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과 바디우, “참아야 하는 정체성의 가벼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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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증상읽기 4 라캉과 바디우, “참아야 하는 정체성의 가벼움”
백상현|파리8대학 예술학 박사
멘토와 멘티의 정체성 최근 한국 사회는 멘토 열풍이 뜨겁다. 방송과 출판계는 삶의 진리를 말하는 멘토들을 발굴하여 우리 인생에 나아갈 좌표를 제시하고, 이러한 가르침에 열광하는 멘티들을 양산한다. 자아와 정체성의 탐사기라고도 할 수 있는 청소년기를 ‘수능’에 몰수당한 청춘들의 뒤늦은 욕구가 멘토 열풍의 원인이었다면 나쁠 것도 없다. 문제는 그들이 요구하고 멘토들이 답하는 진리의 형식에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세계는 무엇인지를 묻는 멘티의 질문에 멘토는 선명한 의미로 답을 하지만, 그러는 사이 우리는 사회의 지배적 패러다임을 구성하는 지식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반복하게 될 뿐이다. 의미라는 것은 존재를 감싸는 테두리일 뿐만 아니라, 존재를 가두는 감옥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라캉의 정신분석과 바디우의 주체이론으로부터 출발하는 조금 색다른 정체성의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여기서 ‘색이 다르다’는 표현을 엄밀히 하면, 사실 그들의 정체성 이론에는 색이 없는 공허만 가득하다. 텅 빈 공백의 정체성, 혹은 정체성의 소멸을 주장하는 기이하게 투명한 반(反)정체성의 이론은 20세기와 21세기의 인문학이 주체성이라는 개념을 사유하면서 도달한 가장 낯선 장소로 우리를 데려가 줄 것이다.
호퍼: 텅 빈 풍경의 매혹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이야기로 논의를 시작해보자. 호퍼의 그림은 공허하다. 풍경은 텅 비었고, 그려진 인물들 역시 익명의 존재로 느껴진다. 아직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세계; 혹은 이제까지의 의미를 상실한 순간의 세계 이미지: 이미지와 의미의 안정된 연결이 이미지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호퍼의 작품들은 정체성 상실의 순간이 이미지화된 것이라 말해도 좋지 않을까? 정신분석은 이러한 의미 상실의 순간을 ‘우울증’으로 해석한다. 환자의 ‘말-상징체계’가 환자 자신이 누구인지, 나아가서 환자의 세계-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려 들지 않는 현상은 우울증의 전형적 증상이다. 호퍼는 이미지의 우울증이라 불러도 좋을 의미상실과 상징질서 둔화(완만화)(1)의 증상을 멜랑콜리의 매혹 속에서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매혹은 정체성의 윤리와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호퍼의 그림 속 이미지를 의미에 대한 거부와 저항의 관점에서 파악할 경우 그것은 타자의 상징질서에 대해 투쟁하는 이미지의 매혹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 세계는 의미들의 고전주의적 질서를 거부하는 저항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결정불가능성을 지켜내려는 투쟁, 쉽게 말해서 타자가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도록 하는 완고함을 유지하려는 투쟁의 매혹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텅 빈 것을 이토록 매혹적으로 그려내는 것은 텅 빈 것이 아무것도 아니면서도 동시에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라는’ 기이한 감정을 유발한다. 그것은 ‘없음이 있다’고 하는 역설적 감정을 관객에게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은 모든 집합의 보편적 부분집합이 공집합이라는 명제 속에서 어떻게 라캉-바디우의 현대적 주체이론이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플라톤, 정체성의 고전주의적 해석 정체성에 관한 가장 오래된 오해는 고전주의적 해석으로 그것은 실체론적이다. 이에 따르면, 정체성이란 어딘가에서 찾아지는 아주 소중한 사물(The Thing)과 같다. 정신분석 상담을 위해 분석가를 찾는 청소년기의 환자들이 흔히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흩어져 있어서” 마치 여러 얼굴을 가진 것처럼 여겨지는 감정들이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이게 나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소중한 사물을 이 세상 어딘가에 잃어버린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어떤’ 분석가나 정신과 의사들은 이렇게 불안해하는 환자들에게 하나의 모델을 제시한다. 자신의 자아가 명확히 파악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인정된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분석가나 의사 자신의 이미지이다. 많은 지식과 존경할 만한 품성을 소유한 것처럼 보이는 의사의 안정된 자아-인격-모델은 환자에게 그것을 모방하도록 유혹하고, 그리하여 환자의 자아는 더 이상 흩어진 파편들이 아니라 하나로 모아진 중심을 갖게 된다. 물론 이러한 정체성 정립의 과정은 병원이나 상담실의 공간에만 한정된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 문명이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과정 일반과 다름없으며, 아주 오래된 기원을 갖는다. 기원전 5세기의 철학자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바로 이러한 정체성의 따라야 할 모델, 즉 본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자아가 조화 속에서 실현되는 ‘인간론’을 주장했다. 각자의 인간은 각자의 도리가 ‘있음’을 운운하는 동양적 사고 속에서도 정체성에 대한 동일한 관점이 발견된다.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이와 같은 고전주의적 자아론은 정체성에 대한 가장 오래된 환상임에 틀림없다.
