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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코뮨주의 ②] 자본지배 ‘벗어남’ 넘어 ‘극복·대체’ 노력을 / 심광현

by 내오랜꿈 2008.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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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지배 ‘벗어남’ 넘어 ‘극복·대체’ 노력을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⑥ ‘코뮨주의’ 대안 맞나 ② 독점당한 삶 벗어나야 할 때

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출처 : <한겨레> 2008년 02월 15일 


» 이탈리아 볼로냐 지역 코뮌 운동의 구심점인 ‘민중의 집’의 활동 모습을 만화로 보여주고 있다. 볼로냐 민중의 집 소개 책자에 실린 만화다. 이곳은 생활협동조합의 기능은 물론 문화 활동과 정치적 토론의 장으로도 활용된다. 심광현 교수는 ‘민중의 집’이 생태적 문화 사회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올 여름께 한국에도 ‘민중의 집’을 세울 계획이다. 심광현 교수 제공.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생태문화적 혁명이다 

지난주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는 새로운 대안 체제 모델로 ‘코뮨주의’를 정립하면서 그 특징을 개괄적으로 밝혔다. 그는 우선 ‘코뮨주의’를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이라고 규정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가 말하는 ‘코뮨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격과 소속, 기반에 근거한 운동의 의미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상이한 존재들의 공통운동과 같이 대안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를 여는 유효한 방도라는 시각을 보였다. 탈국가적 태도도 눈에 띈다. 국가 개입은 삶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독점만 낳으면서 소통과 협력의 삶으로 가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견해다. 

심광현 교수의 시각은 다르다. 그는 우선 국가를 “벗어나는 것”과 “극복하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을 수 있음을 지적했다. ‘사회적 공공성의 코뮌적 전화’를 위한 실천이 동반되지 않을 경우 자칫 고립된 공동체주의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 공공성 강화와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자립적 동력 구성이 선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소속과 근거를 공유하지 않은 존재들의 공통운동을 강조하는 것은 “동질성 대 이질성, 공공성 대 공통성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관념적 도식이라는 시각을 보였다. 그는 새 대안 체제는 특정 세력이 아니라 현대 세계의 모든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국가에 예속된 삶을 극복할 능동적 기획자로 거듭나는 복합적 운동을 통해 형성될 것이라고 봤다. 다음주에는 조정환 성공회대 강사가 의견을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지난해 내내 20여 년 간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이 민주주의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의 후퇴로 귀착된 원인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논의들이 무색하게 2007년 대선에서 투표자 다수는 양극화를 초래해온 신자유주의를 아예 전면화하려는 ‘이명박 정부’를 선택했다. 대단히 위험한 ‘이열치열’ 식의 논리인 셈이다. 

이에 맞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사회투자국가, 사회적 공화주의 같은 사회민주주의적 대안들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윤율 하락으로 일부 첨단산업과 투기금융에만 투자하는 신자유주의의 장기 하강 궤도에서 성장과 분배의 끊긴 고리는 다시 연결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대다수가 성장의 떡고물이 언제 내게 떨어지나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것은 성장과 소비의 악순환에 중독된 탓이다. 

민주주의란 본래 대중의 자기-통치를 뜻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자율·자립에 기반 한 자기-통치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자기-통치의 권리를 오직 투표 때만 행사하면서 모든 책임을 자본·국가나 ‘진보개혁세력’에게 돌릴 경우 민주주의의 실종은 필연적이다. 아무리 새로운 진보정당을 구성해도 대중의 자기-통치가 부재할 경우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더 늦기 전에 그동안 대의제에 넘겨줬던 정치적 자기결정력을 되찾고, 자본주의적 성장과 소비 논리에서 벗어나 호혜적 생활양식을 새롭게 꾸리고 사회적 연대를 확장해야 한다. 또 자기-조직적인 문화적 역능을 키워내어 자본·국가의 지배를 극복하고 대체할, 자기-통치적인 대중적 네트워크(“민중의 집”)를 아래로부터 새롭게 구성해가야 한다. 이 새로운 운동을 우리는 ‘코뮌주의’라고 지칭한다.(※심광현 교수는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와는 달리 코뮌주의라는 용어를 썼다. 고 대표는 그가 말하는 코뮨주의의 개념은 공산주의 번역어인 ‘communism’에 하이픈을 넣은 ‘commun-ism’이라면서 ‘코뮨-주의’로 표기해야 한다는 견해다. 반면 심 교수는 주민 자치체를 뜻하는 프랑스어 commune의 우리말 표기인 ‘코뮌’을 따라 써야 한다는 견해다. 두 의견을 모두 존중해 필자에 따라 각기 다르게 표기한다.) 

