자라는 기능’에 대한 비판 내지 조롱이라는 측면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이구동성으로 내세우는 작가다.

사례2: 90년대 초반 표절 시비로 한창 논란이 심했던 이인화의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는 작품의 상당 부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와 공지영 등의 소설 구절들과 같거나 비슷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여러 작품들의 문장을 절취해 필요에 따라 자신의 소설 곳곳에 삽입했다는 것.

이 두 사례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글쓰기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 사례다. ‘사례1’이 책의 저자 기능을 조롱하는 것이라면, ‘사례2’는 이른바 페스티쉬, 곧 혼성모방으로 원작과 모방작품의 경계가 모호해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글쓰기 기법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잊혀져간, 해묵은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를 꺼내는 이유는 <장자>라는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약간의 우회 과정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지난 세 달간 <장자>에 매달려 지냈는데 텍스트 해석의 차이가, 차이를 넘어 이질적이라고 해야 할 만큼 심각한 지경이다. 경우에 따라선 ‘이 사람이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번역과 해설인 곳도 숱하게 접할 수 있다(유감스럽게도 지난 번에 주로 언급되었고, 여기 몇몇 사람이 <장자>라고 알고 읽었을 번역본들, 곧 감산덕청의 두 가지 번역본, 김학주 번역본, 기세춘 번역본이 유독 더 그러하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 하겠다). 오죽했으면 영미권의 어느 학자는 “<장자> 번역은 어쩔 수 없이 ‘원문의 번역이기보다는 주석서의 번역’이 대부분”이라는 말까지 했을까?

‘텍스트 바깥은 없다.’

알다시피 데리다의 유명한 명제다. 문학이나 예술은 물론이고 인문과학에 대한 전통적인 비평은 작품이나 텍스트를 ‘저자’와 관련하여 다룬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어떠하고, 그때 저자는 어떤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그러한 영향이 해당 작품에 어떻게 녹아 있다 등등. 하여 비평은 이를 입증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 예컨대 저자가 읽은 책이나 그 당시의 사회적 환경, 심지어 저자의 편지나 일기는 물론 관련된 동료나 친구의 증언까지 동원된다. 그리하여 저자가 작품에 담은 의미를 특징짓고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곧 작품에서 저자의 메시지를 해석해내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데리다의 명제는 바로 이러한 전통적 소통이론을 비판하고 무력화시킨다.

데리다가 보기에 어떠한 작품도 독창적인 원본은 없으며, 텍스트들이 서로 결합된(이른바, ‘상호텍스트성’ 또는 ‘혼성모방’) 텍스트들만이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 의미의 발신자, 곧 저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텍스트와 수신자만이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어떠한 텍스트에도 일관되게 읽어내야 할 진정한 의미는 없고 읽는 사람이 독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해석을 반복하도록 강요하는 지배적인 해석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텍스트는 하나의 확고한 통일성에서 벗어난 여백을 포함하는데 이 여백은 새로운 독서와 해석이 다양하게 생성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현대예술이나 문학작품의 비평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씩은 들어보았을 수도 있는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이라는 표현은 이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2. '장자' 없는 <장자> 이해는 가능할까?

<장자>라는 텍스트를 이야기하면서 포스트모던이 어떠니 데리다가 어떠니 저자의 죽음이 어떠니 하는 말을 언급하고 시작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시중에 나와 있는 그 많은 번역본들이 모두 제각각이라 할 만큼 텍스트 이해의 차이가 크다는 데 있다. 이것은 마치 어떤 문학 작품을 비평하는 데 있어 저자의 의도(발신자의 메시지)와는 상관없이 텍스트를 읽는 수신자의 이해만이, 곧 어떠한 텍스트에도 일관되게 읽어내야 할 진정한 의미는 없고 읽는 사람이 독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게 취급되는 포스트모던적 텍스트 읽기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다들 한가락 한다는 전공자들이 번역한 <장자>라는 텍스트가 왜 이다지도 제각각이어야 하는지, 이것이 진정으로 획일적이고 지배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이른바 텍스트의) 여백의 공간을 표현한 것이고 이는 곧 텍스트 해석의 다양성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문학작품도 아닌 <장자>라는 심오한 철학적 텍스트가 전통적 의미에서의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이해해도 되는 것인지 등등.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가볍게 읽기 시작한 <장자>였는데, 어느 순간 나의 일상을 지배하는 ‘화두’가 되어버렸다. <장자>라는 심오한 철학적 텍스트가 주는 무게감에 이끌린 것도 있지만, 첫째는 시대를 앞서간 한 위대한 철학자의 ‘철학적 문제설정’을 ‘성인(=정치지도자)을 위한 (개인적) 수양론’으로 격하시키는 (일정 정도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한 선승의 해석과 그에 기인하는 엉터리 번역 때문이고, 둘째는 십수 권의 <장자> 번역서들을 하나하나 대조하면서 비교해본 결과 드러나는 번역자들의 현대 언어철학 이해의 부족에 기인하는 비논리적 <장자> 이해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특히, <장자> “제물론” 편은 결국 장자의 언어관을 이해해야만 논리적 이해가 가능한데, 이를 위해서는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현대 언어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어느 정도는 되어 있어야 올바른 번역을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래야만 齊物의 평등이 주는 의미 곧 동일성과 차이, 개별자와 보편자, 피차(彼此)와 시비(是非)의 해체를 통해 드러나는 <장자>의 사유관, 우주의 시원과 통일성에 대한 메타담론의 불가능성 등 그야말로 <장자> 철학의 핵심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장자>를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개인의 수양론으로 해석하면 “제물론” 편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게 고작 천뢰가 뭐니, 성인의 덕이 뭐니, 대각과 대몽, 지인(至人), 진군(眞君)이니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번역과 해설이 나온다.