라캉, 참아야 하는 “존재의 가벼움” 20세기의 인문학, 그중에서도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이 고전주의적 정체성에 대한 환영을 폭로하려 했던 이유는 그것이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상적 자아 모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올바름의 원형들이란 하나의 사회 구조가 생산해 내는 가장 정교한 지식-권력의 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식-권력을 단순히 한 사회를 지배하는 고정관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회 구성원 개인들의 정체성이 고정관념 자체의 틀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통제한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소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러한 정체성의 통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일상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인간 존재의 난국이 위치한다. 정체성을 받아들이면 자아는 소외되지만 반대로 그것을 거부한다면 자아는 파괴될 수도 있다. 거부하면 ‘나’는 흩어지고(우울증), 수용하면 ‘나’는 타자의 삶을 반복한다(소외).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나’의 통일성이라는 개념에 질문을 던지는 라캉-정신분석의 도전은 바로 이와 같은 20세기 주체이론의 모순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정신과 의사였으며, 정신분석 상담의로서 활동했던 자크 라캉이 이 같은 주체성의 난국에 직면하여 선택한 전략은 놀랍게도 반(反)임상적인 관점이었다. 여기서 반(反)임상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먼저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의학에서 임상이라고 부르는 실천은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임상의학에서의 윤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문학적 개념으로서의 윤리는 아니다. 인문학에서의 윤리는 진리라는 개념을 가정하며, 이것은 쾌락과 관련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칸트 이후로 윤리학은 마음의 안정이나 평온함과 같은 쾌락의 추구와 결별한다. 반면, 임상의학은 환자의 고통(불쾌)을 줄이고 정상적 안정(쾌락)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임상의학은 마취제와 같은 수단을 동원하여 환자를 극단적인 수동적 상태에 머물도록 할 수도 있다. 환자의 고통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환자의 주체성을 배제시키는 것이다. 일반적 심리학의 상담 치료 경우에도 동일한 마취 기능이 사용되는데, 특히 정체성과 관련하여 그러한 일들이 벌어진다. ‘자아 심리학’이라 부르는 경향의 치료는 정체성에 혼돈을 겪는 환자에게 사회적으로 공인된 안정적이며 정상적인 자아 모델(멘토)을 흉내(동일시) 내도록 유도한다. 이것이 마취인 이유는, 환자의 자아라는 것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 인간 주체란 텅 빈 구멍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그곳에 거짓 지식을 봉합하려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임상심리치료는 효과적이다. 환자의 자아는 안정되며 주체는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하지 않아도 되는 평온함을 획득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온함의 쾌락은 존재의 진리를 망각하게 한다. 존재의 이면에, 그 토대에 텅 빈 공백의 허무가 있다는 진리를 잊게 한다. 라캉이 필사의 노력으로 거부하는 것이 바로 “존재로서의 존재(l’être en tant qu’être)”인 공백의 망각이다. 그는 분석가를 찾아온 환자(분석주체)의 심리적 안정이나 쾌락보다는 공백의 진리, 허무의 진리이기도 한 그것을 강조한다. 물론 이 진리는 아주 소량만으로도 환자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환자는 자신의 정체성 한가운데서 텅 빈 공허의 구멍을 발견하고 환멸의 나락으로 추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라캉은 공백의 허무 한가운데 주체의 좌표가 존재한다는 전혀 새로운 20세기의 주체이론을 제공하려 했다. 인간 정신의 치료는 신체의 치료와는 달라야 했기 때문이다. 주체성이라는 개념, 그것이 아무리 문명이 만들어낸 허구적이며 인위적인 발명품이라 해도,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배제한 정신의 치료는 인간을 동물과 동일한 차원으로 추락시킬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살게 하는 환영적 정체성만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진리가 필요하며, 그것은 상상적 실체(의미)가 아니라 자리의 형식으로 존재한다(실재). 진리의 텅 빈 자리는 주체가 그곳에 도달하여 자신만의 의미(주인기표)를 창조해 낼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이다. 이 장소에 도달하는 것, 그리하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홀로 견뎌내는 것, 이것이 라캉의 정체성 윤리의 기본틀이다.
