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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by 내오랜꿈 2008.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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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출처 : <퍼슨웹(http://www.personweb.com)> 2000. 07. 01



이력사항


59년 파주 생.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 서울 충암여중, 명지여고 졸. 재수.78년 서울대 사범대 역사교육과 입학, <대학문화연구회>에서 활동. 

79년 <한얼야학>에서 야학 활동 시작.  하반기에 박정희가 죽고, 유신체제가 붕괴하자 학생운동이 전환기를 맞음.

80년 봄 학교로 돌아옴.80년 말부터 구로공단에 취업해서 활동.

83년 교황 방한. 일시적유화국면. <대우어패럴> 노조 결성에 참여.

83년 11월 해고.

84년 잠시 학교로 돌아와 교생 실습을 하고 졸업논문을 씀.

85년 6월 24일 구로동맹파업.  이후 국가보안법, 집시법 위반 등 11가지 혐의를 현상금 500만원의 지명수배자가 됨. 85년 8월 <서노련> 결성에 참여.

86년 <서노련> 사건 발생. 33명 구속.

87년 7, 8년 노동자 대투쟁 발발.

88년 <전노운협> 결성 과정에 참여 

88년말 <임금인상 전국 투쟁본부>에 결합하여 대중조직의 투쟁 실무자로 일하게 됨.

90년 전노협 결성. 투쟁국장과 조직국장으로 일함.

92년 결혼

93년 출산

95년 11월 민주노총 결성 

96년 1월 금속연맹 출범. 이후 금속연맹 사무국에서 지금까지 일함.

현재 민주노총 금속연맹 사무차장, 민주노동당 당대의원회 부의장


 


1. 이력과 기억들 1979~2000


심상정 민주노총 금속연맹 사무차장을 인터뷰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개인적인 기억 때문이다. 나는 1989년 11월에 열렸던 노동자대회에 대학생으로서 참가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노동자들을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대회장에 진입시키기 위해 학생 안내조가 꾸려졌다. 안내조 회의가 있었는데 전노협 투쟁 책임자가 나와서 학생들을 조를 편성하고 임무를 전달했다. 그 책임자는 한 아줌마(사실 그 때는 노처녀였다)였다.


회의가 끝나고 몇몇 학생들과 그 투쟁 책임자라는 노처녀가 이런저런 이야길하며 환담했다. 후배 학생들이 귀여웠는지 투쟁 책임자는 자기가 살아온 내력을 들려주며 격려했다. 들은 즉, 이 아줌마 전노협 쟁의국장은 서울대 사범대 78학번으로 선생님이 될 꿈을 키우다가 "이렇게 살아선 안되겠다"는 생각을 어느 날 하게 되었고, 그래서 노동운동의 현장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전노협의 쟁의국장이 유순한 인상의 노처녀라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보다도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는 이 사람의 표정 속에 들어 있는 운동에 대한 "헌신"과 "열정"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심상정"이라는 여성 노동운동가의 이름은 스무 살 어린 내 가슴속에 남았다. 


그로부터 만 11년이 흘렀다. 90년대의 11년 동안에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현실 사회주의는 망했고, 마르크스와 레닌은 죽은 개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운동가들이 운동과 이념을 떠났다. 고시를 봐서 검사나 변호사가 되고, 부르주아 정당에 입당하여 국회의원이 되고, 미국 유학을 가고, "살 길"을 찾아 대기업에 취직했다. 적어도 "학출" 운동가들의 대부분은 이념적으로 "전향"하거나, "세속"으로 투항했다.  


거대한 반대 방향의 "존재전이"의 물결 속에서도 그 여성운동가는 거기에 있었다. 가끔 신문 기사나 TV 집회 현장 화면에서 나는 심상정 씨를 보았다. 80년대의 마지막 해와 똑같은 자리에, 대중 노동운동 조직의 실무 책임자의 자리에 그대로 그녀는 머무르며 헌신하고 있었다. 전노협 시절에도,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이 만들어질 때에도, 또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질 때에도. 그래서 심상정이라는 이름은, 적어도 나에게는, 거의 다 퇴색해버린 저 위대한 80년대의 운동과 운동가들에 대한 기억 중에서 소금처럼 전혀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이름이었다.  


대학 2학년이던 79년 이래로 20년간 한 길을 지켜온 심상정에게 개인적 이력을 듣는 일은, 그 자체로 80년대 이래의 우리 운동사를 중요한 장면들을 회고하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한얼야학>과 학내 <여성문제연구회>에서 활동하며 본격적인 운동의 길로 들어선 그에게 두 가지가 문제였다고 한다. 하나는 노동자들의 존재나 삶 속에서 그들이 역사의 주체로 설 수 있다는 "가설"의 가능성을 확인해보고 싶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당시 학생운동의 구조 속에서 여학생들이 주변적이며 소극적인 역할만을 수행할 뿐이라는 데 대한 의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한 동료들과 함께 그는 구로공단으로 갔다. 1980년 하반기였다.



구로동맹파업


그리고 미싱사가 되어 <대우어패럴> 노조를 결성하고 저 위대한 "구로동맹파업"의 한 주역이 된다. 어린 여대생을 분노케 한 당시의 노동 현실은 어땠을까?


>>대우어패럴 같은 경우에는 여름에 수출용 겨울 오바코트 같은 걸 만들었어요. 서양인들 입는 옷이 순모에다 굉장히 크잖아요. 여름엔 그 모 먼지에다가 프레스 열에다 다리미 열에다 해서 현장 기온이 40 몇도 된다고요. 8시부터 일하기 시작해서 한 시간 반만 하면 가운이 완전히 물에 담근 것처럼 되죠. 오후 되면 발등이 퉁퉁 부어 오르고... 특히 안타까운 게 주로 다림질하고 프레스 하는 애들이 13,4살에서 16살 정도 되는 애들이죠. 낮에 일하고 밤에 산업체 특별학급 다니는...


