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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에 대한 새로운 해석 논란

by 내오랜꿈 2007.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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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한국 분석철학계의 새 화두
강진호 교수(철학과) 『논리-철학 논고』 에 대한 새로운 해석 제시
 
출처:대학신문 2007년 03월 04일 (일) 02:54:39윤수진 기자  youn23@snu.ac.kr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1889~1951)은 논리적 엄밀성을 강조하는 20세기 분석철학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단 두 권의 철학서로 언어분석철학에 큰 획을 그었다.

최근 십여년간 미국 분석철학계에서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논고』)를 두고 ‘전통적 해석(Traditional Reading)’과 ‘단호한 해석(Resolute Reading)’ 사이에 첨예한 논쟁이 벌어졌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마지막 부분에서 ‘『논고』의 명제들이 결국은 무의미(unsinning)하다’는 선언을 하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를 두고 입장이 갈렸다. ‘전통적 해석’은 그 선언을 아예 무시해야 한다고 제안하거나 또는 『논고』의 명제들이 무의미하긴 하지만 여전히 ‘어떤 방식으로’ 세계, 언어, 논리 등에 대한 그의 이론을 전달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미국 철학자 코라 다이아몬드(Cora Diamond)는 이러한 해석을 강하게 비판하며 “『논고』의 명제들은 글자 그대로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우리가 이 점을 단호하게 받아들일 때만 ‘철학이 이론이 아니라 활동’이며 ‘철학의 결과는 철학적 명제들이 아니라 명제들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반(反)이론적 철학관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논고』의 명제들이 정말 무의미하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왜 이 책을 썼을까? 그녀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의 궁극적 목적은 독자들이 그 명제들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데 있다. 또 이를 통해 그들은 세계와 인간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는 열망이 실은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절대적 지식을 찾으려고 하는, 고귀하지만 충족될 수 없는 열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단호한 해석’이라 부른다. 이 해석의 문제점은 비트겐슈타인이 후기 저작 『철학적 탐구』에서 『논고』가 ‘중대한 오류들’을 범했다고 인정한 데 있다. 단호한 해석이 주장하듯 『논고』의 명제들이 진정 무의미하다면 무엇이 ‘중대한 오류들’이 될 수 있을까.


지난달 22일(목) 한국분석철학회 학술대회에서 강진호 교수(철학과)는 이러한 논쟁을 해결하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이는 강 교수가 하버드대에서 쓴 박사학위 논문의 일부로 학술대회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이승종 교수(연세대ㆍ철학과)는 “강 교수의 발표는 비트겐슈타인 철학 해석 논쟁에 불을 당긴 것”이라고 평가했다. 『대학신문』은 강진호 교수의 논문 요약본과 이에 대한 박정일 교수의 논평을 함께 싣는 자리를 마련했다.


『논고』에 대한 기존 해석의 오류들
강진호 교수(철학과) 논문 요약
 
출처:대학신문 2007년 03월 04일 (일) 02:56:16대학신문  snupress@snu.ac.kr
 

나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논고』) 이전 초고들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박사학위 논문의 결론 부분을 발전시킨 본 논문 「『논리-철학 논고』의 ‘중대한 오류들’」은 이 연구를 통해 밝혀낸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독특한 논리 개념을 설명하고 이를 토대로 『논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본 논문에서,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발전시킨 논리 개념은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프레게(Frege)나 러셀(Russell)의 논리 개념과 매우 다를 뿐 아니라 오늘날의 이른바 모형-이론적(model-theoretic) 논리 개념과도 매우 다르다고 논변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논리는 문장과 사태의 논리적 형식들을 다루며, 논리적 형식들은 언어와 세계의 필연적이고 본질적인 구조를 이룬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논리적 형식들이 언어와 세계의 필연적이고 본질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형식들은 언어를 통해 묘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논리적 형식들로부터 파생된 이른바 ‘논리상항(logical constant)’들은 언어로 표시될 수 없다. 우리 일상 언어에서 논리상항들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들은 모두 사이비 표현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이비 표현들로 ‘그리고’나 ‘또는’과 같은 진리함수적 문장 연결사들, ‘모든’과 ‘어떤’과 같은 양화사들, ‘대상’이나 ‘사태’와 같은 존재론적 범주들을 나타내는 표현들이 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 표현들이 『논고』에서 자신이 제시한 논리적 표기법에서 모두 제거될 수 있음을 보인다. 


