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X의 탄생 |
유사 파시즘, 신자유주의 공안국가, 파시즘 프렌들리… |
출처:<한겨레21> 제764호, 2009.06.12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대중의 이해력은 아주 작으며, 잊어버리는 능력은 엄청나다.”(히틀러, <나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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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여 명의 시민들이 뙤약볕 아래 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를 지켜봤다. 지난 5월29일, 거리와 광장에 ‘제 발로’ 나온 그들을 이명박 대통령이 어찌 생각하는지 아직 밝혀진 바 없다. 대신 ‘친이명박’ 정치인들의 흉중에는 이런 판단이 똬리 틀고 있다. “작년 촛불 정국을 되돌아보면 해답은 나온다. 지금 누가 미국산 쇠고기 먹으면서 광우병 걱정하나. 국민들이 감성에 휩쓸려서 광풍이 불어닥쳤지만 그 자체도 잊은 국민이 많을 것이다. 노무현 조문 정국이라는 광풍 역시 정 많은 국민들이 또다시 겪는 사변이다.”
말의 논리 그대로 마저 결론짓자면, 지금은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지만 곧 잊어버리고 조용히 지낼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말한 장광근 한나라당 사무총장은 이명박 대선 후보 경선 캠프의 대변인을 지냈다. 혹시 말실수는 아닐까? 발언이 나온 것은 지난 6월3일, 사무총장 이·취임식 자리였다. 취임사를 홧김에 내뱉는 이는 없다. 이미 안상수 신임 원내대표가 5월27일 “국민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이 있어 소요사태가 일어날지 걱정”이라고 말해 야당의 거센 반발을 일으킨 뒤였다. 다른 이가 뭐라건 거듭해 공언한다면 ‘실수’가 아니라 ‘신념’이라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친이’ 계열이 장악한 한나라당 원내 지도부는 6월4일 의원 연찬회를 열었다. “진보·좌파·친북 세력인 꽃뱀에게 신경쓰지 말고 본처에게나 신경써라.” 초청 강연자는 송대성 세종연구소 소장. 원내 지도부가 간택해 불렀다. 국정감사나 국회 본회의 질문에서 상대 발언을 끊고 호통치는 게 국회의원들의 습속이다. 이날 참석한140여 명 한나라당 의원들의 다수는 강연을 끝까지 경청했다. “황당하다”며 항의하거나 퇴장한 의원은 몇몇에 그쳤다. 다수의 한나라당 의원에게 ‘꽃뱀론’은 호통치며 내쳐야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청와대 한 수석실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열기가 좌파 방송 때문이므로 절대로 흔들리면 안 된다는 게 내부 분위기”라고 최근 상황을 전했다. “미디어법 통과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국정 방향에도 변함이 없다”고 덧붙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 시민들의 추모 열기, 교수들의 시국선언, 정부에 비판적인 여론조사 결과 등을 모두 배척하고 있다. ‘독주’다. 이를 ‘독재’라 칭하는 이도 늘고 있다.
비판 여론은 안 듣는다. 집회·시위는 금지한다. 그들은 현재 조작당하고 있을 뿐이므로, 조만간 대중을 조작하는 자들을 처벌하면 된다…. 청와대의 이런 인식에서 ‘파시즘’을 읽어내는 목소리도 마침내 터져나오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
“두 조건과 하나의 전략이 결합할 경우 이명박 정권은 새로운 ‘파시즘 엑스(X)’ 체제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계간 <문화과학> 2009년 여름호)
<문화과학>은 학술지다. 30명의 학자들이 자문위원 및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만든다. 편집위원회 공동 명의의 글이 최근호에 실렸다. 이명박 정권이 ‘파시즘 엑스’로 돌변할 가능성을 경고했다. 학자들이 집단적으로 ‘파시즘’의 개념을 빌려 현 정부를 공식 호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학계에선 파시즘을 함부로 규정하는 것을 꺼린다. 우파 세력을 모욕주려고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쉽게 사용하면, 진짜 파시즘의 등장을 흘려버리는 ‘양치기 소년’이 될 수 있다.
‘파시즘 엑스’는 조금 다르다. 일단 유보적인 개념이다. 이명박 정권이 곧 파시스트 정권인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그렇게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그 형태가 과거 독일·이탈리아의 파시즘과는 조금 다를 것이라는 점에서 미지의 것을 경고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문화과학>은 현 정부가 ‘파시즘 엑스’로 변화할 “여러 조건과 요소들이 현저하게 부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선 한국 경제가 올 하반기에 ‘U’자형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L’자형으로 침체할 경우, 또 대다수 국민들이 탈정치화돼 먹고사는 문제에만 급급할 경우, 그리고 우파가 억압·통제를 통해 이런 상황을 돌파할 경우, “세계 최초로 신자유주의 해체기의 ‘파시즘 엑스’가 한국에서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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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은 광범위한 ‘파시스트 대중운동’을 애견처럼 데리고 다닌다. 그런 우익 사회운동이 한국에서 가능할까? <문화과학>의 설명은 이렇다. △장기 침체로 인해 시장에서 퇴출되고 있는 600만 명 이상의 자영업자 △100만 명에 이르는 실업자 및 850만 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잠재적 실업자이면서도 소비자본주의에 익숙한 20대 등이 우익 사회운동의 기반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이명박 정부 지지율 30%를 떠받치는 견고한 보수층(우익 개신교·50대 이상 노년층·영남)이 중핵이 되고, 뉴라이트 단체들이 불쏘시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 3월 국민행동본부 산하 ‘애국기동대’의 출범은 작지만 눈여겨볼 대목이다. 해병대·특전사 출신 90여명으로 이뤄진 애국기동대는 출범 선언에서 “반헌법적 좌익 폭도들과 싸운다” “좌익들의 패륜적 테러에 대해 정당방위적 자위권을 행사한다”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는 종북 반역 세력을 공동체의 적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제거하는 일에 목숨을 바친다” 등을 ‘맹세’했다. 선언문만 보자면, 극우 돌격대를 연상시킨다. 출범식 직후에는 무술 시범도 보였다.