먼지 때문에 선풍기도 안 틀어요. 그래서 한참 더운 날에는 왜 주스가루 있잖아요. 그걸 바께스에다가 얼음 넣어서 타서 갔다 놓았어요. 그러면 거기 달라붙어서 게걸스레 마시고 그랬죠. 그렇게 10시까지 일하고... 관리자들이 어린 여공들 엉덩이 툭툭 치고 쌍욕하고 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요. 그렇게 하루에 9, 10시간 일해서 미싱사 월급이 잔업, 특근 다 해서 9만원쯤 됐어요. 저는 미싱사 자격을 따서 공장에 들어갔었어요. 근데 그 때 닭장집 월세가 3만원이었다고요. 나이 어린 시다들은 6만원쯤 받았을 거예요. 3-4명이 닭장집에서 칼잠 자며 살고 집에 돈 부쳐주고 그랬죠. 뭐 노조는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지요. 


83년에 교황이 방한하며 전두환의 철권통치는 일시적 유화국면을 맞게 된다. 이 때 구로공단에는 <가리봉전자>, <대우 어패럴>노조와 이후 구로동맹파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효성물산 노조가 만들어진다. 그로써 구로동맹파업의 기반이 닦인다.


>> 80년말부터 존재이전 했던 학출 노동자들과, 구로 노동자들의 4년간 노력의 결실이 구로동맹파업이지요.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나기까지 구로공단 내의 다양한 사업장에 있는 노동자들을 기업별로가 아니라, 섬유, 전자... 여러 공장의 노동자들이 한 단위로 모여서 보다 체계적인 소그룹 활동을 하고, 학습도 통일적인 프로그램으로 하는 사업장 연대가 활동의 방향이었지요.


당시에는 "근로자를 가족처럼, 공장일을 내 일처럼"이라는 구호가 공장마다 다 붙어 있었지요.  굉장히 가부장적인 관계가 노동자들에게 강요되었는데, 이를 깨뜨리는 게 학습보다 더 큰 주안점이었고, 또 노조 이야기만 꺼내면 빨갱이 취급하는 분위기를 없애는 것도 중요했지요.


또 <공단소식>이라는 소식지를 만드는 선전작업도 활동의 한 축이었지요. 등사기로 일일이 밀어서 공장에도 반입을 하고, 거 닭장집이라고 있잖아요? 또 소그룹 멤버들이 살던 구로동, 가리봉동, 독산동 닭장집들을 퇴근한 후에 가가호호 집들이식으로 다니며 돌렸지요. 한 1만 5천부쯤 찍었던 적도 있는 거 같아요. 어쩌면 지금보다 더- 처음부터 노조들이 일상적 연대교류 활동을 더 열심히 했었어요. 그게 기반이 되어 구로동맹파업이 터져 나온 거지요.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에게서 터져나온 구로동맹파업은 22개 노조와 운동단체가 결합하며 6.25이래의 최초, 최대의 정치적 파업으로 기록된다. 그로써 구로동맹파업은 80년대 노동운동의 분기점이 된다. 심상정 씨의 말대로 80년 이래의 민주노조운동의 성과가 이 파업에서 전면적으로 표현되었을 뿐 아니라, 이 사건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급속한 질적 변화와 분화를 겪게 된다. <서노련> 등의 정치적 노동단체가 만들어지는 것도 이 때이다.



서노련


>>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과 지금 한나라당 의원인 김문수 씨 등과 같이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만들게 되죠. 김문수 씨는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이었는데, <전태일 기념사업회>가 구로동맹파업을 많이 지원했지요. <서노련>이 공개틀과 비공개틀을 동시에 갖고 있었는데, 공개 쪽은 김문수 씨 등이 맡고 비공개쪽은 제가 활동했었고요.


유명한(!) 김문수, 유시민, 백태웅, 박노해 등이 공개, 비공개 라인으로 망라되어 있던 서노련은 그러나 86년에 정부의 표적이 된다. 


>> 사건이 터졌는데, 회의 장소가 털렸지요. 그 당시 제가 심적인 고통을 많이 받았는데 저만 안 잡히고 다 잡혔거든요. 잠깐 대우자동차 사람들 만나러 간 사이에 아파트가 털려 가지고, 다시 오니까 경찰이 깔려있었어요. 그래서 잠실 아파트에서 올림픽대로 사이에 있는 철망을 넘어서 달리는 차를 세워서 도망했죠. 김문수 씨나 다른 사람들은 당시 송파보안대에 끌려가서 전기 고문, 물고문 굉장히 심하게 받았는데 나를 찾아내라는 것이 고문의 한 내용이었지요. 그래서 마음이 많이 괴로웠지요.


주요 멤버들이 구속된 후 비공개 <서노련>은 학생운동 출신의 어린 활동가들로 채워진다. 그러다 <서노련>은 내부 노선 논쟁에 휘말리며 해체된다. 구성원들의 면면에서 드러나듯 <서노련>은 아직 PD, CA, NL 등등 정파적 분화가 불명확하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다. 분화는 어쩌면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 <서노련>이 해체되면서 극단화된 게 맨 왼쪽에 있던 백태웅, 박노해 씨의 <사노맹>이고 또 한 쪽이 주사니 NL이니 하는... 요즘 잘 나가는 유시민 씨 쪽이었죠. 저는 양쪽으로부터 경험주의자라는 협공을 받았지요. 하하.


정파조직에 참여하지 않은 심상정은 전노운협을 거쳐 대중조직에서 일하게 된다. 전노협 쟁의국장, 조직국장, 금속연맹 사무차장으로 이어지는 경력이 이제 시작되는 것이다.



11가지 죄목


개인적 이력과 관련하여 빼놓기 어려운 것이 심상정의 특별한 법무부 쪽 경력이다.


구로동맹파업은 수많은 구속자와 해고자를 만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심상정도 현상금 500만원의 수배자 신세가 된다. 심상정이 갖고 있던 죄목은 무려 11가지라고 한다. 국가보안법, 집시법, 쟁의조정법, 3자 개입금지, 업무방해 등에다 화염병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쓴 집단방화에 폭력까지. 그러나 장기 수배의 기록을 갱신하며 잡히지 않는다. 