논리상항 표현들이 사이비 표현들이므로, 이들 표현들을 사용한 명제들 또한 모두 사이비 명제들이다. 아울러 지면 제약상 그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개념에 따르면 철학적 용어들 또한 논리상항 표현들과 마찬가지로 사이비 표현들이다. 이제 『논고』의 명제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들이 논리상항 표현들과 철학적 용어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논고』의 명제들은 모두 무의미한 사이비 명제들이다. 

『논고』의 궁극적인 핵심은 이 사이비 명제들이 아니라, 이 명제들에 나타난 논리상항 표현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논고』의 논리적 표기법이다. 철학적 용어들과 관련해서는 비록 이 표기법이 이들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지만, 이들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은 보여준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은 이론을 제시하는 학문이 아니라 『논고』식의 논리적 표기법을 사용하여 철학적 명제들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이 명제들의 무의미함을 보여주는 활동이다. 


전기 비트겐슈타인과 『논고』가 이런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이제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말하고 있는 『논고』의 “중대한 오류들”이란 무엇인가? 나는 본 논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논고』의 “중대한 오류들”의 핵심이, 『논고』 명제들이 무의미하다는 바로 그 아이디어라고 제안한다. 그렇다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명제들을 무의미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논고』 명제들이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확정적인 답변은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논고』의 진술들이 구체적인 맥락 하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달려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이제 의미에 대한 총체적 맥락주의(global contextualism)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철학적 용어들과 명제들을 포함한 어떠한 언어적 표현들도 어떤 맥락 하에서는 의미가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맥락에서 무의미한 그런 언어적 표현은 없다. 

(이렇듯-인용자) 의미에 대한 총체적 맥락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상항 표현들이 절대적으로 무의미한 사이비 표현이며 따라서 이 표현들을 논리적 표기법에서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철학적 문제들이 언어의 오용에 의한 환상임을 보여주려고 했던 전기 시절의 견해를 버리게 된다.


이러한 나의 해석이 옳다면, 『논고』에 대한 전통적 해석과 ‘단호한 해석’은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전통적 해석은 『논고』의 명제들이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진정으로 무의미한 명제들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단호한 해석’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의미의 맥락 의존성에 대한 성찰로 인해 전기 시절의 자신의 무의미 개념을 수정했다는 점을, 따라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논고』의 명제들이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나는 논문에서 나의 이러한 『논고』 해석이 전통적 해석과 ‘단호한 해석’의 단점들을 모두 제거하고 장점들을 모두 살리고 있음을 논변하고 있다. 아울러 나의 『논고』 해석이 또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논변하고 있다.



논평-박정일 교수(숙명여대 의사소통센터)
엉성한 그물로는 대작 잡을 수 없어
 
출처:대학신문 2007년 03월 04일 (일) 02:58:01대학신문  snupress@snu.ac.kr
 

강진호 교수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조명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려고 한다. 그는 논리적으로 일목요연한 표기법에서는 논리상항, 논리 법칙, 대상, 참과 거짓, 함수, 철학적 용어 등이 모두 제거될 수 있기 때문에 모두 ‘사이비 표현’이고 그리하여 『논리-철학 논고』(『논고』)에서 논리나 철학의 본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진술들은 ‘진정으로 무의미한 진술들’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강 교수는 단호한 해석을 따르고 있다. 

