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징후들
▲ <네이키드> 포스터 |
조니는 맨체스터를 떠나 런던에 사는 옛 애인 루이즈를 방문한다. 그곳에서 루이즈의 친구인 소피와 잠자리를 한 후 집착을 보이는 그녀를 벗어나 거리를 쏘다닌다. 불량배들에게 폭행을 당해 큰 부상을 입고 루이즈에게 돌아온 조니는, 고향으로 함께 돌아가자 약속한다. 루이즈는 안심한 채 출근하고, 조니는 돈을 훔쳐 다시금 루이즈를 떠난다. 주인공이 도시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시작한 영화는 결국 그 도시를 떠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마이크 리 감독의 1993년 작 <네이키드>이다.
출처:<퍼슨웹>(http://www.personweb.com/) 2010. 10. 25
하나/ @latinsamba
남아 있는 자는 떠나는 자를 질투한다. 관계가 ‘융합과 분리’라는 양립할 수 없는 욕망의 각축장이고, 어쩔 수 없이 한 쪽 역할을 맡아야만 한다면 나는 항상 잘라내는 쪽이고 싶었다. 상대방을 영원히 끼고 살고 싶어 망치로 다리를 으깨버리는 애니(<미저리>(롭 라이너, 1991))의 절절함 따위는 눈치 채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백건대, <네이키드>는 떠나는 자의 서늘한 뒤통수 같은 영화여서 한참을 미워했었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단절의 징후를 쫓았던 적이, 또한 그 징후가 점차 확연한 증거가 되어갈수록 아둔하게도 오히려 상대에게 몸과 마음을 바싹 붙이려 했던 적이 있으리라. 약자에게 직관력은 관대하게 주어지고, 불시에 떠오른 슬픈 예감은 그 뜬금없음에도 불구하고 틀린 적이 없다.
<네이키드>는 한시도 쉬지 않고 단절의 낌새를 풍기는 사람과 그 낌새에 유달리 예민한 촉수를 가진 사람이 부딪치는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누군가를 밀어내려는 기미는 말과 몸을 통해 전달된다. 언어와 섹스라는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소통의 도구가 단절의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다.
말은 허약하고 몸은 조각나네
<네이키드>는 대사의 양이 엄청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기억나는 대사가 거의 없는 영화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식이다. 조니가 옛 애인을 몇 년 만에 만난 상황이다.
“어떻게 왔어?”
“원초적으로 아주 작은 점이 있는데, 그 점이 점점 커지고 폭발을 일으켜서 에너지가 물질로 형성되지. 물질이 식고 아메바가 생겨서 물고기가 되고 새가 되고, 새는 개구리, 개구리는 포유류, 포유류는 원숭이, 원숭이가 인간이 된 거야. 치즈의 작은 조각을 최후 심판의 날에 그릴 아래 넣는 거지.”
“하나도 안 변했군.”
여기서 언어는 소통을 위한 매개가 아니다. 차라리 상대를 밀어내고 관계에 틈을 내기 위해 사용된다. 조니가 시종일관 쏟아내는 독설, 조롱, 비판을 듣다 보면, 단어들이 모여 말 뭉텅이가 되는 것 같다. 마치 만화 주인공들 사이에 낀, 그리하여 그들을 분리시키는 둥근 말풍선처럼 조니가 말을 하면 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은 점점 벌어질 뿐이다.
이 재회 장면에서 단어들이 지시하고 있는 내용과 대화가 요청되는 맥락은 철저하게 서로를 배반한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에서는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언제, 어떤 식으로, 왜’ 그 말을 하느냐가 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를 들어, 한가로이 가십을 나누며 잡담이나 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비트겐슈타인 이야기를 꺼내는 화상이 있다면, 예민해지지 말고 조금 요란한 방식으로 관심을 구한다 여기어 치킨 다리 하나 입에 물려주면 될 일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사람들은 언어가 지시하는 메시지보다 언어가 발현되는 맥락의 메시지를 더 잘 포착한다. 선명하게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은 대개 맥락에서 비롯된다. 조니의 말 뭉텅이가 불러일으키는 느낌은 호불호에 따라 개인을 밀어내는 수준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 전 인류를 거부하는 자가 지닌 혐오감과 관계에 대한 깊은 무력감이었다.