>> 수배생활은 83년도 말부터인데, 형식적으로 수배 상태가 93년도에 종료돼요. <신동아>에 당시 최장기 수배자로 소개가 되기도 했지요. 80년대에는 경찰에 안 잡혀가는 거도 중요했죠. '보안'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쓰고 미행 따돌리려고 약속 같은 거도 이중 삼중으로 하기도 했고요.


근데 웃기는 건 이 사회가 남성 중심사회라는 게 거기서도 드러나는데, 여자들은요, 화장만 조금만 하고 좀 다르게 꾸미면 얼굴을 못 알아봐요. 하하. 


87년 6월항쟁 이후에 소위 "시국사범"에 대한 대대적인 특사가 있었다. 심상정은 몇 년만에 집에 들어가게 된다. 8년만이었다. 그러다 결국 90년 1월에 잘 버티던 그는 남부경찰서 형사들에게 연행된다.


>> 당시 저는 전노협 쟁의국장이었는데 정작 전노협 창립 당일(90년 1월 20일)날에 남부경찰서에 있었어요. 안 잡혀 갔으면 몰랐을 텐데 저한테 걸린 11가지 죄목 중에 국보법과 집시법 부분만 사면이 된 거고, 쟁의조정법, 집단방화(화염병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3자 개입금지, 업무방해 등등은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이 놈들이 그냥 내버려두다가 전노협 창립대회를 어디서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저를 그 전날 밤에 잡아챈 거예요. 그 때도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구속되진 않았고요.


그 뒤로 검찰에 불구속 수사를 받게 되었는데, 심심하면 한 번씩 소환장을 보내는 거예요. 제가 투쟁 파트에 있으니까 무슨 중요한 행사나 집회 있는 전날 밤에 말이죠.


>> 그러다가 93년에 결국 재판을 받는데, 다른 죄목은 5년이 공소시효니까 무혐의 처리되고 집단폭력, 집단방화는 시효가 10년이래요. 93년 여름에 재판을 받았어요. 그런데 제가 그 때 아이를 배서 만삭이었거든요. 판사가 깜짝 놀라는 거예요. 죄목이 집단폭력, 집단방화지 제 이름도 좀 그렇지 하니까 남자라 생각하고 있다가, 배가 남산만한 젊은 여자가 피고라니까 황당했던 거죠. 하하하.


진술서에 제가 80년대 초반에 노동현실이 어땠는지 상세하게 썼어요. 그랬더니 오히려 이 판사가 굉장히 안타까워하면서 나는 당신을 집행유예도 때리지 않고 벌금으로 처리해줬으면 한다, 그런데 집단 방화, 집단 폭력에는 벌금형이 없다, 그러더라고요.


그 이후에도 심상정은 전노협, 업종회의를 거치며 무려 서른 몇 번이나 '입건'된다. 그런데 한 번도 정식으로 구치소 구경을 한 적이 없다. 자신의 말대로 '빵복'을 타고 나지 못한 거다.



2. 지속의 연료


이념과 실천


심상정이 걸어온 길은 일반적인 인텔리 활동가들이 걸어온 길과는 사뭇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현장에서부터 운동을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현장의 실무 책임자 역할을 지속해온 것이 그러하다. 그 지속의 동력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다.


많은 인텔리 출신 활동가들은 80년대 중반 이후에 전위 조직을 결성하고 스스로 전위를 자처했다. 그리고, 대부분 그 조직과 이념을 스스로 포기하고 운동에서 떨어져 나갔다. 서노련 내부 논쟁 과정에서 그는 좌우 양쪽으로부터 경험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의 태도가 옳았다는 데에 흔들림이 없다.


>> 오랜 세월이 지나서 보니까 여자들의 판단이 상당히 현실적인 거 같아요. 당시 전략 논쟁이 엄청 대단했는데... 저는 결국 해답은 대중과의 결합과 그 검증과정 속에서 우리의 전망을 내올 수 있는 거지 문건 논쟁 가지고 될 문제는 아니다는 입장을 견지했었어요.


심상정은 이념이나 노선 문제에 대해 실천과 현실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 그런 태도가 운동을 지속하여 온 동력의 일부를 구성하는지 모른다.  노선의 분화가 확실히 진행되고 난 뒤에는 정파 조직에 참여한 적이 없다고 한다. 


>> 서노련 내부 논쟁에서도 그랬는데 비공개 틀에서는 당적 조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박노해 씨를 비롯해서... 그래서 '당건설준비위'까지 추진하다가 논쟁 와중에서 서노련이 깨지게 된 거죠.


그래서 그 때 제가 가졌던 확신은 당시 노동운동가들이 가졌던 사고가 사회와 자본주의의 구조에 대해서 너무 주관적인 인식을 가진 게 아닌가 하는 거였고, 또 결국은 주체인 대중을 묶어 세우고 그 속에서 검증되고 체화된 노선이 아닌, 관념적인 논쟁이 절대로 우리 대안이 될 수 없다... 대중조직이 발전하는 토대 위에 그런 문제가 검토되어야 한다는 게 제 문제의식이었지요. 


전략과 노선을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는 전위 조직에 몸을 담그지 않고 대중조직 속에서 노동자 대중과 호흡하였기 때문에 바람을 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일까? 출발은 양심이나 정의감이었다고 하더라고, 운동의 와중에서 다른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이념이 선차적인 문제로 된다. 그리고 91, 2년 이탈자가 대거 발생할 때도 문제는 이념이었다. 이 때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 많은 활동가들이 떨어져 나가고 이합집산할 때, 예컨대 김문수 씨라든지... 동료들과 감정이 상할 정도로 많이 싸웠지요. 그 사람들은 자기 개인적 전망으로부터 운동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소련 사회주의가 무너졌다 해도 우리나라에는 열악한 조건에 있는 노동자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또 파쇼적인 통치도 건재한데, 운동이라는 거 자체가 열악한 조건에 있는 약자의 편에서는 거잖아요? 현실 토대로부터의 당연한 출발점이 그런 사람들한테는 아무런 고려사항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굉장히 분노를 느꼈지요.