반면에 그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보면 『논고』의 명제들이 무의미한가 하는 물음은 잘못 제기된 것이고, 맥락 또는 언어놀이에 따라 달리 대답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전통적 해석을 수용한다. 그렇게 해서 양자의 진정한 종합이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논고』 마지막 부분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의미’ 개념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뜻이 있는(sinnvoll)’, ‘뜻을 결여하는(sinnlos)’, ‘무의미한(unsinnig)’을 구분하였다. 뜻이 있는 명제는 자연과학의 명제이고, 뜻을 결여하는 명제는 동어반복과 모순이며, 무의미한 명제에는 예컨대 윤리학과 미학의 명제가 있다. 따라서 마지막 부분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의미’와 관련하여 『논고』라는 텍스트를 정확하게 해석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의미(Bedeutung), 뜻(Sinn), 기호, 상징, 함수, 조작(연산), 명제, 요소명제, 사실, 사태, 그림이론, 진리함수이론 등에 대한 치밀하고 분명한 논의가 제기되고, 그 다음에 ‘뜻이 없는’과 ‘무의미한’에 대한 논의가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강 교수는 정작 필요한 논의는 뒷전으로 밀고 다른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요컨대 그는 ‘무의미한’을 두 가지 방식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나는 ‘논리적으로 일목요연한 표기법에서 제거 가능한’것이 무의미한 것이라는 암묵적인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논고』에서 필연적으로 참인 것으로 의도된 것’이 무의미한 것이라는 명시적인 (하지만 괴상한) 제안이다. 


논평자가 보기에 강 교수의 이러한 두 가지 파악방식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떤 충분한 근거도 없고 오히려 중대한 오류들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논리적으로 일목요연한 표기법에서 ‘참’과 ‘거짓’이 제거될 수 있다는 주장은 명백한 오류이고, ‘논리의 적용’을 언급할 때에는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왜곡하고 있다. 또한 강 교수는 자신의 해석이 전통적 해석과 단호한 해석 양자를 진정으로 종합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막상 전통적 해석을 다룰 때면 명백하게 논점을 일탈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논평자는 강 교수의 주장에 전혀 공감할 수 없다. 논평자가 보기에는 이 논문에서 새롭게 주장된 것들은 대부분 근거가 취약하거나 ‘중대한 오류들’을 범하는 것이며, 오류를 범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대부분 한국분석철학계에서 이미 논의가 된 것으로서 새로울 것이 거의 없다. 

『논고』의 ‘무의미’를 ‘논리적으로 일목요연한 표기법에서의 제거가능성’으로서 규정하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이고, ‘무의미’를 ‘필연적으로 참인 것’으로 파악하자는 제안은 억측에 불과하다. 『논고』의 ‘중대한 오류’가 ‘논고의 명제들이 결국은 무의미(unsinning)하다’는 언명이라는 지적은 『논고』라는 텍스트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토대로 ‘무의미’의 개념이 규정되지 않는 한, 피상적이고 지엽적이다.



『논고』 해석의 근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박정일 교수의 논평에 답한다
1699호 『대학신문』에 실린 『논리-철학 논고』 해석 논란에 이어

출처:2007년 03월 10일 (토) 23:12:12

강진호 교수 (철학과)  



나의 분석철학회 학술대회 발표 논문 「『논리-철학 논고』의 ‘중대한 오류들’」에 대해 『대학신문』에 실린 박정일 교수의 논평을 읽어보았다. 박 교수가 자신의 짧은 논평에서  아무런 이유나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엉성한’, ‘괴상한’, ‘왜곡’, ‘억측’, ‘명백한 오류’, ‘피상적’ 등과 같은 단어들을 남발하고 있어 유감이다. 이 글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겠다.

『논고』 명제들이 무의미하다고 선언하는『논고』 6.54의 당혹스러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논고』 해석의 근본 문제다. 첫째, 이 문제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논고』의 모든 명제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진다. 둘째, 이 문제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논리의 본성과 철학의 본성에 대한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진다. 셋째, 이 문제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전기 비트겐슈타인과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차이점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달라진다. 

