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도 비워내는 ‘끝장 사유’
[고전다시읽기] 용수(나가르주나)의 <중론>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사회학
출처 : <한겨레> 2007년 01월 25일
[한겨레] 고전 다시읽기 / 용수(나가르주나)의 <중론>
어려운 책이다. 서평 때문에 읽으면서 두통이 생겨버렸다. 예전에 여러 번 읽은 것인데도. 책이 어려운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이 책이 어려운 것은 철학책에서 흔히 보게 되는 난해한 스타일 때문도 아니고, 쫓아가기 힘들 정도로 많은 지식이 동원되어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 책이 통념에 반할 뿐 아니라 통념 전체와 대결하며 그것을 극한적인 방식으로 깨부수고 있기 때문이다. 간결하고 명료하지만, 우리 사고의 어떤 것도 그냥 두지 않는다. 그래서 어렵다기보다는 차라리 당혹스럽다고 해야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불교철학의 ‘중도적 사유’를 다루기에 ‘중관(中觀)’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극도의 ‘극한적 사유’다. 중도의 사유란 양쪽을 모두 고려하는 ‘세련된’ 중간적 사유가 아니라 차라리 ‘끝을 보는’ 극한의 사유임을 보여주는 셈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이미 지나간 것에는 출발이 있을 수 없다. 이미 지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지나가지 않은 것에도 출발은 없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니 어디 출발이 있을 것인가? 지나가고 있는 것에도 출발은 없다. 그 역시 이미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것도 출발은 없다. 출발하지 않은 것이 지나갈 순 없는 일이다. 따라서 어떤 것도 지나가지 않는다.” 아마도 이는 제논의 역설을 아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운동을 하나의 점으로 환원하려는 태도, 변화를 하나의 ‘원자적’ 사실로 환원하려는 태도에 함축된 역설이란 점에서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론>에서 역설은 이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이 책에 따르면 가령 인과(원인과 결과)라는 개념 자체도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면 원인은 원인이 아니고, 결과가 원인과 같다면 결과는 결과가 아니라 원인 그자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있음과 없음은 물론이고 생성과 괴멸, 시간, 감각, 행동과 주체 등을 ‘해체’해버린다. 여기서 해체한다는 말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줌을 뜻한다. 그걸로도 모자라 있지도 않으며 없지도 않은 상태, 있으며 동시에 없는 상태 모두에도 해당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해체함으로써 그 모든 것의 본성이 ‘공(空)’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공(空)’은 있음(有)에 반대되는 개념인 없음(無)과 다르다. 그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다. 이를 불교에서 흔히 유/무의 양 극단을 떠났다는 의미에서 ‘중도(中道)’라고 부른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척간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라
여기서 용수가 사용하는 ‘해체’의 방법은 일종의 내재적 비판의 방법이다. 상대방의 주장이나 가정을 옳다고 가정한 뒤, 그 가정에 따라 추론해서 원래의 주장을 반박하는 결론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수학에서 사용하는 ‘귀류법’과 비슷하다고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학의 귀류법이 옳다고 가정한 것(가령 ‘…는 유리수라고 하자’)이 모순된 결론에 도달함을 보여주어 쉽사리 그 반대의 가정(‘…는 유리수가 아니다’)을 취하지만, 용수는 그 반대의 가정도 취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아주 다르다. 이다/아니다, 있다/없다 어느 것도 취할 수 없는 난감한 상태로 몰고 가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가정된 공리만으로는 참/거짓을 결정할 수 없는 명제가 어디나 존재함을 증명한 괴델의 정리와 차라리 더 가까운 것 같다). 수학적 귀류법이 확실한 것을 보여주는 방법이라면, 용수의 방법은 확실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린다.
어쩌면 ‘해체주의’에서 사용하는 해체의 방법과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에게서 연유하며 데리다에 의해 ‘방법’으로 체계화된 ‘해체’는 간단하게 말하면 어떤 체계 내부에 존재하는 균열과 틈새를 드러내고 거기서 이율배반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해체주의는 그 이율배반을 통해 사유되지 않은 것을 끄집어내고 사유하고자 한다. 가령 선물이 선물임을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선물이 아니게 된다. 더구나 선물에 답례가 의무라면 더 그렇다. 이 경우 선물은 교환의 일종이 되게 되는데, 이는 선물의 대립물인 교환이 거꾸로 선물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선물과 교환의 경계는 해체된다. 선물이란 선물이라고 할 수도 없고 선물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해체주의자들이 사용한 해체의 방법은 어떤 체계를 파괴하는 방법이라기보다는 그 균열을 야기하는 지점을 통해서 한층 깊은 기원을, 하지만 결코 현전(現前)하지 않는 기원을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재구성하는 방법이다.