>>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전망 없다"는 말을 하면서, 다른 길을 찾아보자는 제안을 많이 했었어요. 시작할 때는 우리는 평생동지라 그러면서 개인을 희생하고 사회와 역사에 복무해야 한다는 초심이 있었는데... 배신감을 느꼈지요.


내친 김에 말많은 소위 386 정치인들에 대한 생각도 물어보았다. 특히 옛 서노련 사람들에 대한 애증은 장난 아닐 것 같다. 그러나 답은 신중했다.


>> 음... 그분들을 원망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근데 역사나 사회 앞에 좀 진솔한 자세를 갖는 게 그분들이 할 마지막 역할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이런 코스로 계속 살아왔는데... 저 같은 코스를 겪지 않은 분들은 다양한 사회 고안에서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분들이 주목받는 것은 본인들의 주장이 너무 높은데... 굽히지 않은 채 기성정당에 결합했다는 거죠. 그런 문제에 대한 도덕적 정치적 책임은 스스로 질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돌아가자. 그는 이념의 패배나 좌절이 노동운동에 몸을 담고 일을 해 나가는 데 있어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했다. 이념이나 노선은 현실 모순의 해결의지로부터 그 방향이나 방법론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심상정은 힘주어 말한다.


옳은 말이다. 물론 현실에 출발점을 두어야 한다. 그런데 이념적 지향성이 없는 운동이 있을 수는 없고, 이념의 문제를 지금 고민하지 않고 내버려 둘 수만도 없는 거 아닌가? 이 문제를 민주노동당의 강령 문제와 결부시켜 물어 보았다.


>> 뭐 사회주의 이념을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문제는...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 속에서 실패하고 왜곡된 원인을 찾고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생각해야겠지요. 민주노동당 내에도 시장 사회주의 노선과 고전적 사회주의 노선의 논쟁이 있었죠. 지켜봤는데... 사회주의 경제의 관료화나 생산성 문제나, 그게 굉장히 중요하긴 하지만, 당면한 갈등과 대립을 해결하기 위한 문제로 되기에는 아직 실천적으로는 이르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답을 낼 수도 없고요. 또 그런 이념적 차이들이 실천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그다지 크지 않죠.


"사회주의"를 포기할 수는 없되, 어떤 사회주의인가에 대해서는 답할 수 없다. 심상정 뿐이랴? 그리고 다음과 같은 보충설명이 있었다.


>> 저는 기본적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이... 어쨌든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뛰어넘는... 사회적인 불평등의 해소, 민주주의의 확대,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와 평등 - 이런 것이라 보고요. 이런 문제들을 당면한 실천 속에서 같이 맞물리게 하면서 검증해나가야지요. 그리고 제가 공부가 짧아요. 그래서 섣불리 어떤 편에 서기보다는 앞으로 공부를 많이 하려고 그럽니다. 하하하.



경험과 체질


탐색의 방향을 조금 돌려보았다. 이념이나 조직이 아니라면, 지속의 동력은 아마 경험과 체질에서 주어지는 것일 테다.


>> 오랫동안 운동하는 자리에 있게 된 것도 처음 4년간 구로공단 생활의 영향이었던 거 같아요.  우리 사회 생산의 주체라는 노동자들이 그렇게 엄청난 인간 이하의 조건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놓여 있다는 게 충격이었어요.


거창한 사회변혁 이전에 다수의 일하는 노동자들이 그런 정도로 비인간적인 조건에 놓여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고 죄스럽고 그랬죠. 그런데 공단의 노동자들이 너무 맑고 착하고... 성실하고 그래요. 그런데 당시만 하더라도 노동자들은 다 공돌이, 공순이라 불리는 정도로...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무권리 상태에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ML주의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 노동자들과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죠.


- 그건 20년 중에 일부에 불과하고 또 누구나 한번 쯤은 몸으로 느끼는 것 아닌가요?


>> 그래서 또 두 번째는, 무식하고 무권리하고 소시민적이라고 말해지는 이 노동자들이 과연 우리 사회 역사의 주역으로 나설 수 있나? 저는 그런 가능성을 실천하면서 확인할 수 있었어요. 실제로 노동자들이 자기 힘을 알고 세상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면서 정말 엄청난 힘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 말이죠. 두 가지가 큰 자양분이 되었어요. 그 때는 밤 10시까지 일하고 같이 떡볶이 사먹고 또 소모임에 참석했다가, 새벽에 방에 들어와서는 또 한 두 시간 학습하고 자고, 또 새벽에 일어나 출근하고 그랬지요. 


그러나 동정이나 연민만으로 노동자들과 어울리고 그렇게 오래 함께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 같이 어울리는 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구로공단에서는 대부분 여성 사업장이어서 별 어려움을 못 느꼈는데, 전노협은 대공장 남성노동자 중심이잖아요. 나이도 상당히 있으시고... 그러다보니 그분들이 "아가씨"에 대해 갖는 이미지 때문에 굉장히 불편한 게 많았어요. 결혼하고 애도 낳고 해서 지금은 많이 편해졌는데, 그런 건 역시 어려웠던 거 같아요.


자기 노력도 많이 필요한 대목이죠. 말하자면 인텔리에 대한 기본적인 경계도 많았고... 지금도 그런 게 없다고 볼 수는 없죠. 그러나 지금은 경력 같은 게 다 공개되고 어쩌면 하나의 운동 내용으로 자리잡았지만, 그 때만해도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그런 걸 어색해하고 또 스스로 구별되고 하는 점에 대해서 매일 자기반성도 하고, 자기를 다스리는 노력을 초기에는 많이 의식적으로 한 거 같아요. 결국은... 그런 문제로 실패하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


>> 그 당시는 그런 열정으로 극복했던 거 같고요. 지금 제가 마흔 둘인데 한 삼십 대 후반까지는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한 번도 돌아본 기억이 없다는 걸 어느 날 문득 깨달았어요.