조니의 폭력적인 섹스 역시 그가 쏟아 붓는 언어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 이 영화는 강간 장면에서 시작할 뿐 아니라 대부분의 성행위 묘사가 상당히 불편한 편이다. 가장 가슴을 서늘하게 했던 것은, 섹스의 폭력적인 방식도 방식이지만 몸을 섞을수록 두 사람이 하나가 되기는커녕 개인의 신체마저도 분절된다는 점이었다.
강간을 일삼는 집주인 세바스찬은 여성을 ‘가슴’, ‘생식기’, ‘망사 스타킹을 신은 다리’, ‘긴 머리카락’으로 대하는데, 이는 여성의 무릎이나 가슴 모양의 베개, 딜도와 모조 여성생식기들, 섹스돌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그가 헬스를 맹렬히 하는 여피족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헬스는 유기적인 신체를 각 부위로 쪼개어 제각기 발달시키는 운동이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굵은 팔뚝이나 탄탄하게 올라가 붙은 엉덩이, 쫄깃한 치골근과 같은 부분에 도취되어 있을 것이며, 이는 특정한 사물이나 부분을 통해 성적 쾌감을 얻는 페티쉬와 연결된다.
또한 이들의 섹스에는 오로지 기계적인 삽입만 있을 뿐 쓰다듬이 없다. 조니에게 제발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고 만져달라고 조르던 늙은 여자는 막상 그가 가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아무것도 기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fucking bite me”라고 말한다. 그들의 섹스는 물기나 온기 한 점 없이 퍼석거린다.
미셸 우엘벡은 소설 <플랫폼>에서 이러한 정경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 발레리는 SM 파티에서 장갑을 낀 여자가 중년 남자의 젖꼭지를 집게로 집고, 손톱을 뽑고, 엉덩이를 채찍질하는 등 각 신체 부위를 고문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아까 내가 무서웠던 건, 서로 간에 신체적인 접촉이 아예 없었다는 점이야. 모두가 장갑을 끼고 도구를 사용하잖아. 결코 살과 살이 맞닿는 일도, 키스나 가벼운 스침, 애무도 없었어. 내가 보기에 그건 정확히 섹슈얼리티에 반하는 거라구.”
순진하게도 조니의 옛 애인은 친구에게 푸념하듯 묻는다. 섹스 뒤에 말을 걸어주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그렇게나 어려운 거냐고. 애석하게도 몸과 말은 융합이 아니라 분리를 위해 사용된다. 수다와 섹스가 단절에 대한 두려움으로, 멀어지려는 시도를 입막음하기 위하여 쓰일 때, 나는 애처로움을 느낀다. 반면 단절이 목적일 때는 공포를 경험한다. 그것은 정말이지 정확히 섹슈얼리티에 반한다.
혼자 깨는 밤
<네이키드>에는 혼자 잠에서 깨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특히, 외로운 여자들은 마치 죽음 속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살아난 것처럼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깬다. 그녀들은 개망나니인 조니를 위해 문을 열어주고 가슴앓이를 하지만, 정작 그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는 그녀들의 절실함을 조롱한다.
정신이 반쯤 나간 늙은 여인이 멍한 표정으로 “제발, 해줄래?”라고 물으며 보석함에서 싸구려 목걸이를 꺼내 반라에 걸칠 때, 조니는 비아냥거리며 “안 되겠어요. 우리 엄마처럼 보여요”라고 말한다. 그때 그녀의 무너져 내리는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공포다. 진부해도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혼자다.
허나 이러한 실존적인 공포는 머무는 자에게도, 떠나는 자에게도 공평하다. 누가 옆에 오기만 해도 신경질을 부리며 내 공간을 달라고 소리치는 조니도 여자와 자고 난 뒤의 쓸쓸한 표정은 감추지 못한다.
가끔은 나도 외로움을 잊은 채 잠을 자다가, 문득 살갗에 닿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자각에 소스라치게 놀라 침대에서 튕겨져 나오곤 한다. 그리고 찬 새벽에 침대에 걸터앉아 바라 본, 옆에 누운 이의 얼굴이 지나치게 낯설어 놀라기도 한다. 그러니까 <네이키드>가 보여준 정서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애석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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