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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지우고 ‘인간’을 돋을새김하다 [고전다시읽기] 헤로도투스 <역사> 김기봉 / 경기대 교수 사학 출처 : <한겨레> 2005년 05월 19일 헤로도투스 <역사>
역사의 탄생은 이런 ‘신화의 인간화’를 통해 이뤄졌다. 역사의 주인공은 신이 아닌 인간이고, 이야기의 형식은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다. 서구에서 역사라는 이야기 장르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25)다. 그는 왜 역사라는 장르를 만들었을까. 서양에서 역사의 어원이 ‘탐구’를 뜻하는 ‘historia’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헤로도토스는 인간의 일에 대한 자신의 탐구를 산문으로 기록한 책 제목을 ‘historiai’로 붙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인간의 일에 대한 산문적인 탐구 서술로서 ‘역사’가 탄생했다. 하지만 헤로도토스가 과연 ‘역사의 아버지’인가에 대해서는, 투키디데스라는 또 다른 그리스의 위대한 역사가와의 비교를 통해서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특히 근대 실증사학의 등장과 함께 이야기체 역사보다는 과학적 역사가 강조되면서 헤로도토스의 권위는 크게 실추됐다. 역설적인 사실은 헤로도토스에게 ‘역사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부여한 기원전 1세기 키케로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거짓말쟁이 헤로도토스’라는 오명의 단초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역사에서는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잣대가 진실이지만, 시의 경우는 시가 줄 수 있는 즐거움이다. 그런데 역사의 아버지인 헤로도토스의 저서에도 믿지 못할 이야기가 많다.” 근대 역사학이 ‘역사의 아버지’로서 헤로도토스를 부정하는 경향성을 가졌다면, 역사의 과학성을 부정하고 문학적 전통을 복원하고자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와 함께 헤로도토스는 명예회복 됐다. 폴 벤느는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새물결·2004)에서 역사는 대개 두 원형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썼다. 첫 번째가 “이 행위는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라면, 두 번째는 “인간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 첫 문장에서 기억을 위해 역사를 쓴다고 했다. 하지만 폴 벤느는 헤로도토스 <역사>의 위대함은 첫 번째보다는 오히려 두 번째 원형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헤로도토스는 여행을 통해, 이집트에서 여자들은 서서 오줌을 누지만 남자들은 쭈그려 앉아 오줌을 누는 것처럼, 특정한 시공간에서 “민족들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것을 역사로 기록했다. 인간사에 대한 탐구 처음으로 산문적 서술 구술바탕 현지조사 그리스 · 아시아 문화사 문학적 전통 복원 흐름속 ‘서양사 아버지’로 명예회복
그는 당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동서양 문명의 충돌로 파악했다. 페르시아인은 일인의 군주에 예속된 노예지만 그리스인은 오직 법에만 종속하는 자유인이기 때문에, 일인의 자유를 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그리스가 승리한 것은 당연한 귀결인 것처럼 썼다. 이렇게 동양과 서양을 전제와 자유, 야만인과 문명인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은 최근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로 이어지는 ‘오리엔탈리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헤로도토스가 그리스 우월주의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동서 문화를 비교했다고는 볼 수 없다. 문화는 분명 민족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그 차이가 반드시 우열의 위계질서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는 개별적 차이들을 일반화하지 않고 그 차이들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밝히는 데 관심을 집중시킨다. <역사의 종말>을 썼던 프랜시스 후쿠야먀 말대로, 인류는 자유 민주주의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열차에 탑승한 승객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일반화로 각 기차에 탑승한 승객들의 삶의 의미가 말해질 수는 없다. 역사가는 각각의 기차에 탑승한 사람들의 집단 기억과 경험을 탐구 조사해서 이야기하며, 이런 이야기를 처음으로 했던 ‘역사의 아버지’가 바로 헤로도토스다. 헤로도토스는 여행을 통해 현지에서 들은 얘기거나 수집한 자료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정확성과 객관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들은 얘기의 대부분이 구비전설이거나 풍문 또는 전승이기 때문에 정보의 진위를 파악할 수 없으며, 입수한 문헌자료도 사건의 전모를 알려주지 못하는 부분적인 진실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2권에서는 “이 책을 통해 내가 취하고 있는 원칙은 각각의 사람이 말하는 바를 들은 그대로 서술하는 것”이라고 했던 반면, 제7권에서는 “내 의무는 전해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전적으로 믿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나름대로의 역사서술 원칙을 세우고자 했다. 이 원칙을 그는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에 대한 탐구에 적용했다. 그는 “페르시아의 학자들은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페니키아인에게 있다고 보고 있다”는 말로 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먼저 기존의 학설을 제시하면서 그것과 논증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이행하는 시기를 살았던 그가 입수할 수 있었던 사료는 대부분이 구술자료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여행을 통한 현지조사로 당시 최대의 세계사적 사건인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그 이전에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역사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던 최초의 역사가에게 문헌자료의 빈곤은 원초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그를 “역사의 아버지라기보다는 거짓말쟁이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며, 오히려 그는 오늘날 사회과학적 역사방법론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는 역사인류학의 원조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 교과서적인 공식 역사에 대항해 민중의 기억 속의 역사를 ‘고고학적으로’ 발굴하는 구술사가 재등장했다. 기억과 역사 사이의 투쟁은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이행하는 시기부터 있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문자문화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면서 구술사는 과학적 역사의 영역에서 추방됐다. “미디어는 메시지(message)”라고 했던 맥루한은 다른 한편으로 “미디어는 마사지(massage)”라고 말했다. 문자로 씌어진 사료와 역사는 과거의 진실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그 진실을 변형시켜서 기존의 권력담론의 재생산에 기여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날 구술사가들이 주장하듯이, 구술역사는 문자역사의 권력담론을 해체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구술사에 대한 이런 재평가와 더불어 우리는 서양 역사 아버지로서의 헤로도토스의 사학사적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자고로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어디서 와서,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삶의 오리엔테이션을 기대했다.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쓴 이유도 과거 위대한 인간들의 업적을 잊지 않도록 기록으로 남겨서 후세인들에게 삶의 오리엔테이션을 주기 위해서였다. 자기 시대를 위기로 인식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역사에 더 높은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전문화된 역사학이 전문가들끼리만 소통하는 역사를 생산하고 대중을 소외시킴으로써, 대중은 역사에 대한 욕구와 열망을 텔레비전 사극으로 충족한다. 따라서 오늘날 대중이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역사가는 운명처럼 주어진 자기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성찰하게 해주는 헤로도토스와 같은 ‘생의 교사’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50자 서평 박광순(50·전문번역가) “동서 문명의 첫 충돌에서 제왕의 야심을 꺾어버린 시민 공동체의 힘을 발견하는 일과 여러 민족의 풍습을 읽는 각별한 재미” 김영수(41·디자이너) “역사란 시대의 증인이며 진리의 빛이요, 기억의 되살림이라고 정의한 키케로의 말처럼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통해 시대의 증인으로 빛나고 있다.” 최온(26·고려대 사학과 석사과정) “당대 그리스의 청중들도 그러했을까? 그가 남기고자 한 동시대의 거창한 사건보다는 그가 늘어 놓는 소소한 일화들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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