이건가 보다. 우리는 체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혹 그는 운동판에서 간혹 볼 수 있었던 "무서운" 선배나 신념으로 똘똘 뭉친 여장부였을까?


>> 글쎄요... 이제 돌이켜보면 같은 동료들 사이에서는 인간미가 많이 부족하고 또 이런 나에 대해서 편한 선후배로 생각하지 못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그 때만해도 그게 내 퍼스낼리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동료들이나 후배들이나 굉장히 고민이 많고 그래서 술 한 잔 하면서 고뇌도 많이 하고.... 또 어떤 애들은 그 닭장집에서 자취하면서도 자기만의 공간을 가질려고 애를 써고 그랬죠. 저는 그런 걸 잘 이해 못했던 거 같아요...


>>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존재전이를 할 때 비교적 저 같은 경우는 많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그래서 운동하면서 그런 고뇌 같은 걸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거 같아요.


경험해본 사람은 어떤 대중조직의 실천을 조직 기획하는 실무가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것이다. 그것은 자체로 "노가다"이며 "따까리"이다. 또 그 일은 남들 앞에 전혀 빛이 안 나는 일이지만, 최고의 성실과 헌신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런 일을 하다보면 스스로 소모된다는 생각을 하기도 쉽다. 그런데 심상정은 그런 자리를 계속 지켜왔다.


>> 그런 일을 많이 하긴 했지요. 사무차장 맡으면서는 좀 달라졌지만요. 운동의 규모가 커진 지금에 오히려 그런 게 문제가 되는데, 전노협 당시만 해도 모두들 굉장히 헌신적이었지요. 앞 뒤 재고 가리고 그럴 여유 없이 어쨌든 상황을 돌파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헌신성을 많이 발휘하던 시기였죠. 그런 거 자체가 보람이었고요. 굉장히 어렵고 중요하고 힘든 일을 하는 걸 영광으로 알던 시기고요.


>> 전노협 초기에 쟁의국장을 할 때 일인데 현대중공업에 교육을 갔었어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40대도 굉장히 많은데, 칠판에 전노협 쟁의국장 심상정이라고 써 놓고 내가 앉아 있는데 아무도 절 강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지금 이렇게 뚱뚱해졌지만, 그 때만 해도 지금보다는 날씬하고 얼굴도 예뻤겠죠? 하하.


>> 그 분들 생각에 전노협이라면 굉장히 대단한 조직이고 또 거기 쟁의부장이라면 전투적이고 우락부락하고 그래야 될 건데, 전노협 쟁의부장께서 강의를 해 주시겠습니다. 해서 앞으로 나갔는데, 전부 내 뒤만 보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왔나 하고요. 하하하. 그런데 아가씨가 나오니까. 지금은 워낙 오래 했고 해서 그런 일은 거의 없죠.


그런데 그 또한 보통의 대학생들처럼 다른 소시민적 기질이 강한 서울의 중산층의 딸이라 했는데... 


>> 중산층인데 하층 중산층이죠. 전 막내딸인데 전통적인 가정들이 그렇듯이 아들들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지만, 딸들은 그냥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뒀어요. 지가 공부해서 대학 가면 가는 거고... 아들만 챙기고 하는 거에 대해서 많이 항거하고 또 오빠들과 많이 싸우고 했던 기억이 나요. 오빠들이 저를 불여우니 구미호니 그렇게 부르고 했죠. 하하하.


그가 신념과 열정에 똘똘 뭉친 인간인지 여장부였는지, 그 속내를 다 짐작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결코 평범하지는 않다는 느낌이다. 그야말로 장기간 수배 생활을 하고 공권력이 가족들을 괴롭힐 때도 그는 타협을 몰랐다.


- 부모님들이나 가족들의 걱정을 많이 끼쳤을 것인데요...


>> 많이 어려워하셨죠. 저희 어머님이 저 땜에 워낙에 그래서 몸 한 쪽에 마비증세가 오기도 하고 그랬죠.  집을 79년에 나와서 87년에 들어갔죠. 그 전에는 이래저래 전화도 하고 주말엔 집에도 가고 했는데 수배 이후에는 전혀 연락도 못하고 살았죠. 또 이 사람들이 제 친인척들을 많이 괴롭혔어요. 뒤지고 다니고... 형부가 군 보안대에 계셨는데 형부한테 찾아내라 하는 식으로 괴롭혔대요. 어려움이 많았겠죠. 그래서 그냥 저는 일체 연락을 끊고 살았어요.


>> 뭐 엄마가 결국 포기하시게 됐죠. 극단적으로 나서서 제가 하는 일을 못하게 하거나 말리거나 하진 않으셨어요. 지금도 많이 도와주시고요.


- 근래 일과는 어떤지요?


>> 애가 올해 초등학교 들어갔거든요. 제가 한 달에 많을 때는 반, 보통은 한 열흘 출장을 다녀요. 최근에는 덜한데. 여섯 살 때까지는 애를 친정에서 키워주셨어요. 1년간 부산에 사무실이 있었어요. 그 때는 1주일 단위로 서울-부산을 오갔지요. 그래서 1주일에 한 번 밖에 애를 못봤죠. 애가 정서적으로 '엄마병' 걸렸다고 그랬어요. 그런 게 제일 어려운 점이었어요.


>> 초등학교 1학년인데 숙제가 거의 엄마 숙제더라구요. 근데 뭐 활동에 제약은 안 받습니다. 부모님도 도와주시고 남편도 많이 도와주니까요. 어제도 제가 출장을 다녀왔는데, 일분 일초를 긴장하며 살죠 아이 때문에. 하하하. 뭔가 삐끗하면 안 되니까.


>> 출장갈 땐 아들한테 미리 설명을 하죠. 아빠하고 일정을 조정하고 어머니한테 양해를 구하고 하죠. 빈 시간 동안 특히 아들한테 이해를 구하는 데 시간을 많이 들이죠. 그런데 그렇게 커서 그런지 아들이 이해를 잘 해주는 편이에요. 집회 같은 게 있을 때는 엄마 보러 아빠가 데리고 나와요.