사실 읽기에 따라선 용수가 이 과격한 해체를 통해서 모든 것의 근저에 있는, 그러나 결코 그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공’이라는 ‘기원’을 찾아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보는 경우에도 이 책은 해체주의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전면적이며 과격한 선구자라고 해야 한다. 여기서 용수는 심지어 속박과 해탈도, ‘무아(無我)’나 ‘여래(如來)’마저도 ‘공’하다고 주장한다. 이 점은 확실히 이 책을 유니크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남들의 주장을 비판하여 자신의 타당함을 주장하는 것이야 어디서나 발견되는 것 아닌가!(해체주의자들도 ‘해체’의 개념은 해체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불교사상가가 불교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조차 ‘공’하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집(我執)의 근본이 자기 생각이나 신념은 옳고 다른 이의 그것은 틀리다는 가정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자기 생각마저 공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무아’ 사상의 요체라고 할 것이다. 용수의 극단적인 과격함은 사실 ‘무아’를 통해 자기와 다른 것과 상생하는 법을 가르치려던 불교 자체에 속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모든 분별의 전제를 내려놓고 아무 의지할 것 없이 백척간두에 서도록 몰아놓고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라고 밀어대는 선(禪)의 과격함과 마찬가지로.
용수는 그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해체하면서 수립한 ‘공’이란 개념조차 다시 해체해버린다. ‘공’조차 하나의 실체로 생각한다면 그것처럼 구제불능의 오류는 없다고 하며, 그래서 ‘공’마저 ‘공’하다고 선언한다. ‘공공(空空)’. 그런데 거꾸로 거기서 그가 ‘공성(空性)’을 통해 하려고 하던 바가 거꾸로 드러난다. 어떤 것도 실체화해선 안 된다는 것, 어떤 것에도 정해진 본성은 없으며 연기적(緣起的)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이는 ‘공’이란 개념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실체적인 것, 불변의 본성을 갖는 것이 사라짐으로써 모든 것은 가변성 속에 들어가게 된다. 변화를 만드는 행동이나 사유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바로 그때다.
실체화된 것 깨부수는 변혁 의지
불교 교의의 요체인 사성제의 ‘공성’이 뜻하는 바도 이런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아마도 당시에 있었을) 흔한 비난처럼 그 가르침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공은 무가 아니다!). 여기선 사성제의 첫 번째 가르침인 ‘고(苦)’의 공성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이 정해진 본성을 갖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고통은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고통의 원인인 ‘집착(集)’ 역시 불변의 본성을 갖는 실체라면, 집착의 소멸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통의 소멸(滅)도, 그것을 소멸하기 위한 수행(道)도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할 것이다. 고통의 공성을 보는 것은 존재하는 고통의 원인이 조건적인 것임을 보는 것이고 그 조건을 벗어나면 소멸하고 사라질 것임을 보는 것이다. 공의 사유가 철저하게 해체적이면서도 결코 부정적이지 않은 것은 정확하게 이런 실천적인 이유에서다.
모든 실체화된 것은 깨부수고 변화 내지 변혁의 의지 속에서 동일성이나 불변성을 근본에서 전복하려는 사유라는 점에서 이 책은 너무도 현대적이다. 심지어 차이마저도 실체화되면 차이를, 결합과 변화를 사유할 수 없게 되리라고 경고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시간보다 차라리 한 걸음 앞서 있다고 해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접근의 장벽이 되는 최초의 어려움은 넘어설 만한 가치가 있음이 틀림없다.
서평자 추천도서
중론 김성철 옮김, 경서원 펴냄(<중론>을 한역본과 산스트리트어본을 대조하여 번역했고, 청목의 주석을 덧붙여놓았다.)
회쟁론 김성철 옮김, 경서원 펴냄(<중론>의 주장에 대한 비판을 다시 반박한 책. 특히 공성의 공성을 자기주장을 부정하는 역설로 이해하는 비판을 비판한다.)
용수의 공사상 연구 프레드릭 스트랭 지음, 시공사 펴냄(용수의 공사상을 불교철학적 맥락에서 이해하는데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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