증상의 상징화 정체성이 균열을 일으키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불안의 다양한 증상들이 현시(presentation)된다면, 이러한 불안을 치유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증상을 상징화-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이다. 증상들이 위협적인 것은, 그들이 출현하였던 원인이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바디우라면 특이성(singuler)이라 불렀을- (비)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불안 증상이 불안한 이유는 그것의 원인을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지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 그것은 현재 나의 정체성을 지배하는 지식의 체계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증언한다. 따라서 이러한 불안증에 대해 우리가 실행하는 가장 흔한 처방은 자아를 위협하는 불안의 신호들을 말로서 재-해석하여 일관된 세계관 속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정체성을 지배하는 언어가 (또는 세계관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그것은 타자의 언어, 타자의 고정관념을 나의 삶 속에서 반복하는 것이다. 주체의 이 같은 소외를 비켜가기 위해 라캉은 증상들이 출현시키는 공백 또는 균열이라 부를 수 있는 실재와 주체가 대면하고(개입) 이것을 명명할 기표를 ‘스스로 찾아 나설 것’을 제안한다(결정불가능성 속에서 결정하기). 필자는 이러한 대면을 ‘유령과의 조우’라고 표현하고 싶다. 우리의 자아가 속해 있는 현실 세계의 존재 질서가 균열을 일으키면서 현시하는 유령적 비-존재의 출현과 주체가 만나게 되는 사건: 주체가 설명하거나 감당할 수 없었던 원인모를 신체-심리적 증상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의 당혹: 그 순간 우리는 증상의 유령적 속성에 놀라고 그것을 외면하려 한다. 우리의 의식과 전의식은 무의식으로부터 출현한 그와 같은 유령적 증상을 억압하여 통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재의 유령이 가진 속성은 ‘그럼에도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의 한가운데로 출현하여 우리의 정체성에 균열을 일으키며 불안을 야기할 것이다. 따라서 세계의 균열이며, 삶의 부조화라는 은폐된 진리로부터 출현하는 공백의 유령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뿐이다. 공백의 유령을 두려워하여 외면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킬 것을 두려워한다는 말과 같다. 반대로, 유령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든 자신의 정체성을 폐기하고 다른 무엇으로의 변화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갖는다. 라캉이 실재와 주체가 대면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만일 실재(허무)를 억압하고 그것을 현실의 지배담론으로 은폐한다면 그것은 실재를 자아의 그림자로 가리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와 주체가 대면한다면 실재와 주체 모두 공백을 중심으로 동일시됨을 의미한다. 라캉은 이와 같은 존재의 0도, 상징화의 0도로 돌아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정체성 창조의 윤리를 ‘소멸’이라는 개념으로 명명한다(<에크리>: “사드와 함께 칸트를” 참조). 그리고 20세기적 진리의 라캉적 창안을 계승한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이것을 ‘사건’이라는 개념을 통해 보다 선명하게 이론화한다.