 - 실례가 안된다면, 부군께선...


>> 애 아빠는 서노련에서 같이 활동하던 사람이고 결혼한 이후엔 생업에 종사했는데, 가진 것도 없고 사업 수완도 특별히 없고 그래서 다 망했어요. IMF 때. 지금은 조그만 연구소에 다닙니다.



3. 심상정이 말하는 민주노조운동의 과제


롯데 노조 폭력 진압 이후의 노동 정세에 대해 우선 질문했다.


>>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해 정권이 미동도 하지 않은 게 구조조정에 관한 거예요. 김대중 대통령이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결연한 의지를 가진 거 같아요. 올 하반기에 4대 부문 - 금융, 기업, 노동, 공공 부문에 대한 개혁을 완료하겠다고 했지요.


민주노총에 대한 탄압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밀고 나가기 위한 수순인 거 같아요. 그게 본질이죠. 부차적으로는 지난번에 의사들한테 뺨 맞고 딴 데서 화풀이하는 면도 분명히 있기도 하고요. 금융 구조조정에 대우자동차, 한전, 한중 매각 문제도 걸려 있지요. 하반기 국면을 돌파하기 위한 선수를 치는 거죠.


올해부터 2002년까지가 노사관계가 근본적인 변화가 도모되는 전환기이며, 기존 기업별 체제하의 10년간의 노동운동의 위기 국면이라는 점을 덧붙여 이야기했다.(<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노동의 시대'를 위하여>란 제목으로 심상정 사무차장이 쓴 글이 있다. 이 글에서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현재의 탄압은 단순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정부와 사용자측은 뭔가 근본적인 변화를 기도하고 있다.


>> 한미행정 투자협정... 특히 한일 투자 협정은 연내에 관철될 가능성이 높다는데... 그런 투자협정은 초국적 자본의 이해를 보장하는 제도적 정비라고 보면 되고요. 예를 들어 멕시코의 경우를 보면 NAFTA가 되고 난 이후에 어떤 공단에는 2만개 공장중에 노조가 2개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거든요. 스크린 쿼터가 바로 그런 문제와 관련된 거죠. 그게 투자협정 사안이잖아요. 영화인들이 영화 예외주의 관점에서 접근한 건데 어쩌면 SOFA랑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노동권이나 이런 문제가 국내법으로 다스려지기가 어려워지는 거죠. 


우리 금속연맹 사업장도 30%나 해외 매각되어 버렸거든요. 이름이 영어로 다 바뀌어서 외지도 못해요. 하하하. 그런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서 민주노총이나 노조에 대한 정지작업을 하려 들 거예요. 그에 대한 능동적인 준비가 부족하면 일본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상당히 큰 거죠.


이에 대한 민주노총의 대비책은 어떻게 준비되고 있는가? 심상정은 민주노총 내부의 고민과 현재 민주노조운동의 문제점을 솔직하게 들려 주었다.


>> 현재까지의 체제로는 돌파하기가 어렵다는 인식하에 중앙에서는 새로운 정세에 부응하기 위한 내부 개혁을 서두르고 있는데요. 사실 10년간 민주노조운동의 질적인 한계가 너무 크게 보이거든요. 지금 고민이 많아요.


>> 경제적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실천을 모아내는 데 점점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고, 특히 노조내에 임금 격차가 문제지요. 예컨대 올해 임금 인상률을 얼마나 잡느냐 이런 걸 연맹에서 논의하는데 전노협 때만 하더라도 단일안을 제출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중소노조는 12% 들고 나오고, 대기업 노조는 "무슨 소리냐 너무 많다 6%!" 그런다고요, 그러면 이게 무슨 입장 차이인 거처럼 막 졸라게 싸운다고요. 그럼 뭐 결론은 플러스 마이너스 3%로 되죠.


 

산별 노조 건설의 의의


노동자 계급 내부의 성층화(정규직, 비정규직, 영세 하청 노동자의 차이)의 문제를 들어 기업별 체계가 산별노조로 전환되어야 하는 필연성을 역설했다.  


>> 우리 연맹 내에서만 하더라도 3.5배 차이가 나요. 그러니까 산별이라는 게 단지 구조적으로 기업별 체계를 뛰어넘는 거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의의가 커요. 말하자면 노동운동 내에서 약자 보호적인 관점에서 다수의 비정규직이라든지 영세 하청 노동자들을 조직화해야 되는 거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노동운동이 설 수도 없고.... 그런데 이런 지향을 갖는 산별노조 건설 운동에 대공장이 상당히 소극적이죠.


>> 이런 질적 발전의 전망을 갖는 노동운동에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 세력을 어떻게 설득해 내느냐가 이게 가장 큰 고민으로 되어 있어요. 예를 들면 연맹 대의원 대회 때 비정규직 조직 사업을 왜 안 하냐 이런 문제가 제기되지만, 대부분의 사업장 단협에는 고용문제나 배치 전환이 있을 때는 비정규직부터 적용한다는 조항이 있어요. 말하자면 비정규직이나 하청 노동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단협이 다 있다는 말이죠.


한중 같은 경우는 회사측에서 정규직이랑 사내 하청 노동자들에게 같은 가운을 입히려 해도 조합원들이 반대해요. 이런 문제가 상당해요.


>> 또 노동조합 운동에서 필연적인 것이지만, 조합원들의 실리주의라든지 또 그동안 기업별 틀 내에서 굴절된 노동운동에 대한 이해- 예컨대 임금인상 투쟁하는 데 하루 더 파업하면 계급적이고 하루 덜 파업하면 비계급적이다는 식의 논법 같은 거라든지... 또 입장 차이가 정말 건강한 노선 차이로 이해하기 어려운 면도 있거든요. 모든 걸 기업틀 내의 쟁점을 전국적으로 하다 보니까... 불필요한 기업별 권력투쟁 양상도 나타나기도 하고...