나는 내 논문에서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상항’ 개념과 ‘논리적 표기법’ 개념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을 제시하고, 이를 근거로 『논고』 해석의 근본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말대로 『논고』는 진정으로 무의미한 명제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총체적 맥락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논고』 명제들의 무의미성에 대한 질문은 그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논고』 해석의 근본 문제에 대해 박 교수는 과연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대학신문』에 실린 박 교수의 논평만 보아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저 『논고』라는 텍스트를 ‘치밀하고’ ‘정확하게’ 해석해야만 올바른 답이 나올 것이라는 하나 마나 한 주장만 하고 있을 뿐이다. 박 교수는 『논고』에 대한 ‘전통적 해석’에 공감하고 있는데, 『논고』 해석의 근본 문제에 대해 ‘전통적 해석’에서는 지금까지 크게 다음과 같은 두 종류의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1) 『논고』 명제가 무의미하다는 6.54의 비트겐슈타인의 선언이 명백한 모순을 야기하므로, 이 선언은 무시되어야 한다. 
(2) 『논고』 명제들은 6.54의 선언대로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한다.

그러나 (1)과 (2) 어느 쪽도 『논고』 해석의 근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먼저 (1)을 주장한다는 것은, 6.54를 무시하지 않으면 『논고』 텍스트에 명백한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누구나 뻔히 알 수 있는 이런 초보적인 모순이 『논고』에 존재하다는 제안은 학술적으로 가치가 없다. 다음으로 (2)를 주장한다는 것은, 『논고』의 무의미한 명제들이 그 무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도대체 무의미한 명제들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며, 설령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렇다면 도대체 무의미한 명제들과 일반 명제들 간에는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더구나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무의미한 명제들이 또한 ‘말해질 수 없는’ 명제들이라고 하고 있으며, 『논고』 7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는 또 하나의 유명한 선언을 하는데, (2)의 제안이 함축하는 것처럼 무의미한 명제들이 여전히 어떤 식으로든(구체적으로 어떤 식이 될지 나는 전혀 모르겠지만) ‘말해질 수’ 있다면 이것이 도대체 『논고』 7의 선언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겠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박 교수는 『대학신문』에 게재된 논평에는 빠졌지만 학술대회에서 읽은 논평에서 “『논고』 명제들이 『논고』 고유의 의미에서 무의미하긴 하지만 일상적 의미에서 무의미한 명제들은 아니다”라는 요지의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 역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박 교수의 제안대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무의미’가 단지 ‘『논고』 고유의 의미에서 무의미’인 것에 불과하다면,  “『논고』 명제들이 무의미하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선언은 철학적으로 놀랍고 중요한 선언이기는커녕 일종의 사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용어의 의미를 바꿔 써버리면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령 어떤 사람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지구는 수많은 위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겉보기에 놀랍고 중요한 천문학적 주장을 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 사람은 사실 ‘위성’이라는 용어를 인공위성들까지 가리키는 ‘자기 고유의’ 의미로 사용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의 주장에서 놀랍거나 중요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놀랍고 중요하기는커녕, 그의 주장은 일종의 사기가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나의 『논고』 해석과 관련하여 『대학신문』에 실린 박 교수의 논평에서 아무런 이유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냥 나열만 해놓은 이른바 ‘문제점’들, 가령 『논고』에서 필연적 참으로 의도된 명제들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나의 제안이 억측이라거나, 나의 주장과 달리 ‘참’과 ‘거짓’은 『논고』의 논리적 표기법에서 결코 제거될 수 없다거나, 내가 ‘논리의 적용’을 언급할 때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왜곡하고 있다거나, 전통적 해석을 다룰 때 내가 논점을 일탈하고 있다거나 등등은, 이미 학술대회에서 배포한 나의 답변문을 통해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한 바 있다. 만약 이 문제들에 대해 아직도 논의할 게 남았다고 믿는다면, 『대학신문』이나 더욱 바람직하게는 철학 관련 학술지들을 통해 왜 그러한지 제대로 이유를 들어 문제를 제기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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