바디우, 증상 또는 사건의 매혹 바디우는 주체적 사유가 출발하는 순간을 현시(일상)에 대한 재현(생각)의 초과(증상)로 파악한다. 주체적 사유는 우리 세계의 질서가 기능장애를 일으키며 자신에게 포함된 일상의 부분집합들을 더 이상 일관된 언어로 설명할 수 없을 때, 그리고 이러한 설명 불가능한 상황을 누군가 새로운 문법으로 명명하려고(개입) 할 때 발생한다. 좀 더 상식적인 표현을 쓰자면, 진리의 순간은 우리 자신을 규정하던 정체성의 지식들이 우리 자신의 자아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실패하는 순간, 이러한 ‘초과’에 대해 우리 자신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아를 파악하려는 시도 속에서 실현된다. ‘나 자신’이라는 존재의 질서는 사회구조적 지배질서에 의해 명명되기 마련인데, 이러한 명명이 더 이상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정체성 상실의 순간이 발생할 수 있으며 (현시에 대한 재현의 초과), 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였는지가 아니라) 누구일 수 있는지를 현존하는 언어가 아닌 전혀 새로운 언어로 명명할 것을 요청받는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의 조선 여성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여성의 정체성은 당시의 고정관념에 의해 규정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정체성(재현질서)에 만족하여 살아간다면 그녀는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어떤 피치 못할 사건이 발생하고,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에 혼돈을 느끼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예를 들어, 여성은 미술이라는 서양문물을 접하고 예술적 창조라는 실천이 소유하고 있는 전혀 새로운 지식들에 매혹 당한다. 여성은 화가가 되어 예술적 창조의 다양한 실천들을 ‘흉내 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자유분방한 삶은 아직 남성의 영역에 속한다. 당시의 지배적 관념은 이것을 일탈로 간주하며, 심지어는 타락으로 간주할 것이다. 당시 조선의 “생각의 구조”는 여성의 이와 같은 새로운 정체성의 구성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바로 이때 이 여성은 정체성의 혼돈을 느끼게 된다(유령의 출현). 여성은 자신의 정체성을 이미 존재하는 지배 담론에 귀속시킬 것인지 아니면 전혀 새로운 담론, 확실치도 않으며 조선의 누구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전혀 낯선 담론을 발명하여 새롭게 규정할 것인지의 기로에 놓인다. 물론 당시의 관점에서 후자의 정체성은 정체성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한 사회의 ‘타락의 징후’로 간주될 뿐이다. 그것은 ‘여자의 도리를 벗어난 일탈에 불과하다.’ 그것은 정체성 자체의 상실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흔히 사회적 규범과 질서라고 부르는 것은 바디우가 말하는 ‘재현’의 구조와 다름없는 것이며, 이와 같은 규범들은 사회 현상의 자연적 상황, 즉 순리(順理)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강제되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이것을 현시와 재현 사이에 존재하는 초과를 억압하는 과정이라고 부른다. 현재 존재하는 관습과 규범과 제도를 영원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가정하려는 사유의 경향이 그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순리와 인간사의 이치를 동일한 것으로 가정하는 이러한 생각의 경향은 가장 기만적인 환상에 불과하다. 어떤 사회적 규범과 제도도 자연적 상황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관습과 제도는 그 출발에 있어서는 이미 자연적 상황과의 단절이었으며(초일자), 인위적 분리였다(개입). 인간사의 모든 개념과 지식은 사유의 개입에 의해 발생한 인위적 파생물들일 뿐이다. 따라서 자연스러운 정체성 따위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사유는 또한 이러한 비자연적 파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신화화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것을 바디우는 구성주의적 사유(la pensée constructiviste)라고 부르는데, 라캉은 이것을 균열을 은폐하는 생각의 경향이라는 의미에서 간단히 현실원칙이라 부른다. 둘 모두 동일한 내용을 겨냥하고 있다. 둘 모두 사회적 현실 속에서 공백의 유령이 출현하는 것을 억압하려는 의도를 갖기 때문이다. 공백이란 한 사회 구조의 균열점을 의미한다. 균열점이 출현하면 구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러한 균열-공백을 은폐하려 한다. 만일 억압이 실패한다면 구조는 자신의 불완전성을 폭로당하고, 구조 자체의 붕괴와 함께 새로운 구조에 의해 대체될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체성의 추구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주체는 바로 이러한 공백의 출현, 유령의 출현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주체성이란 상상적이며 기만적인 실체로서의 자아를 그저 받아들이는 행위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의 포획에 저항하는 행위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체성의 진정한 추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재현적 언어를 ‘발명’하는 과정을 필히 포함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란 이미 사회적 구조와 타자적 지식의 복사본에 불과하며, 새로운 언어나 문법이란 현실 언어 속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증상이라는 개념을 통해 주체적 정체성 구성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고, 알랭 바디우는 이것을 사건의 개념으로 재해석하면서 동일한 가능성을 개념화한다. 