이러한 객관적 정세와 주체적 조건의 모순이 드러나는 과정 속에서 많은 간부들이나 활동가들이 큰 혼란을 겪고 있으며 이것이 현재 민주노총의 통합력과 구심력을 만들어 나가는 데 큰 장애요인이라는 점을 토로했다.


근래 현장 노동자들의 의식성향에 대해서도 물었다. 이전처럼 노동자들이 소모임을 만들어 학습하고 하는 일은 많이 줄어들었는데 매스컴이 발달하고 노동자들의 전체적인 의식 수준이나 교육 수준이 높아져서 80년대와 같은 방식의 교육 선전 활동은 상대적으로 불필요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눈 앞의 경제적 이익에 집착하는 경향은 분명히 이전에 비해 커졌다고 한다. 이는 어쩌면 기업별 체계 하에서의 10년간의 노동운동이 빚은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평가가 가능하도 한다. 민노총의 활동 내용 중에는 사회 개혁 운동도 있었지만 임금인상투쟁에 치우쳐 왔던 면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심상정은 민주노동당 당대의원회 부의장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 민주노동당 쪽으로 화제를 돌려 보았다.


>> 민주노동당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죠. 제가 당장 노동조합에 직책을 맡고 있다 보니까 당에서 역할을 하기는 어려웠지요. 특히 여성 할당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면서 당 내에서 여성들이 책임져야 할 자리가 많아졌어요. 부대표 자리를 채우기도 어렵고. 그래서 여러 가지 주문이 있었어요. 비교적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담이 덜 되는 걸 하려다 보니까 당대의원회 부의장직을 맡게 된 거예요. 현재로서는 일단 일상적 실천의 중심은 금속연맹에 둘 수밖에 없어요. 하하하.


- 민주노동당의 진로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는데, 선거 이후에 민주노동당의 전망을 막연하게 밝게 보는 경향도 많은데요?


>> 쉽지는 않겠지만, 밝게 보고 싶어요. 기본적으로 노동자와 진보세력을 대변하는 정당운동이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민노당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정당을 위한 하나의 시도라고 생각해요. 그게 그 모태로 발전할 수도 발전적으로 재편될 수도 있겠지요. 이 땅에 진보정당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실천을 모아가는 게 중요하겠지요. 현재 민주노동당은 정말 한살바기에 불과한데, 그게 진보정당으로서 적절한가 아닌가 하는 평가나 진단은 위험한 거 같아요. 지금은 무조건 민주노동당에 물을 주고, 기름을 줘서 키워야지요.



4. 21세기 운동가의 존재 조건


- 앞으로도 계속 그동안 해 오신 것처럼 실무 책임자 역할을 하시면서 사실까요? 할머니가 될 때까지?


>> 하하하. 진짜 죽는 날까지 노동운동을 계속 할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고 생각은 해요. 하지만 나이도 먹고 조직이나 운동의 발전에 따라서 역할은 달라져야지요. 또 요구되는 것도 달라질 거 같고요. 그런 거에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부응할 생각입니다.


심상정은 결코 비범하지 않은 내적인 에너지로 20년간의 운동을 해왔다. 그렇지만, 순수한 헌신과 열정만으로 노동운동을 오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며, 시대 또한 그렇지 않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그 자신을 위해서나 보다 젊은 다른 운동가들을 위해서나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 


 >> 목적의식적인 운동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직업적 운동가들이 실무진으로 결합해서 하는 이 구조가 자기 발전과 운동 발전의 굉장히 많은 한계가 있다는 점을 느끼고 있어요. 저는 조직 내에 지위는 낮지만, 제 소신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영역은 만들어 왔다고 생각하는데, 일하는 모든 분들이 그런 건 아니거든요.


>> 전노협 때만 해도 다 처녀 총각이고 젊었지만, 지금은 다 가정이 있고 나이도 40줄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죠. 노동운동 내에서 실무적 지위에 있는 분들의 향후 진로나 역할이 단순히 개인적인 진로 문제가 아니라 우리 노동운동 발전과 상당한 함수관계가 있다는 거죠. 말하자면 그런 실무진 중에서 맨 꼭대기에 올라 있는 게 사실 저예요!


그래서 심상정은 실무자 출신의 다른 운동가들에게서 많은 주문을 듣기도 하고, 스스로 진지하게 운동을 계속하기 위한 모색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의 경험이나 실천을 정리하는 작업과 향후 점점 넓혀질 노동운동의 지평에 걸맞는 자기 충전과 업그레이드 하기 위한 일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 때가 되면 민주노동당도 활동도 열심히 할 겁니다. 당대회가 공식적인 당의 최고 의결기구인데, 그를 통해서 당의 작풍을 건강하게 만들어야지요. 민주노동당에 대한 당원들의 불만이 많고 다양한데, 지도부뿐만 당원 전체가 책임감을 가져야 할거라 생각해요. 당적인 실천을 하기 위한 연습이 사실 부족하고 전에 속해 있던 노조나 정치조직에서의 활동 경험을 그대로 갖고 와서 움직이는 경우가 많거든요. 또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당이냐 하는 지적도 많은데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의 활동에 구속되는 면은 지양되어야 하겠고요.


그러나 이런 모든 희망이나 계획은 나중의 문제라는 말도 덧붙였다.


>> 그런데 제가 해온 일이 좀 결실이 된다 싶으면, 음... 금속산별노조가 내실 있게 만들어지면 제가 생각해오던 걸 자유롭게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 한 번도 쉬지 않고 일을 해온 건데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까? 또는 그런 차원말고라도 개인적인 차원의 희망 같은 거는 없는지?


>> 쉰다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좀더 쓸모 있게 만드는 데 시간을 좀 쓰고 싶죠. 그런데 여건이 안 되죠. 개인 희망을 가지고 고민을 해본 적은 별로 없고요. 개인희망이 결국 운동 발전과 맞물려 있는 건데요. 사실 개인적으로만 보면 쉬운 방법도 있어요. 여성할당제도 있고... 또 저 같은 경우는 어쨌든 굉장히 오랜 기간 해 왔으니까 좀 쌓아놓은 게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개인적 희망을 갖고 뭘 생각하기는 우리 운동이 굉장히 어수선하지요.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고 안정화되야 다른 일로 장기적으로 복무할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올해 10월에 금속연맹이 산별노조로 전환이 됩니다. 일단 이것에 집중해야지요.