파시즘은 강력한 국가 통제를 특징으로 한다. <문화과학>은 ‘MB 악법’에 주목한다. 국정원법 개정(국내정보 수집권한 확대·국가비밀 범위 확대), 집회·시위법 개정(마스크 착용 금지), 신문·방송법 개정(신방 겸영 허용·대기업 지상파 지분 확대), 통신비밀보호법 개정(감청 권한 강화) 등은 개인의 자유와 밀접히 관련돼 있다.
관련법 개정이 이뤄지면 표현의 자유의 모든 영역을 ‘합법적으로’ 틀어막을 수 있다. 여기에 최근 북핵 위기로 인한 남북 대결 국면은 ‘외부의 적’을 동원하는 공포정치의 바탕이 될 수 있다. <문화과학> 발행인인 강내희 중앙대 교수(영문학)는 “히틀러의 나치즘은 정권을 먼저 장악하고 나중에 우익 대중운동을 일으켰다”며 “이명박 정부의 집권 기간에도 ‘국면’에 대한 판단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 엑스’가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자유주의와 좌파에 대한 적대감, 적으로 규정한 대상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서슴지 않겠다는 의지를 매개로 탄생한 합성물이 파시즘 정권이다.”(로버트 팩스턴, <파시즘>)
이명박 정부는 정말 ‘파시즘 엑스’ 정권으로 향하는 외길에 오른 것일까? 성향이 조금씩 다른 정치학자들에게 물었더니, 그런 규정이 아직은 이르다고 지적한다. 다만 ‘파시즘적 경향’은 급증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현 정권이 정말 파시스트 정권이라면 모든 세력이 연합해 이를 막아야 하는데, 그렇게 강하게 규정하면 좌파 세력 내부의 건강한 ‘차이’가 사라지고 일종의 ‘반파시스트 전선’만 득세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다만 “민주주의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대중을 동원해 반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권력이 판단한다면, 이를 ‘유사 파시즘’이라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고세훈 고려대 교수(공공행정학)도 “권위주의를 오랫동안 경험한 한국 시민들의 저항을 염두에 둔다면, 노골적인 파시즘이 한국에서 등장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억압은 “전체주의건 권위주의건 파시즘이건 (민주주의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로서 심각한 상황”이라고 본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는 파시즘 대신 ‘신자유주의 공안국가’라는 말을 쓴다. 이명박 정부 들어 언론·집회·사상·결사의 자유가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고, 검찰·경찰·감사원 등 권력기관도 과거처럼 ‘정권의 하수인’이 됐다. 그는 “파시즘이라고 규정짓는 일보다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파쇼화’를 우려하고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레커먼은 ‘프렌들리 파시스트’(friendly fascist)라는 말을 썼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정권이 ‘선한 얼굴로’ 정치적 반동을 재촉했다는 것이다. ‘파시즘 프렌들리’의 맥을 잇는 아들 부시 대통령 시절, 미국의 사회비평가 나오미 울프는 <미국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파시즘 이행기’라는 표현을 썼다. 부시 정권이 민주주의에서 파시즘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마련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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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파시스트 체제로 옮아가는 것은 여러 행위들이 합쳐져 민주주의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는 형태를 취한다. (그 결과) 어느 순간 민주주의가 급작스럽게 퇴보한다”고 봤다. ‘파시즘 이행기’를 판별할 몇 가지 잣대를 제시했는데, 이명박 정부 시기의 한국 시민들에게도 유용할 것이다.
△집회·시위에 나서거나 비판적 발언을 하면 신체적 위협을 가한다. 시민들의 무차별 체포와 투옥을 꺼리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민간의 ‘준군사조직’이 등장한다. △일반 시민을 사찰한다. 도청을 합법화하고 개인의 전과와 정치 성향, 사생활 등을 기록한 개인 자료를 활용한다. △교수·공무원·언론인·문화예술인 등 비판적 인사들을 전략적으로 겨냥해 직장에서 쫓아내거나 경력을 파괴한다. △시민단체에 첩자를 심어 조직을 파괴하거나 국세청의 세무조사 등으로 괴롭힌다. △비판적 검사를 해임하는 등 법의 지배 방식을 뒤엎는다. 인격모독을 포함한 고문, 근거 없는 고발, 저지르지 않은 범죄에 대한 마구잡이 기소 등의 사법독재가 등장한다. △정치적 압박으로 자유언론을 탄압한다. 언론인을 모독하거나 수치심을 주고, 해당 언론의 책임자들이 언론인을 해고하게 만든다. △시민들의 사상·행위·표현을 범죄로 만들기 위해 불법행위의 범주를 새롭게 만들어낸다. 새로 법을 만들거나 개정해 ‘법의 이름으로’ 처벌한다. △일련의 과정에서 안팎의 위협을 부각시킨다.
나오미 울프는 파시즘이 소리 없이 진행된다고 말한다. 그가 제시한 ‘파시즘 이행기’의 잣대는 어쩐지 낯익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22년이 지난 2009년 6월, 한국의 시민들은 파국의 징후를 날마다 발견한다. 경찰·검찰·언론 등에서 일어나는 그 징후를 돋보기로 들여다볼 때다. 안 그러면 ‘파시즘 엑스’가 정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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