성장·소비논리에 중독된 대중들
자기 통치력 상실로 민주주의 후퇴
자기 삶의 능동적 기획자로 거듭나
아래로부터의 사회연대 구성해야
 

흔한 오해와 달리 마르크스는 ‘위로부터의’ 계획은 자본주의의 특성이라고 보고, 그 ‘전제적’ 성격을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전제적인 계획생산에 맞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코뮌주의’)을 대치시켰고, 후자로부터 생산의 진정한 재조직과 ‘아래로부터의 참여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코뮈니즘’은 ‘전제적 계획’에 의한 공동생산을 강조하는 번역어 ‘공산주의(共産主義)’와는 무관하다. 코뮈니즘을 ‘코뮌주의’로 재번역하려는 것은 이런 오해를 불식하고, 자유롭고 호혜적인 “사회적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코뮌’의 새로운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그런데 새로운 코뮌주의 운동에도 몇 가지 중요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고병권은 코뮌주의를 “국가와 자본에서 벗어나는 삶의 시도”로 정의했다. 그러나 자본·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과 “이를 극복하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을 수 있다. 노장 사상이나 간디의 운동, 모르몬교 같은 전통적인 공동체 운동도 국가와 자본의 포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물론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벗어나는” 실험부터 해야 한다. 하지만 후자의 노력이 전자의 노력과 선순환 구조를 이루지 않는 한, 이는 자본·국가의 지배에 무해한 소수자들의 자족적인 유토피아적 실험에 머물 뿐이다. 마르크스가 고립된 기묘한 성을 세우는 데에 몰두하며 노동자들의 정치운동에 반대했던 오웬의 ‘홈-콜로니’나 푸리에의 ‘팔랑스테르’ 운동을 공상적이라고 비판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수많은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그러하듯이 ‘사회적 공공성의 코뮌적 전화’를 위한 실천 없는 코뮌 운동은 고립된 공동체주의로 머물 수밖에 없다. 반면, 제도 내 사회화 투쟁에만 매몰될 경우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자립적 동력 구성에 실패하고, 이념적 전위주의로 고립되거나 개혁주의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 자본·국가의 지배를 극복·대체할 대안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양자가 자기 혁신을 통해 선순환구조를 만드는 일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정규-비정규·장애-비장애 구분 없이
모든 이들의 호혜적 협동 필요
화폐적·상품적 생활양식 벗어나
생태적 문화사회에서 대안 찾아야
 

그동안의 국민운동, 민주노총 운동, 민주노동당 운동, 시민운동 등은 대의제 운동의 한계에 갇혀 있었기에 비판받을 점이 많다. 또 공공성의 강화가 단지 국가성의 강화로 귀결되지 않게 하려면 국가권력의 장악을 넘어 국가권력을 해체할 비국가적 공공성을 새롭게 발명해야 한다. 하지만 과거 운동들이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했기 때문에 “소속과 근거를 공유하지 않은” “공통작용”을 찾아야 한다는 고병권의 주장은 원인 분석과 대안으로 적절한가? 

정규직 노동자보다 비정규직·해고 노동자가, 정주노동자보다 이주노동자가, 비장애인보다 장애인이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전자 대신에 후자만의 공통작용이 대안이라고 보는 것은 마치 남성보다 여성이 열악한 처지이므로 오직 여성들 간의 공통작용만이 대안이라는 기이한 주장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들뢰즈·가타리도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소수자를 고정된 형태에 한정하지 않았다. 동질성 대 이질성, 공공성 대 공통성이라는 이분법은 “목욕물 갈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우”를 범하기 쉬운 관념적 도식이다. 자본과 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날 뿐만이 아니라” 이를 “극복·대체”하기 위해서는 이런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새로운 코뮌주의 운동은 특정 세력이 아니라 현대세계의 모든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국가에 예속된 삶을 극복할 능동적 기획자로 거듭나는 복합적 운동에 붙여진 이름인 까닭이다. 

동시에 만연해 있는 화폐적·상품적·반생태적 생활양식과 문화를 비화폐적·비상품적·생태적 생활양식과 문화로 대체해가는 연속적 노력이 중요하다. 이것이 과거의 사회주의·공산주의와 새로운 코뮌주의 운동을 구별해주는 생태문화적 특성이다. 호혜적 협동 속에서 지적·감성적·인성적·신체적 역능을 극대화하면서 타자와 적극 소통하는 다양한 문화적 실험들을 대중 스스로 수행하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코뮌주의 운동을 과거의 정치혁명과는 다른 자기조직적인 문화정치적 혁명으로 발전시켜줄 핵심이다.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를 넘어서는” 코뮌주의는 노동을 단지 새롭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양식을 변혁하여 “노동의 폐지”와 더불어 “모든 개인들을 위해 자유롭게 된 시간과 창출된 수단에 의한 각 개인들의 예술적·과학적 교양 등”을 통해-자연과 공생하는 한에서만- “생활과정을 확장하고 풍요롭게 하는 사회”, 곧 생태적 문화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심광현 교수는1956년생으로 서울대 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생태문화사회 구성체와 코뮌주의 운동의 관계, 생산 양식과 주체화 양식의 관계를 규명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프랙탈〉 〈흥한민국〉 〈문화사회와 문화정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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