천뢰라는 단어 하나가 나오면 이 단어의 뜻에 목매달고, 지인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것을 개념짓는데 목매달고, 진재(眞宰)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것을 설명하는데 목매다는 식이다. 하지만 <장자>는 결단코 그 어떤 용어도 언어로 개념화하거나 규정짓지 않았다. 심지어 <장자>는 '도'조차도 무엇이라 정의내리지 않았다. 장자는 어떤 사물(物)을 개념화하거나 정의내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인식했던 사람이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변화하는 사물(物)의 실체를 어떻게 개념화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예컨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밖에서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짖고 있는 삼순이의 실체를 무엇이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지금 짖고 있는 ‘삼순이’의 실체가 무엇이라 정의하는 순간 그 ‘삼순이’는 이미 조금 전에 짖고 있던 ‘삼순이’가 아니다. 1초 전의 삼순이와 지금 이 순간의 삼순이는 엄연히 다른, 곧 ‘이미 변화한’ 삼순이다. 삼순이의 태어남과 죽음까지의 여정을 전체 과정으로 볼 때 그 과정은 조금의 단절도 없는 연속된 흐름이다. 삼순이라는 개의 실체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데 어떻게 삼순이의 실체를 언어로 정의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무엇’이라 규정하는 순간 이미 삼순이는 규정되던 순간의 삼순이가 아닌 것이다. 이것이 <장자> 인식론의 핵심이자, <장자> 언어관의 요체다.

이러한 <장자>의 사유론은 “제물론” 편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는데, 도를 체득한 사람을 의인화하여 ‘지인’, ‘신인’, ‘성인’, ‘진인’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장자>에서는 도라는 개념 자체도 ‘천뢰’, ‘도추’, ‘천예’, ‘천균’ 등 상황에 맞게끔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고 있다. 도 자체도 고정된 그 어떤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하나의 흐름이다. 따라서 이러한 도를 무엇이라 규정하거나 개념화하려 시도하는 모든 <장자> 주석서나 번역서는 장자라는 철학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 이해하면 된다. 이러할진대 도의 체득자를 ‘의인화한’ 지인, 신인, 성인, 진인을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규정하고 정의하는 <장자> 주석서나 번역서는 분서하는 것이 마땅하다.

3. 철학과 명상 사이

언어철학, 논리철학의 기초가 부족한 <장자> 이해에 기인하는 번역은 <장자> 도입부부터 시작된다.

齊諧者, 志怪者也. 諧之言曰,
⓵ <齊諧>는 괴이한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齊諧>라는 책에 이르기를,
⓶ ‘齊諧’라는 사람은 괴이한 이야기를 잘 아는데, 그가 기록하여 말하기를,

이 부분은 <장자>의 도입부, 곧 곤과 붕 이야기를 시작한 뒤 다시 '齊諧'라는 사람(또는 책)을 언급하며 그가 장자 자신이 앞서 말한 곤과 붕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사실 이 ‘齊諧’를 책으로 번역하든 사람으로 번역하든 <장자> 이해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문제 삼는 부분은 이 부분의 해설이다. 대부분의 번역서에는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장자가 앞서 말한 ‘곤과 붕 이야기’가 너무 황당무계 하여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齊諧’라는 책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장자> “소요유” 편에서 ‘곤과 붕 이야기’는 전부 세 번 나오는데 이 모두가 장자가 자기 이야기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증거로 삼기 위해 세 번이나 언급한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한 번 생각해보자. 만약 이 세 번의 곤붕이야기 언급이 일부 <장자> 주석가나 번역자들의 해설대로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장자가 중복 인용한 것이라면 이 부분은 책이 아니라 사람으로 번역해야 한다.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 근거로 이 이야기가 기록된 책을 예로 든 것이라면 이야기를 듣는 화자들도 당연히 볼 수 있는 책일테니 그 책의 존재유무가 쟁점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책이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증거가 되었는데 왜 뒤에서 다시 탕왕과 극의 이야기를 만들어 다시 한 번 ‘곤붕의 이야기’를 언급해야 한단 말인가?

따라서 이 부분은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 근거를 대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수사로 이해해야 한다. 도입부를 던져 놓고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결론으로 내달아가기 위한 방편, 곧 시적운율의 고양과 같은 여러 글쓰기 기법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또는 책)의 이야기라고 인용한 뒤 거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덧붙이면서 좀 더 극적인 서술로 나아가는 글쓰기 기법. 이렇게 이해하면 '齊諧'를 책으로 번역하든, 사람으로 번역하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물론 이 경우에도 엄밀히 따지면 ⓶의 번역과 같이 사람으로 하는 게 옳다고 본다). 이것을 책으로 번역해 놓고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반복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주석가나 번역자가 과연 <장자>의 언어철학을 논하는 “제물론” 편을 제대로 풀어낼 수 있을까? 자,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장자> 번역서는 이 부분을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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