 - 20년간 한길을 걸어왔는데 우리 운동이 뭐가 달라졌습니까? 처음 그야말로 열정과 헌신으로 운동에 복무할 때와 지금은 차장님 자신도 달라지신 거 아닐까요? 지금은 전문가시기도 하고...


>> 전문가는요? 하하하... 그냥 오랫동안 했죠. 이전과는 다르죠... 확실히 다르죠. 지금은 노동운동의 미래가 간단치 않다는 우려와 극복해야 한다는 부담이 사실 굉장히 큽니다. 이전에는 그런 거 저런 거 없이 그냥 열심히 했죠.


 >> 외형적으로 운동이 성장했는데 그간의 성과에 못지 않게 커진 한계를 어떻게 돌파해 나가냐 하는 것이 과제지요. 한계는 앞서 말한 그런 것들인데... 만만치가 않아요. 또 그를 위한 조건, 활동역량도 아직은 충분하지는 않고요. 이런 게 정신적으로 중압감을 갖게 하죠.



 어떻게 운동할 것인가?


- 달라진 조건하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되나요?


>> 저는 여기 금속연맹 실무진들과도 그런 이야길 자주 하는 편인데... "네 전망이 뭐냐?" 사실 오랜 기간 활동해온 활동가들에게 매너리즘이나 타성이 생기고 때로 기본적인 것들에 소홀하게 되는 일도 생기죠. 그건 몰라서 그렇다기보다는 자기 내적동력이 상당히 소진됨으로써 나타나는 문제이죠. 이제 나이도 많아지는데 자기 인생과 미래를 명확하게 재정립할 때, 그리고 그것이 노동운동의 발전전망과 일치될 때 새로운 에네르기로써 돌파될 수 있다는 거거든요.


>> 마치 초기에 운동할 때처럼 무조건적인 헌신성만 강조되고 자기 발전전망의 문제는 금기시되고 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해야된다, 그렇게 주문을 하죠." 자기 전망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쳇바퀴 돌 듯 해왔던 일을 반복하다 보면 스스로 활력을 잃어가겠죠. 그래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그 전망이 적어도 운동 발전의 전망과 일치할 때 욕심을 가져야 된다. 또 그런 일은 상호 협조해야 된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 현재 우리 노동운동의 구조가 그런 젊은 사람을 키워나갈 구조가 될까요?


>> 조직은 아직 그럴 형편이 아니지만, 욕심을 갖고 전망을 가질 때 실무 차원이 아니라 자기 발전이나 조직 발전을 위한 동력이 되겠죠. 조직에서 그런 배려를 해야 되는데... 그런 인식과 조건이 부족한 건 분명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심상정은 하나의 예를 들었다. 과거에 단위노조에서 교육선전부장을 하던 서울대학 출신이 어느 날 사라졌다. 그런데 근데 이번에 사법고시에 붙어서 나타나서는 금속연맹 법률원의 연수생으로 신청을 했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를 보면서 농담삼아 노운의 실무자들 중에 자신들은 속된 말로 뺑이치면서 지금까지 복무해왔는데.... 하하하 그 변호사는 아마 앞으로 법률원에서 노동운동에 복무할 건데, 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여지가 굉장히 크죠. 자기 지위도 갖고. 그래서 실제로 그런 걸 보면서 공허해하는 분들도 많았어요. 우선 생활이 잘 안되니까요.


- 그래서 그 분들에게 뭐라고 하셨나요?


>> 자기 욕심만 앞세우면 조직이나 운동 발전에 배치되고 그러면 결국 스스로 떨어져 나가게 되겠죠. 그런 문제는 우리 노동운동 내부의 구조를 바꿔나가는 문제와도 관련되는데 그런 면에서 저를 포함해서 우리 실무 노동운동가들이 상당히 나약하고 타협적이라 생각해요. 대중운동과 타협한 셈이죠, 어쩌면... 그래서 새로운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죠. 주체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그런 고민을 가지고 이야기 해보자고 말이죠.


- 생활이 잘 안된다 그러셨는데 차장님 월급은 얼마쯤 됩니까?


 >> 나이가 있으니까 100 몇 만원 받지요. 젊은 실무자들은 80쯤 받고요. 옛날 전노협 때 비하면 뭐... 하하하. 옛날에는 우리가 아르바이트해서 갔다 부었으니까. 실제로 어려운데... 우리 아저씨가 사업에 실패하고 해서 제가 번 거로 생활하거든요. 빚도 있고요.


결혼할 때 300만원 가지고 해서 지금 과천에서 2,100만원짜리 전세에 살아요. 또 이사를 가야 되는데... 그래서 어른들이 볼 때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고 불안하고 그렇겠죠. 또 평범한 소시민이었으면 그런 상태에 대한 정신적 부담이 상당히 컸겠죠.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하지만 애가 크고 하는데 그런 부담이 다 있지 않겠어요?  


두 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그는 시종 변함없는 성실함과 여유로움으로 질문들에 응했다. 심상정이 앞으로의 자신의 전망을 말하는 대목에서 내가 궁금해하던 그 "지속의 동력"에 대해 어렴풋이 느낌이 왔다. 운동이라는 이름의 시대와 대의의 요청이 거기 있고, 거기에 자신을 투여하고 변화시키는 것....


앞에 걸 알아차리는 것이나 뒤에 걸 위해 결단하고 준비하는 것, 그거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심상정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마흔 두 살의 아줌마 심상정이 일하는 민주노총의 최대 산하조직인 전국금속산업노동조합연맹은 서부역에서 갈월동 쪽으로 한 100미터 가다보면 있다. 인터뷰가 끝나고 땡볕 속을 걸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빛나지 않은 자리에서 오랜 세월 언제나 성실하게 역사와 노동자계급의 대의에 복무해온 그를 우리 시대의 참된 모범생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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