둘 모두 우리 자신이 아닌 어떤 것의 출현에 휩쓸려 자아를 상실(개방)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개념화이다. 앞서 예로 들었던 조선의 한 여성의 사례가 그것을 증언한다. 신예술이라는 매혹에 자신의 존재를 휩쓸려버린 여성의 자아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과거의 조선 여성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존재, 조선의 관점에서 보자면 “누구의 딸도 아닌”, 누구의 아내도, 어머니도, 누이도 아닌, 전혀 다른 미래에 개방된 존재로서 자신을 명명할 것인지에 대한 시험이 그것이다. 그녀가 의존할 새로운 문법은 그녀에게 찾아온 유령 같은 욕망(죽음충동)이며, 그것에 달라붙어있는 텅 빈 단어들의 조합뿐이다. 그것은 ‘자유’, ‘창조’, ‘성 평등’ 따위의 이미 알려진 개념들이지만, 그러나 그녀의 삶 속에 어색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얽혀 들어와 고통을 초래하게 된 텅 빈 기표들, 떠도는 기표들이다.(2)
멜랑콜리의 매혹 엄밀한 의미에서 사건과 증상은 우리의 소관 밖이다. 그것들은 주체의 관점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우연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외된 정체성을 바꾸기 위해 사건을 불러올 수도 없으며, 증상을 출현시킬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관찰하며 기다리는 것뿐이다. 이것을 필자는 ‘공부’라 부르고 싶다. 세상과 나 자신의 구조에 대한 공부. 만일 이것을 앎에 대한 추구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것은 사건이 나에게 일어났음을 사후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앎에 대한 추구이다. 혹은, 증상이 나의 소외된 정체성을 위협했던 붕괴의 경험을 존재의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간주할 수 있도록 하는, 그리하여 진리란 지식의 정점이 아니라 균열점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앎, 즉 무지(無知)를 위한 지(知), 없음을 사유하는 기술이다. 없음을 사유하는 주체는 구조의 질서, 있음의 질서인 그것에 종속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공부, 즉 무지해지기 위한 지의 추구는 외롭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상실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공부이다. 그것은 세계의 사물들을 더 이상 욕망할 수 없는 지적 거식증의 단계에로까지 우리를 몰아가는 위험한 공부이기도 하다. 그것이 실천되는 장소는 우울증이 지배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멜랑콜리의 정서가 매혹을 통해 지탱될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 세계의 우울에도 불구하고 그 텅 비어있음을 욕망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 이것은 단지 고독을 견뎌내는 훈련이 아니라 고독의 한가운데서 출현한 사물을 자신의 정체성을 비워내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이다. 어떻게 그런 훈련을 할 수 있을까? 이 글의 도입에서 언급했던 호퍼의 그림으로부터 답을 찾을 수 있다. 호퍼의 그림은 텅 빈 것의 매혹이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신경증의 무한히 반복되는 망각도, 우울증의 자기 파괴적 결단(자살)도, 성 도착적 권력에의 복종(전체주의)도 아닌 다른 매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림은 보여주고 있으며, 비슷한 사례는 현대예술-문화의 다양한 공간들 속에서 쉽사리 발견된다. 소멸을 매혹과 함께 출현시켰던 이와 같은 무에 대한 숭배의 실천들 속에서 실재를 견뎌내는 것,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텅 비어 있음을 견뎌 내는 것, 비-존재를 견뎌 내는 것, 이것이 정체성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인 실천이 아닐까?
글·백상현 파리8대학 예술학 박사. 현재 강남대학에서 고전철학과 프랑스철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수원대, 이화여대, 고려대 등 다수 대학에서 라캉주의 미술비평과 인문학을 강의했다. 각종 강의와 글쓰기를 통해 라캉과 바디우의 인문학에 토대한 ‘유령학’의 정립을 시도하고 있다.
( 정신분석은 이것을 ‘우울증적 완만화’라고 부른다. 다니엘 비들뢰셰(Daniel Widlöcher), <Le ralentissement dépressif(우울증적 완만화)>(P.U.F) ( 필자는 자유분방한 삶 끝에 객사한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을 암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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